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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사람의 심리학

자궁회귀와 요나 콤플렉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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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문제도 그것이었다. 너무나 세상을 잘 아는 것, 그리고 그녀에게는 세상을 맞설 힘이 없다는 것. 용기 없음이 진짜 문제였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그녀의 에너지는 한없이 뒷걸음질 칠 수밖에 없었다.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오. 
(길은막다른골목길이적당하오.)
제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중략) 
제1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13인의아해는무서운아해와무서워하는아해와그렇게뿐이모였소.
(다른사정은없는것이차라리나았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길은뚫린골목이라도적당하오.)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지아니하여도좋소.

 

처음 시를 읽던 열세 살, 내게 이 시는 무시무시했다. 무서운 ‘아해’들을 꿈에서 만날 정도였다. 1934년 시인 이상이 쓴 <오감도> 연작 가운데 한 편이다. 시는 인생이 어디로 치달을지 몰라 두려운 시인의 내면을 드러낸다. 건강이 몹시 나빴으니, 벌써 죽음을 걱정하는지도 모르고, 사회의식이 없었다고 평가받는 그지만, 식민지 현실이(30년대 경제 대공황이) 마음에 그늘을 드리우게 했을지도 모르고, 하는 일마다 망하고 백수로 사는 처지다 보니 앞이 깜깜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 시는 극심한 두려움을 표현한다. 천재적 발상으로 당대 지식인, 조선인의 암담한 표정을 몇 줄로 담아냈다.

 

마광수 교수는 이 시를 남다르게 해석했다. 그 해석 또한 무시무시하다. 이상이라는 시인이 성적 상상력이 뛰어난 사람이니, 이 시도 성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맞다고.

 

그는 ‘무섭다’는 감정보다 ‘달린다’는 행위에 주목했다. 그리고 이 시를 정자들의 “무서운” 질주라고 설명했다. 길이 막힌 것은 여성과의 섹스고, 길이 뚫린 것은 자위라고. 또 ‘아해(아이)’는 자궁을 향해 달리는 ‘정자(精子)’라는 것이다.

 

독창적이면서도 공감이 가는 해석이다. 이 해석의 옳고 그름을 차치하더라도 어딘가로 도망가고 싶던 퇴행 심리가 반영된 것만은 분명하다.

 

프로이트는 『늑대인간』에서 ‘퇴행(退行, Regression)’을 “강한 리비도(성에너지)가 출구를 찾지 못하고 (중략) 리비도가 뒤로 흐르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정신분석학에서 퇴행은 자신의 현재보다 미숙한 정신 단계로 돌아가는 것을 뜻한다. 성인이 지나간 청소년기나 유아기 때 같은 행태를 보일 때 ‘퇴행적’이라고 말한다. 현실을 감당할 수 없는 정신은 부정적이고 미성숙한 방어기제에 의존하는데, 그것이 부정이나 회피, 자기합리화와 같은 퇴행의 방식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보다 노골적인 표현도 있다. 마광수 교수는 ‘자궁 회귀본능’을 국내에 회자시킨 장본인이다. 특히 이상의 시들이 자궁 회귀본능에 대단히 충실하다고 주장했다. 스무 살, 강의실에서 처음 이 단어를 들었을 때 충격을 아직 잊을 수 없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적나라한 단어여서, 당시 수업 시간 선생에게 늘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입 밖에 내기가 쉽지 않았다.

 

메트릭스-한-장면.jpg

영화 <매트릭스>의 한 장면. 이 영화에서 미래의 인간은 자궁처럼 생긴 캡슐에 갇힌 채 평생 타인이

심어준 꿈을 꾸는 불행한 존재로 묘사된다.

 

 

이 심리 개념을 처음 쓴 사람은 마광수 교수가 아니다. 마광수 교수의 해석은 원안과는 차이가 많다. 심리학자 에이브러햄 매슬로는 친구였던 사회학자 프랭크 마뉴엘(Frank Manuel)에게서 이런 이야기를 듣고서 ‘요나 콤플렉스(Jonah complex)’를 세상에 알리기 시작했다.

