<곡성> 비축된 의심이 3일 만에 부활했다
의심하면 할수록 더욱 확고한 믿음이 된다는 아이러니
그림자가 실체라고 믿는 동굴 속 사람들처럼 영화 속 주인공들도 관객들도 의심의 그림자 속에서 정작 실체를 놓친다. 부제가 의심하면 할수록 점점 더 악마의 형상으로 변해가는 외지인의 모습을 보면서 나홍진 감독은 이 모든 사건이 의심이 만들어낸 환영일지도 모른다는 또 다른 미끼를 던진다.
*영화의 해석과 결말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사실 안 쓰려 했다. 허무한 결론에 정말 낚시질 당한 것 같은 기분 때문에 ‘이건 뭐지?’ 솔직히 당황(혹은 황당)했다. 근데 이 영화, 자려고 누우면 생각난다. 그러니 영화를 봤다고 하는 사람이 반갑다. 영화의 장면에 대해서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서로 어떤 부분을 놓쳤는지, 내가 본 것은 맞는지 얘기가 길어진다. 딱히 스포일러도 없는 것 같은데 영화를 안본 사람에게 함부로 얘기하기가 꺼려진다. 각자의 해석이 쏟아지고, 기가 막히게 영화를 재구성해주는 네티즌도 등장했다. 어떤 점에서는 정말 저렇게까지 생각했을까 할 정도로 정교하고 철학적인 해석도 있다. 약속한 듯 평론가들이 일제히 극찬을 하는 영화를 혼자 심드렁해 해도 되나 걱정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이렇게 많은 이야기들이 만들어지고 구전되는 영화는 참 오랜만이다. 얼른 빨리 영화를 보고 논쟁에 가담하고 싶다거나, 더 많은 스포일러에 노출되기 전에 영화를 봐야 한다는 소명감이 관객들을 재촉한다. 지금 이 시점에 <곡성>을 보고 얘기하는 것은 관객들이 만들어내는 후일담의 축제에 가담하는 것 같다. 잊고 있다 어느새 다시 <곡성>을 되짚어 보고 있다. 갑자기 종구(곽도원)와 성복(손강국)이 들여다 본 외지인(쿠니무라 준)의 방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어허! 이것 봐라! 의심이 쌓이고 쌓이다 3일 만에 부활했다.
의심하는대로 보이는 방
점점 이상해지는 딸 효진(김환희)의 증상이 외지인 때문이라 확신하며 외지인의 집에 불쑥 찾아간 종구와 성복이 방안을 들여다보는 장면이다. 나란히 붙은 두 개의 방이 있다. 성복은 오른쪽 방 안에 들어가 옆방과 이어지는 쪽문 앞에 있고, 종구는 왼쪽 방문 앞에 서 있다. 종구는 짐승의 머리가 잘려진 사단이 놓인 방을 들여다보고, 성복은 쪽문을 통해 마을사람들의 사진과 물건들이 놓인 방을 들여다본다. 현란한 편집으로 진행된 장면이라 영화를 보는 동안에는 몰랐다. 며칠 뒤 문득 생각이 났다. 종구와 성복이 들여다 본 방은 집의 구조상 하나의 방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하나의 방을 들여다보는 두 사람이 각기 다른 광경을 목격한다. 처음에는 종구의 시점에서 영화를 들여다보고 공감하던 관객들이 툭 또 다른 관찰자가 되는 시점이기도 하다.
조금 더 앞으로 돌아가 종구와 성복의 관계를 되짚어 보면 종구의 의심이 시작되는 시점에는 항상 성복이 함께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성복은 종구에게 처음 마을에 드리운 비극적 사건들이 외지인이 오고부터 시작된다는 이야기를 전한다. 종구가 첫 번째 악몽을 꾼 시점도 성복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서다. 무명(천우희)이 종구에게 사건의 목격담을 이야기하는 순간, 늘 옆에 있던 성복은 없다. 그리고 외지인을 모든 사건의 원흉이라 종구가 확신하게 되는 순간은 방안에서 발견한 효진의 이름이 적힌 실내화를 성복이 종구에게 내미는 순간이다. 성복의 의심은 종구에게 바이러스처럼 스며들고, 실체가 없는 의심은 자기가 믿고 싶은 대로 타인과의 관계를 재정비한다. 여기에 <곡성>의 단서가 있다. 종구에게 닥친 가족의 비극은 종구가 의심하기 시작하는 순간 시작된다. 종구가 의심하는 순간 관객들의 시선은 종구와 분리된다. 종구가 첫 번째 악몽을 꾸는 시점까지 관객들은 종구의 시선으로 마을의 사건들을 바라본다. 하지만 악몽에서 깨어나는 시점에서 영화는 종구의 시점에서 관객을 배려하지 않는다. 첫 번째 악몽은 종구의 의심이 낳은 두려움이라고 볼 수 있다. 두 번째 악몽에서 종구는 ‘XX년아!’라고 소리치면서 깨어나는데 그 XX년이 누군지 우리는 알 수가 없다. 그리고 그때부터 영화는 뚜렷하게 믿고 지지하고 싶은 인물 없이 널뛰기를 시작한다.
