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최민석의 절도일기(竊圖日記)
4화 – 독서일기에서 음주 일기로
한강의 『채식주의자』 외
사실, 내가 하는 거의 모든 집필활동은 맥주를 마시기 위해 돈을 버는 행위이자, 그간 해온 모든 여행은 맥주를 마시기 위해 떠난 여행이었다. 그만큼, 나는 맛있는 맥주만 있으면 행복한 사람이다.
필자의 책상 위에 노트북 대신 놓인 맥주잔
3.15.
좋아하는 선배 작가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맨부커상 후보로 올랐다는 기사를 접했다(인터내셔널 부문이다. 아카데미상으로 치자면, 외국어영화상 부문). 이를 기념하기 위해 『채식주의자』를 다시 읽었다.
채식주의를 소재로 다룬 이 소설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데올로기가 우상화되었을 때, 그것이 얼마나 큰 폭력으로 작용할 수 있는지 다룬다. 내가 이 소설을 처음 읽은 것은 본작을 해외에 소개한 매니지먼트사 대표와의 술자리 때문이었는데, 그날 그는 나와 매우 친밀하게 막걸리를 연거푸 마시면서도 유독 내 소설에 대해서는 “아, 최 선생님. 좋아요”라는 사교적 수준의 예의만 지켰지만, 한강 선배의 『채식주의자』를 언급할 땐 “아. 최고예요! 최고! 최고! 최고!(x20)”라며 극찬을 연발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깊은 매력이 있어요. 설명할 수 없는 끌림이 있다니까요.”
하여, 다음날 술이 깨자마자 서점에 달려가 책을 사보았다. 분명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나 역시 ‘뭔가 알 수 없는 마력’에 이끌려 한동안 이 소설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당시에는 ‘묘사가 상당하고, 서술이 감각적이다’고 여겼는데, 이번에 다시 보니 묘사가 놀랍도록 간결하고, 서술이 담백했다. 그러니까, 이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문장이 묘사적이다’고 착각을 했던 것이다. 사실은 이 간결한 문장들이 하나 둘씩 쌓여 ‘묘사적이고, 감각적인 분위기를 형성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심플한 문장들 사이에 간혹 쉼표를 활용해 작가의 고민을 압축한 흔적도 보였는데, 예컨대 이런 것이다.
“순간, 한번도 들어가본 적 없는 그녀의 머릿속이, 그 내부가, 까마득히 깊은 함정처럼 느껴졌다(33쪽).”
예전에 줄을 친 흔적이 있으므로, 이미 나는 이 기법을 무의식적으로 훔쳤는지도 모른다. 나 역시 강조하고 싶은 문장에는 쉼표를 굉장히 많이 사용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이어 내 책이 안 팔리며 쉼표를 자제해왔는데, 『채식주의자』가 맨부커상 후보에 올랐다는 반가운 소식에 힘입어 이번에는 의식적으로 이 기법을 종종 훔치기로 했다.
그나저나 재작년, 베를린에 있을 때 한강 선배를 만났던 기억이 난다. 당시 우리는 같은 단체의 지원으로 독일 베를린과 폴란드 바르샤바에 각각 체류중이었는데, 재독 한국문화원이 베를린에 있는 나를 두고 굳이 폴란드의 바르샤바에 있는 한강 선배를 초대해 낭독회를 펼치기에 ‘아하! 이런’ 하며 내가 직접 참석했다. 무뚝뚝한 독일 청중들과 진중한 한강 선배가 만나니, 그 자리는 그야말로 고요하고, 잠잠하고, 묵묵한 공기가 가득했기에, 나는 낭독회가 끝나자마자 다소 급작스레 등장해 선배를 놀래기로 작정했다. ‘하하하하!’ 하며 과장된 웃음으로 등장하니 선배는 (아마, 속으로는 놀랐을지 모른다) 차분하고 고요한 표정으로 “아니, 민석 씨가 여기 어쩐 일로…”라며 마치 왜 왔느냐는 듯한 투로 인사했다. 그러면서 내게 안부를 건넸는데, 이에 내가 “아! 여긴 너무 추워요!”라고 너스레를 떨자, 선배는 예의 그 고요하고, 차분한 표정으로 “도시가 추운 게 아니라, 사람 마음이 추운 거죠”라며 소설문장처럼 간결하고, 명징하게 답했다. 그때에도 여전히 표정은 그윽하고, 평화롭고, ‘이유를 알 수 없는 깊은 안정감’이 있었다. 종종 어떤 작가는 자기 작품을 닮는데, 선배가 그렇다.