 

잘 알려진 대로 매슬로는 인간 욕구의 단계설을 주장한 심리학자다. 그는 인간 욕구 가운데 가장 상위 욕구가 자아실현 욕구라고 했다(진화심리학자인 더글러스 T. 켄릭은 『인간은 야하다』에서 매슬로의 욕구 단계설을 역전시킨다. 그는 인간의 최상위 욕구가 ‘번식’이라고 말한다. 마광수, 매슬로, 켄릭의 생각을 교차하는 일은 흥미진진하다). 그는 이 자아실현의 욕구를 달성하려는 일반적 유형의 인간이 아닌, 퇴행적 심리를 가진 사람들을 ‘요나 콤플렉스’로 설명했다.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이나 사명을 피하려는 성향을 가진 사람을 ‘요나 콤플렉스’를 갖고 있다고 분석한 것이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요나는 하나님에게 한 타락한 도시에 가서 그 도시가 죄악으로 가득 차 있으니 천벌을 받게 될 것이라고는 경고를 전하라는 계시를 받는다. 하지만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배를 타고 도망치다 폭풍우를 만나 배가 침몰했고, 그만 고래 뱃속에 갇히고 만다. 하나님에게 참회의 기도를 드리자 요나는 고래 뱃속에서 마침내 탈출할 수 있었다.

 

요나 콤플렉스는 요나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을 피하려는 퇴행적이고, 나약한 심리를 설명하는 말이다.

 

그런데 마광수 교수는 오히려 이런 심리를 옹호하는 입장에서 인간 누구나 의무나 고통이 없는, 따뜻한 자궁 속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본능이 있고, 이는 미숙하고 나약한 우리 모두가 취할 수밖에 없는, 다시 말해 ‘신이 아닌’ 모든 인간의 보편적 심리라는 것이다. 마광수 교수는 시인 이상화의 「나의 침실로」가 고난의 현실에서 도피하고픈 한 젊은이가 부르짖는 자궁 회귀 욕망의 표현이라고 했다가 비평가들에게 뭇매를 맞기도 했다. 그는 세상이 힘들면 맞서기보다 도망치는 것이 인지상정이라고 했다. 

 

나는 상담실에서 의심할 수 없이, 자궁 회귀 욕망이 심해져버린 사람들을 접한다. 그들은 주어진 책임을 피해 자기 안에 침잠하는, 과거로 뒷걸음치는 모습을 보인다. 

 

수지 씨는 그중에서도 기억에 남는 내담자였다. 서른다섯 살 수지 씨는 외출하는 일이 없었다. 가끔 엄마를 따라 찜질방을 들리거나 집 근처 마트에 장보러 가는 일 외에는 외부 활동이 거의 없었다. 상담을 받는 이들 대부분이 부모와 사이가 좋지 않거나 심한 갈등을 겪지만, 수지 씨는 달랐다. 홀어머니와 무척 가깝고 친밀했다. 다만 60이 넘은 노모가 아직까지도 아파트 청소를 하며 생계를 책임지는 반면, 수지 씨는 무직 상태에서 벗어나려는 의지가 없었다. 노모는 자기가 앞으로 얼마 살지 못할 텐데, 딸이 저러고 있으니 답답하다며 상담을 신청했다. 수지 씨는 상담을 내켜 하지 않았지만, 엄마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어 따라왔다고 했다. 

 

무거운 현실에 지친 수지 씨 어머니와 아이처럼 연약한 수지 씨는 묘한 대비를 이루었다. 엄마는 현실이었고, 수지 씨는 상상 속에서 사는 사람이었다. 

 

은둔형 외톨이 같아 보였지만 수지 씨에게는 의외로 친구가 많았다. 그녀는 자기 외모와는 딴판인 일본 애니메이션 여주인공 같은 아바타로 변해 사이버 세상의 동지들을 만났다. 단, 그들을 직접 만나지는 않았다. 예전 동호회 모임에 나갔다가 크게 실망한 후로는 사이버 친구를 현실에서 만나는 일은 없었다. 그녀는 찾아보면, 자기 같은 사람이 많다고 했다. 수지 씨가 채팅보다 좋아하는 것은 여성 취향의 인터넷소설을 읽는 것이었다. 특정 연예인을 모델로 한 ‘팬 픽(fan fic)’이라는 것에도 빠져있었고, 여성 취향의 ‘야설(야한 소설)’을 하루 온종일 읽었다. 그녀가 읽는 소설에는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자상하고 부드러우면서도, 결코 여성을 배신하지 않는, 충직한 남자 주인공들이 등장한다. 게다가 그들은 성적 능력 면에서도 인간 이상이다. 수지 씨는 여주인공에 감정이입이 된 채 그녀처럼 사랑하고, 섹스하며, 모험을 즐겼다.