또 다른 의심이 시작된다. 정말 무명은 마을과 사람들을 지키려는 수호신인가? 이 질문은 정말 외지인이 악령인가 하는 질문과 맞닿아 있다. 나홍진 감독은 동네 바보 같은 이미지로 무명을 등장시킨다. 무명이 외지인을 죽음으로 이끄는 순간 그녀는 수호신처럼 보인다. 하지만 일광과 무명이 만나는 시점부터 무명의 존재는 그 실체가 의심스럽다. 나홍진 감독은 일광과 무명의 존재를 계속해서 의심하게 만들면서 선과 악의 대치에서 누가 신이고 누가 악마인지를 되묻는다. 무명은 자신이 구하고자 하는(혹은 해하고자 하는) 사람의 옷 혹은 물건을 몸에 지니고 있다. 무명이 서 있던 자리에 혜진의 머리핀이 놓인 것은 혜진이 구원받지 못할 거라는 상징이었을까? 굳건히 서서 외지인을 사지로 몰아넣는 무명이 정작 마을 사람들은 왜 단 한사람도 구해내지 못했을까? 일광과 외지인은 애초에 대치되는 인물로 그려지지만, 일광이 외지인과 같은 요상한 팬티를 입고 있다는 것을 관객에게 보여주는 순간, 그리고 두 사람이 각각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장면까지 겹쳐지면서 같은 악의 존재 혹은 서로의 하수인처럼 보이게 만든다. 심지어 일광의 차에서 외지인의 방에 있던 마을사람들의 사진을 노골적으로 흘리면서 나홍진 감독은 관객들을 다시 한 번 홀린다. 하지만 외지인이 찍은 사진은 살아있는 사람들의 사진이었고, 일광이 찍은 사진은 죽은 사람의 사진이다. 관객들이 재조합한 이야기 속에서 또 다른 의심이 만들어진다. 퍼즐 조각만 가지고 거대한 퍼즐을 완성해 봐야, 제대로 된 그림이 드러나지 않는 형국이다.
동굴의 그림자는 실체가 아니다
부제 양이삼(김도윤)은 외지인이 동굴에 있는 것을 어떻게 알고 찾아갔는가 하는 의문은 <곡성>에 던지는 수십 가지 질문 중의 하나이다. 나홍진 감독은 동굴 장면을 통해 영화가 줄곧 이야기하는 의심과 믿음에 대한 상징을 굳건히 한다. 동굴 이야기가 나와서 보니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가 떠오른다. 깊은 동굴 사슬에 묶인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동굴 안쪽 벽만 보고 있는데, 그들의 뒤에서는 장작이 타고 있다. 그들의 뒤에서 움직이는 것들의 그림자가 동굴 벽에 비친다. 그들은 동굴에 비치는 그림자만이 진짜 존재하는 것이라고 믿지만, 진실은 동굴 밖에 있다는 것이다. 나홍진 감독은 누군가를 의심하면 할수록 그 의심이 더욱 확고한 믿음이 된다는 아이러니를 영화 곳곳에 드러내 놓는다. 그림자가 실체라고 믿는 동굴 속 사람들처럼 영화 속 주인공들도 관객들도 의심의 그림자 속에서 정작 실체를 놓친다. 부제가 의심하면 할수록 점점 더 악마의 형상으로 변해가는 외지인의 모습을 보면서 나홍진 감독은 이 모든 사건이 의심이 만들어낸 환영일지도 모른다는 또 다른 미끼를 던진다.
‘미끼를 물었다’와 ‘절대 현혹되지 마라’는 <곡성> 포스터의 헤드 카피는 영화의 내용을 함축적으로 이야기하기도 하고, 관객들에게 직접 던지는 도발적인 스포일러이기도 하다. 그리고 영화를 보고 많은 의심을 품는 관객들에게 낄낄대며 감독이 던지는 농담이기도 하다. <곡성>은 지금도 끊임없이 관객들을 낚아 올리고 있다. 속고 속이고, 결국 <곡성>은 한바탕 소동으로 끝나는 영화일지도 모르지만 한국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반영하는 장면도 있다. 마을사람들이 죽어나가는 동안에도 시큰둥하던 경찰 종구는 자기 가족이 위기에 처하는 순간 경찰복을 벗어던지고 스스로 모든 사건을 해결하러 나선다. 여기엔 법이고 공공성이고 공권력이고 안중에 없다. 오직 믿을 사람은 나 자신 밖에 없다는 태도다.
종구는 효진을 구하지 못했지만, 효진은 결국 살아남았다. 이 어린 소녀가 세상에 맞서 살아남아야 할 생존의 문제는 정작 홀로 살아남는 순간 시작된다. 어느 누구도 이 작은 소녀를 보호하거나 돌봐주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곡성> 속에 등장하는 공권력과 언론은 한 마을이 살인과 자살로 쑥대밭이 되어가는 동안에도 손놓고 ‘버섯’타령이나 하고 있다. 소름끼치게 현실적이다.
늘 여행이 끝난 후 길이 시작되는 것 같다. 새롭게 시작된 길에서 또 다른 가능성을 보느라, 아주 멀리 돌아왔고 그 여행의 끝에선 또 다른 길을 발견한다. 그래서 영화, 음악, 공연, 문화예술계를 얼쩡거리는 자칭 culture bohemian.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후 씨네서울 기자, 국립오페라단 공연기획팀장을 거쳐 현재는 서울문화재단에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