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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내가 가면 안 돼요?』 연재를 시작하며

『거기, 내가 가면 안 돼요?』 사전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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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남을 통해 두 동강 난 작은 국토에서 살고 있는 청소년들의 가슴속에 대륙이라는 드넓은 공간을 들여놓아 주고 싶었다. 또한 현실에 매몰된 채 앞만 보고 달려야 하는 아이들에게 다른 시대에 살았던 청소년들의 삶을 보여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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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생 시절, 아이들이 읽을 책은 그리 많지 않았다. 세계명작 전집류와 조흔파의 명랑소설 들이 다였다. 그 책들을 일찌감치 읽어치운 나는 고학년이 되면서부터 어른들 책을 기웃거렸다. 이광수, 김래성, 미우라 아야코 같은 작가들의 소설을 주로 읽었는데 그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작품은 이광수의 『유정』이었다. 주인공의 슬픈 사랑은 가슴을 먹먹하게 했고, 드넓은 지리적 배경은 가슴을 뛰게 했다. 경성에 사는 등장인물들은 조선을 벗어나 일본, 중국, 러시아 등을 자유롭게 다녔다.

 

1970년대 초반, 국교 정상화는 됐지만 일본은 감정적으로 여전히 먼 나라였다. 오늘의 중국, 러시아는 중공, 소련으로 불리는 공산국가로 우리의 적대국이었다. 반공이 국시였던 시대의 학생답게 나는 반공 소녀였다. 그런 내게 서울에서 기차를 타고 평양, 신의주를 지나 중국, 러시아까지 가는 등장인물들의 행로는 놀랍다 못해 충격적이었다. (나중에 이광수가 친일문학가였다는 것을 알고 또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정치, 외교 문제가 아니더라도 보통 사람들에게 해외여행은 달나라 여행만큼이나 꿈같은 시절이었다.

 

그때부터 누가 가고 싶은 곳을 물어오면 나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바이칼 호수를 대곤 했다. 남들 다 아는 흔한 곳은 말하고 싶지 않은 문학소녀의 허세였을 수도 있다. 아무튼 수남이라는 아이가 가슴속에 들어앉은 것도 그때부터였는지 모르겠다. 상상 속에서나 갈 수 있는 곳이라 생각했기에 나 대신 그 길을 가 줄 인물이 필요했던 것이리라.

 

한동안 잊고 있던 수남은 동화작가가 되고난 뒤 다시 나타나 마음을 흔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아이를 내세워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 막막하고 막연했다. 2004년, 첫 청소년소설 『유진과 유진』을 쓰고 나자 수남을 통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일제강점기, 한 소녀가 한반도 남쪽 끝에서 출발해 중국, 러시아, 유럽까지 가는 모습이었다. 그 길은 시대적 상황, 신분, 인종, 성별, 배움의 차이 등 앞에 놓인 수많은 장애물을 뛰어넘는 과정이기도 했다.

 

수남을 통해 두 동강 난 작은 국토에서 살고 있는 청소년들의 가슴속에 대륙이라는 드넓은 공간을 들여놓아 주고 싶었다. 또한 현실에 매몰된 채 앞만 보고 달려야 하는 아이들에게 다른 시대에 살았던 청소년들의 삶을 보여주고 싶었다. 본격적으로 『거기, 내가 가면 안 돼요?』를 구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른 문장은 수남이 태어나는 장면이었다. 

 

이른 봄, 쌀독 빈 집 아낙네 박 속 긁듯이 어미의 양분을 바닥까지 파먹으며 열 달을 견딘 생명은 이제 마지막 관문을 앞두고 있었다. (중략) 어미는 누더기나 다름없는 포대기에 감싸인 딸을 보았다. 아직 미끈미끈하고 하얀 태내 기름이 쭈글쭈글한 몸을 뒤덮은 빨갛고 작은 생명에게 묘한 슬픔을 느꼈다. 또 딸이라서만은 아니었다. 아이의 운명이 위의 딸들과는 다른 길로 갈 것이라는, 엄마의 영향력 밖에서 환히 빛나는 존재가 될 것이라는 얼토당토않은 예감 때문이었다.