 

수지 씨가 자기 방을 찍은 사진 몇 컷을 보여준 적이 있다. 소녀 취향, 아니 유아 취향의 수지 씨 방에는 인형과 푹신한 베개, 담요가 가득했다. 두꺼운 커튼을 친 방 안은 어두웠다. 마치 자궁 속 풍경 같았다. 컴컴한 방 안에서 자기가 읽고 싶은 것만 읽으려고 하고, 단 음식을 입에서 놓지 않는 그녀는 마치 태아 같았다. 무척 아끼는 곰인형 사진도 보여주었는데, 여전히 밤이면 인형을 꼭 끌어안고 잠이 들었다. 

 

수지 씨의 우울증은 햇빛 부족과도 관련이 있었다. 본인은 원치 않았지만, 그녀에게는 세상의 햇빛이 필요했다.

 

상담을 해보니 그녀는 미숙하고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었다. 세상 물정에도 밝고 평소 책도 다방면으로 읽는 그녀는 자신이 왜 이런지, 어떤 삶이 과연 좋은 것인지에 대해서도 알만큼 알았다. 하지만 문제도 그것이었다. 너무나 세상을 잘 아는 것, 그리고 그녀에게는 세상을 맞설 힘이 없다는 것. 용기 없음이 진짜 문제였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그녀의 에너지는 한없이 뒷걸음질 칠 수밖에 없었다. 예전 면접을 갔다가 여러 번 면접관에게 ‘왜 왔냐’는 핀잔을 들은 적이 있었다.

 

“못생겼잖아요, 제가. 세상은 저 같은 사람 좋아하지 않아요. 핑계인 줄 알지만, 어쨌든 그때 얼굴 때문에 입사시험에서 번번이 떨어지니까 세상 나가는 일이 두려워졌어요. 어쩌다 시간이 이렇게 지나버렸죠. 꿈속에서 산 것 같아요. 선생님 말대로 다시 한 번 힘을 내보긴 하겠지만, 전 세상이 여전히 두려워요.”

 

자궁 회귀본능에 대해 말한 사람은 또 있다. 철학자 가스통 바슐라르는 자궁 회귀본능, 요나 콤플렉스를 깊이 있게 다루었다.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마광수 교수의 이론과도 다르고, 매슬로의 요나 콤플렉스와도 차이가 난다.

 

그는 모든 인간이 품고 있는 요나 콤플렉스는 근원적이고 물질적이라고 말한다. 우리 문화 안에 이미 요나 콤플렉스는 곳곳에 존재하고 또 드러난다는 것이다. 인간은 요나 콤플렉스를 피할 수 없다고도 대변한다. 
바슐라르의 『대지 그리고 휴식의 몽상』은 요나 콤플렉스를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바슐라르는 우리 내면의 “요나 콤플렉스는 부드럽고 따뜻하며 결코 습격 받은 적 없는 편안함”을 갈망하는 심리라고 적고 있다. 역으로 생각하면 인간은 태어난 이상 누군가에게 항상 습격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는 왜 우리가 요나 콤플렉스에서 벗어날 수 없는가 하는 근거와, 요나 콤플렉스의 예술적 표현물들을 알려준다. 요나 콤플렉스는 힘겹고, 늘 무뢰한들에게 습격당하는 생을 사는 인간 저마다의, 깊은 휴식을 갈망하는 심정이다. 세상이 개인에게 가하는 압력이 커질수록 사람들은 따뜻한 자궁을 상상한다. 그들을 위한 변명은 될 수 없겠지만,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설명이다. 

 

“잘 자기 위해서는, 잘 가려져, 잘 보호되어 잠들기 위해서는, 따뜻이 잠들기 위해서는, 어머니의 품보다 더 좋은 안식처는 없다”
                                                          - 바슐라르, 『대지 그리고 휴식의 몽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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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의 독서박민근 저 | 와이즈베리
저자는 수십 년간 책을 통해 스스로를 치유했던 경험과 15년간 심리치료사로서 내담자들을 치유한 임상 결과를 토대로 실제로 치유 효과가 입증된 50권의 책을 《치유의 독서》에서 소개한다. 철학상담의 전통과 최신 심리치료 연구성과, 15년간의 독서치료 경험으로 입증된 치유서를 통해 내면의 힘을 키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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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박민근(심리치료사)

대학원에서 문학을 전공했고, 지금은 문학, 철학, 심리학이 융합된 독서치료를 연구하고, 또 임상에 적용하고 있다. 작품으로는 『치유의 독서』,『성장의 독서』,『당신이 이기지 못할 상처는 없다』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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