방금 쉼표를 훔쳐봤는데, 잘 안 됐다.
요즘은 절도도 잘 안 된다.
3.18.
소설 취재차 『비어 헌터 이기중의 유럽 맥주 견문록』을 읽었다.
책을 읽으면서 몇 번이나 당장 글을 쓰고 싶은 욕구를 꾹꾹 참으며 읽었다. 물론, 이 책을 읽는 동안 독서에 들인 열배 이상의 시간을 들여 맥주를 마셔야 했다. 맥주에 대한 설명과 사진과, 저자의 경험을 접하니, 맥주를 마시지 않고서는 견뎌낼 재주가 없었다.
사실, 내가 하는 거의 모든 집필활동은 맥주를 마시기 위해 돈을 버는 행위이자, 그간 해온 모든 여행은 맥주를 마시기 위해 떠난 여행이었다. 그만큼, 나는 맛있는 맥주만 있으면 행복한 사람이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 이기중 교수(전남대 인류학과)의 글을 접하고 나니, 애송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기중 교수는 맥주에 관한한 혀를 내두를 정도로 열정적이다. 그 열정을 엿볼 수 있는 페이지를 잠시 소개.
“넷째 날은 영국의 병맥주를 시음하기로 하였다. 먼저 숙소에서 나와 런던에서 규모가 제법 큰 세인즈베리(Sainsbury) 슈퍼마켓으로 갔다. 깔끔하게 정돈된 매장의 한쪽에는 다양한 영국 맥주들이 진열되어 있다. 종류를 세어보니 모두 17가지, 오늘 모두 시음할 작정이다. 맥주 17가지와 점심 겸 안주 겸으로 치킨 윙과 삶은 새우를 사가지고 나왔다. 맥주 가격은 27파운드(1파운드는 약 2,000원), 안주 가격은 3.6파운드가 나왔다. 17병의 맥주를 들어보니 상당히 무거웠다(55쪽).”
그는 호텔방에 돌아와 ‘두 시간’에 걸쳐 맥주병을 사진으로 찍고, 맥주를 한 병씩 마시며(물론, 모두 다 마시진 않는다) 취기에도 불구하고 맛 평가를 수첩에 적는다. “이렇게 맥주를 시음하는데도 두 시간이 걸렸다” 고한다. 이게 끝이 아니다. 그는 맥주 17병의 라벨을 하나씩 뜯어낸다. 호텔 세면대에 김이 오르도록 뜨거운 물을 받고, 그 안에 맥주 17병을 하나씩 담근다. 조심스레 라벨을 하나씩 떼어낸 후, 호텔 방에 펼쳐놓고 자연풍으로 마르기를 기다린다. 헤어드라이어로 말릴 수도 있지만, 그건 어쩐지 애주가의 자세가 아니라는 듯 정성스레 기다린다. “라벨을 떼고 말리는 데 또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고 한다. 17병의 맥주 맛을 따로 기록할 만큼 뒤처리도 학자답게 깔끔하다. 호텔 방안에 빈병 17개를 잔뜩 놓아두면 청소부들이 자신을 알코올 중독자로 여겨 걱정할까봐, 쇼핑백에 담아 직접 거리로 나선다(열정적이다!). 게다가, ‘라벨까지 벗겨진 맥주병’만 보면 이상하게 생각할까봐(확실히 라벨이 없으면, 신종 약물을 직접 제조해 마시는 중독자의 인상을 주긴 한다), 봉투에 담고 나왔는데 범죄의 도시 런던에서 굳이 투숙객이 호텔 밖에 나와 쓰레기통에 뭔가 버리면 경찰의 의심을 살 수 있겠다 싶어, 이번에는 술꾼답게 과감하게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버려버린다(대담하기까지!). “빈병까지 모두 처리하고 나니 그제야 병맥주 시음을 끝낸 기분이 든다” 하니 그가 얼마나 꼼꼼한 학자인지 가늠이 된다.