 

운명을 개척하며 자기 공간을 확장해 가는 수남의 담대한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통쾌하고 신났다. 수남의 자취를 따라가다 보니 채령이 등장했다. 채령은 제 성격답게 주변인물로 결코 만족할 수 없다는 듯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 결과 수남의 이야기는 수남과 채령, 두 소녀의 이야기로 넓혀졌고 그들과 연관된 새로운 인물들이 탄생했다. 가회동 저택과 윤형만 자작, 곽 씨, 술이네, 강휘, 준페이, 태술……. 얽히고 설킨 인물들은 스스로 생명력을 얻어 왕성하게 각자의 이야기를 펼쳐나갔다. 말하고 싶은 것도 ‘운명을 개척하며 자기 공간을 확장해 가는 수남의 이야기’에서 ‘수남과 채령의 인생 이야기’라는 좀 더 포괄적이고 근원적인 이야기로 바뀌었다. 덕분에 인물들의 삶과 마음을 더 깊이 들여다 볼 수 있었다.

 

구체적인 구상을 시작한 지 10년만인 2014년, 이제 쓸 때가 됐다는 마음속 소리가 들려왔다. 그해 6월, 문단 동료들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올랐다. 닷새 만에 바이칼 호수에 다다랐을 때 나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어린 시절의 꿈을 이뤘다는 기쁨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머잖아 같은 곳을 보게 될 수남 대신 울었던 걸까? 지금도 모르겠다.

 

2014년 8월, 세 달 기한으로 증평에 있는 21세기 문학관 창작 집필실로 갔다. 그동안 사 모은 일제강점기 관련 책을 여행 가방 가득 담고서였다. 새롭게 역사 공부를 하며 인물들을 실제적인 시간 속에 들여놓았다. 구체적인 역사와 어우러지자 허구의 이야기가 실제 있었던 일처럼 생생하게 다가와 빨리 시작하고 싶은 조급증이 일 정도였다.

 

그런데 막상 쓰기 시작하자 경험해 보지 않은 시공간을 구현하고, 그 안에서 인물들을 살게 하는 일은 쉬운 게 아니었다. 턱없이 빈약한 상상력 탓에 등장인물들은 활기를 잃었다. 그럴 때면 원고를 중단하고 작품의 무대를 찾아다녔다. 가회동 저택과 별채를 실감나는 공간으로 그리기 위해 전국에 있는 한옥과 근대 건축물들을 찾아 달려갔다. 수남과 채령의 자취를 좇아 여기저기 쏘다녔고, 그들이 배를 타고 갔던 길을 따라 비행기에도 올랐다. 현재의 공간에 인물들을 풀어놓은 채 나는 그들이 살았던 때로 돌아가 보고 듣고 생각했다. 비로소 시공간과 어우러진 인물들에게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나는 이 소설을 청소년뿐 아니라 이제는 성인이 된 나의 오랜 독자들, 삶의 무게에 눌려 자신 또한 한때는 10대였음을 잊고 지내는 어른들이 함께 읽었으면 좋겠다. 또한 나를 응원하며 기다려 준 많은 분들의 사랑에 보답하는 작품이 됐으면 정말 좋겠다.

 

2016년 4월
이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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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금이

‘이 시대 최고의 아동청소년문학 작가’로 꼽히는 이금이는 1984년 ‘새벗문학상’에 동화가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한 이후, 30여 년 동안 진한 휴머니티가 담긴 감동적인 작품을 꾸준히 발표해 왔다. 소천아동문학상과 윤석중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초등학교와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 여러 편의 작품이 실리기도 한 그는 아이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나이를 초월하여 폭넓은 독자층을 가지고 있는 보기 드문 작가이다. 대표작으로 『너도 하늘말나리야』, 『밤티 마을 큰돌이네 집』, 『유진과 유진』, 『사료를 드립니다』, 『청춘기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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