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성> 아무도 미끼를 물지 않았다
인간이란 한계는 오히려 구원이 된다
불행이 엄습했을 때, 범죄와 혐오의 대상이 됐을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자책하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를 혐오하는 것이 아니다. 불행과 범죄와 혐오에 맞서 싸우는 것이다.
러닝타임 156분. 영화 <곡성>을 보는 건 불편하고 고통스럽다. 이유는 두 가지다. 전선줄처럼 뒤엉킨 복선이 발목을 잡아당기고, 칠흑 같은 공백이 우릴 삼키려 하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인간의 한계에 대해 집요하게 묻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마을에 외지인(쿠니무라 준)이 나타난 뒤 의문의 사건들이 잇따르면서 시작된다. 연쇄 사건의 공통점은 가족이 몰살당한다는 것, 얼굴과 온몸이 두드러기로 덮인다는 것이다. 마을엔 불안과 공포, 불신이 빠르게 번진다.
“요렇게 소문이 파다하면 말이여. 무슨 이유가 있는 거여. 이유가.”
경찰관 종구(곽도원)는 초등학생 딸이 귀신들림 증상을 보이면서 사건의 중심부로 들어선다. 그는 딸을 구하기 위해 무당 일광(황정민)을 불러들인다. 종구의 물음은 “왜 하필 내 딸이냐”는 것이다. 다음은 일광의 답이다.
“자네는 낚시할 적에 뭐 어떤 게 걸려 나올지 알고 하는가?
그 놈은 낚시를 하는 거여. 뭐가 딸려 나올지는 몰랐겄지. 지도.”
“그 놈은 그냥 미끼를 던져 분 것이고 자네 딸내미는 고것을 확 물어 분 것이여.”
종구의 물음은 인간적이다. 인간은 어떤 상황에 놓이든 합리적으로 상황을 재구성할 수 있어야 납득하는 존재다. 하지만 “왜 하필 내 딸이냐” “왜 하필 우리냐”는 질문은 무력하다. 답을 알아도 달라질 것은 없다. 그래도 인간은 “내 눈깔로 직접 봐야” 믿을 수 있고, 답을 알아야 움직일 수 있다. 일광의 대답은 악이 발현되는 건 우연이고, ‘미끼를 물어버린’ 피해자의 탓이라는 것이다. 그는 종구에게 이런 말도 한다.
“자네 며칠 전에 만나믄 안 되는 걸 만난 적 있제? 자네가 고것을 건드려 부렸어.”
나는 일광이 내뱉은 일련의 발언 자체가 미끼라고 생각한다. 즉, ‘미끼’라는 그 말이 미끼인 것이다. 아무도 미끼를 물지 않았다.
미끼를 던졌기 때문이 아니라 미끼를 물었기 때문에 불행이 시작됐다는 건 성폭행의 책임을 피해 여성에게 묻는 것과 다르지 않다. “밤늦게 다니지 마라.” “짧은 치마 입고 다니지 마라.” “인적이 드문 곳에는 가지 마라.” 이런 말들도 미끼를 던진 자의 책임이 아니라 미끼를 무는 자의 책임이라는 전제 위에 서 있다. 이 논리는 세상의 모든 피해자에게 무한 반복된다. “왜 세월호에 올랐느냐. 왜 가습기 살균제를 사용했느냐. 왜 강남역 인근 화장실에 갔느냐.”
이러한 의문들은 그럴 듯 해 보이지만 새빨간 거짓말이다. 가해자의 책임을 피해자 책임으로 오도하는 것이다. 인간을 성욕의 제물로 삼은 자의 잘못이고, 바다에 떠서는 안 될 배를 띄운 자의 잘못이고, 구조하지 않은 자의 잘못이고, 독성물질이 들어간 살균제를 제조ㆍ판매한 자의 잘못이고, 여성에게 흉기를 휘두른 자의 잘못이다. 피해자는 죄가 없다. 무고한 피해자에게 죄를 뒤집어씌워선 안 된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인 다섯 살 아이도 누가 범인인지 안다. “(살균제를 구입한) 이모가 그런 게 아니야. (살균제를 만든) 아저씨들이 그랬어.”(5월 24일자 경향신문)
불행이 엄습했을 때, 범죄와 혐오의 대상이 됐을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자책하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를 혐오하는 것이 아니다. 불행과 범죄와 혐오에 맞서 싸우는 것이다. 지난 일요일 강남역 추모제에서 들은 가장 인상적인 단어는 ‘생존자’였다. 초등학생 때 성폭행을 당했다는 여성은 이렇게 말했다. “대학 진학 후 ‘당신은 성폭행 피해자가 아니라 성폭행 생존자’라는 상담사의 말을 듣고 살아 있다는 게 자랑스러워졌어요.” 그녀는 범죄의 고통에 갇힌 피해자가 아니다. 그 고통을 넘어선 생존자다.
영화의 결말도 같은 맥락으로 읽어야 한다. 영화는 종구와 그 가족의 패배로 막을 내리는 듯 보인다. 종구는 딸을, 가족을 살리기 위해 의사를 찾아가고, 외지인에게 으름장을 놓고, 무당을 부르고, 신부에게 묻지만 모두 실패한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고, 최선을 다했다. 그가 의심하고 또 의심한 것도 어떻게든 가족을 살리기 위해서였다. “닭이 세 번 울 때까지” 기다리지 못했던 건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가 의심했다는 이유로, 현혹됐다는 이유로 비난 받아야 하는가. 마지막 장면. 종구는 피투성이 얼굴로 딸에게 말한다.
“괜찮애. 우리 효진이. 이거 다 꿈이야. 아빠가 해결할게.”
결과가 어찌 됐든, 딸이 어떻게 변했든 아빠는 아빠다. 그는 언제까지나 효진이에게 아빠이고 싶다. 그래서 넋이 빠진 딸에게 계속해서 말을 걸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괜찮다. 인간은 악(惡)에 패배할 수 있지만 영혼까지 내주진 않는다. 악이 사람을 현혹해 죽일 수는 있어도 마음까지 빼앗지 못한다. 악이 이긴 것처럼 보이지만 악이 가질 수 있는 건 인간의 거죽뿐이다. 악마가 카메라에 담을 수 있는 건 오로지 죽은 자의 데스마스크뿐이다. 아빠의 마음, 딸의 마음은 어디선가 살아 숨 쉬고 있다. 한없이 약한 인간도 악이 갖지 못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 힘은 가족, 친구, 사람에 대한 마음이다. 그리하여, 인간이란 한계는 오히려 구원이 된다. 이것이 <곡성>을 본 나의 시각이다.
오늘 하루 불행과 범죄와 혐오와 싸우다 지쳐있을지 모를, 고통에 힘들어하고 있을지 모를 당신에게 이 말을 전하고 싶다. 괜찮아요. 스스로를 탓하지 말아요.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우리 다시 힘을 내요.
관련태그: 곡성, 불행, 범죄, 혐오, 강남역 살인, 세월호, 가습기, 생존자
1990년부터 경향신문 기자로 일하다가 2007년 중앙일보에 입사해 법조팀장, 논설위원 등을 지냈다. 앞에 놓인 길을 쉬지 않고 걷다 보니 25년을 기자로 살았다. 2015년에 <정의를 부탁해>를 출간했다. 이번 생에는 글 쓰는 일에 최선을 다하며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