가장 감동적인 대목은 바로 이다음 문장이었다.
“저녁은 런던에 있는 선배와 만나 맥주를 한 잔 하기로 했다. 전철로 한 시간 거리인 런던 외곽의 펍이었다. 한 나절동안 17병의 병맥주를 시음하고 난 터라 편하게 에일 생맥주를 한 잔 하고 싶었다.”
나는 이 책을 덮고, 찰나나마 소회에 잠겼다.
‘아, 모두 열심히 사는 구나! 맥주를 이토록 열심히 마시다니!’
내가 이처럼 성실히 살았던 적이 과연 언제였는가.
비어헌터 이기중 교수는 내 마음도 저격했다. 하트헌터다.
3. 19.
네이버에 연재를 하는 웹툰 작가들을 만나 맥주를 마셨다. 오랜만에 ‘절도일기’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훔칠 것을 하나 발견했다. 그건 웹툰 작가들은 겸허한 자세로 어떤 소재의 이야기를 다룰 때, 자문을 구한다는 것이다. 이날도 <악의는 없다>를 그린 ‘환쟁이’ 작가는 의학자문을 해준 친구라며 젊은 의사를 한 명 소개해줬다. 하여, 나는 과감하게 이 친구를 훔치기로 했다. 이제 나는 문장과 기술뿐 아니라, 사람도 훔친다. 이 젊은 의사가 언제 쓸지 모를 내 의학 소설에 자문을 해주기로 했다.
그나저나, 2차로 간 카페에서 ‘인디카’라는 IPA 맥주를 처음 마셔봤다. 졸린 눈이 번쩍 뜨일 만큼 내 취향에 맞는 맥주였다. 하여 나는 비어헌터 이기중 교수처럼 “당장 뜨거운 물을 주시오!”라고 외친 뒤, 맥주병을 온수에 담근 후 라벨을 뗄까 하다가 잠자코 ‘인디카’라는 이름을 기억해두었다.
일기가 이상해지고 있다. 독서일기가 아니라, 음주일기가 되고 있다.
이 역시 『비어헌터 이기중의 유럽맥주 견문록』에 깊은 영감을 받은 탓이다. 하트헌터, 이기중 교수. 사랑해요.
3. 25.
며칠간 마감이 다가온 연재소설을 닥치는 대로 썼다.
오늘에야말로 마감을 하고 곧장, 동네 병맥줏집에 달려가 인디카 IPA를 두 병 사와 마셨다.
마시며 생각해보니 독서일기가 아니라, 애초부터 음주 일기를 연재하는 게 더 나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인디카만 두병 사려 했는데, 가게 주인이 “호호! 단골이시잖아요”라며 새로 출시된 독일 에일 ‘Crew Republic’을 1+1 가격으로 주었다. 전용잔도 한 잔 주었다.
행복하다. 일기가 매우 이상해졌다.
알라딘에 주문한 장자크 루소의 『사회 계약론』이 왔다, 고 쓴 직후, 이 연재가 ‘예스24’에 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술을 줄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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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시티투어버스를 탈취하라’로 제10회 창비신인소설상(2010년)을 받으며 등단했다. 장편소설 <능력자> 제36회 오늘의 작가상(2012년)을 수상했고, 에세이집 <청춘, 방황, 좌절, 그리고 눈물의 대서사시>를 썼다. 60ㆍ70년대 지방캠퍼스 록밴드 ‘시와 바람’에서 보컬로도 활동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