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동주, 그토록 시인이 되고 싶었던 청년에게
『시인 동주』 저자 안소영 작가와의 만남
생각을 거듭하며 내면 깊숙한 곳에 닿았을 때, 그것을 길어 올려서 표현하는 것이 윤동주의 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우리가 그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의 시가 굉장히 보편적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난 3월 18일, 『시인 동주』를 쓴 안소영 작가와 함께 시인 윤동주를 기억하는 독자들이 모여 그를 추억하는 뜻깊은 자리가 마련됐다. 윤동주는 국어 교과서에 가장 많은 작품이 등장하는 시인이자,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이다. 최근 윤동주의 삶을 그린 영화 <동주>의 인기와 함께 그의 시집과 평전을 찾는 독자들 또한 점점 늘고 있다.
안소영 작가의 책 『시인 동주』는 작년, 윤동주 시인이 세상을 떠난 지 70년이 되는 해 출간됐다. 저자 안소영은 『책만 보는 바보』, 『다산의 아버님께』, 『갑신년의 세 친구』 등 지금까지 펴낸 책들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주로 역사 속 실존했던 사람들을 그리는 데 관심이 많다. 『시인 동주』를 출간하기 전에 냈던 책은 19세기 개화기 청년들에 관한 내용이었다. 안소영 작가는 “그다음으로는 자연스럽게 20세기로 넘어가게 됐다. 처음에는 식민지 시대에 관한 이야기가 부담스러웠지만 지금까지 책에서 주로 젊은 청년들의 이야기를 해왔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식민지 시대에는 청년들이 어떻게 살았을지 궁금했다”고 말했다. 그러던 중 그에게 다가온 사람이 바로 시인 윤동주였다. 윤동주에 대해 쓰겠다고 마음은 먹었지만, 막상 쓰려고 하니까 정작 윤동주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안소영 작가는 말했다.
“윤동주를 떠올리면 맑고 고운 이미지, 착하고 선한 이미지가 생각나는데 과연 내가 뭘 알고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전까지 시인 윤동주를 생각하면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의문이 있었어요. 윤동주가 어떻게 보면 맑고 고운 서정시를 썼는데 그 평가와 함께 저항시인이라는 평가도 있습니다. 어떻게 한 사람의 일생에서 이런 두 가지 평가가 공존하는가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이 사람이 엄혹한 일제 식민지 시절에 어쩌면 그렇게 맑고 고운 시를 쓸 수 있었던 것인가 의문이 생겼습니다. 시대를 외면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는 중학교 때 처음 윤동주의 시를 접했는데,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알고 있는 것은 없었습니다.”
우리가 몰랐던 윤동주에 대하여
윤동주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가? 대다수 사람들이 갖고 있는 윤동주에 대한 이미지는 아마 흑백사진 속 그의 얼굴처럼 굉장히 선하고 순수한 느낌일 것이다. 안소영 작가는 이처럼 윤동주에 대한 이미지가 각인된 이유에 관해 자기 나름대로 생각을 전했다.
“그가 많은 시를 남긴 것도 아니고, 29세라는 너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고, 고향이 북간도 용정이기 때문에 그에 대해 기억을 나눠줄 사람도 부족했기 때문인 것 같아요. 그리고 우리는 윤동주에 대한 주변 인물들의 회고에 의존해 그를 기억하고 있잖아요. 그 회고의 주체가 연희전문학교의 벗들이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 인생에서 가장 빛나던 시절, 애틋하고 순수한 모습을 자신의 친구 윤동주에게서도 보고 싶어 했던 것 같아요. 윤동주는 70년대에 이르러서야 회고됐는데 그때는 그의 벗들이 오십 대 말에서 육십 대에 이르는 나이었으니까요. 윤동주는 그 시절 최고의 지성이었기 때문에 비판적 사조와 학문을 열심히 공부했어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윤동주가 무슨 책을 읽었는지 그 당시 젊은이들이 무슨 책을 읽었는지에 대해서도 전부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윤동주의 인생에서 이야기할 수 없는 부분들을 빼고 나니까 맑고 고운 이미지만 남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처럼 우리가 윤동주에 대해 기억하는 것은 일부뿐이다. 한 사람의 청년에게서 친구, 선배, 고향을 다 덜어내고 나니 이렇게 온전하지 않은, 앙상한 모습만 남게 됐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우리의 기억 속 윤동주는 온전히 그 시대를 살았던 인물로서가 아니라, 무언가 알 수 없는 일그러진 이미지로 오래도록 남아있었던 것이다. 안소영 작가는 영화 <동주>를 통해 부끄러워하고 괴로워하고 고뇌하는 윤동주에 대한 새로운 이미지가 많이 다가오게 된 것 같아서 긍정적으로 생각한다고 이야기했다.
“우리가 말할 수 없었던 것들을 복원해 나가며 온전한 윤동주의 모습을 찾을 때 그 사람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자료를 찾으며 저도 그때까지 몰랐던 근대사를 새롭게 배워가는 과정이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우리나라 역사를 곧이곧대로 알고 있지 않은 편이었는데도 몰랐던 부분이 많았고, 그 정도였나 싶을 정도로 부끄러운 일들이 많았습니다. 근대사, 현대사는 가장 가까운 역사잖아요. 현재 우리의 삶과 아주 밀접한 근현대사를 제대로 배우는 것이 지금 우리가 왜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가를 해명하는 길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평소 책을 쓸 때 자료조사를 하는 데 시간이 더 걸리는 편이라는 안소영 작가는, 『시인 동주』를 쓰면서는 자료조사만 2년 정도 했다고 말했다. 그 후 원고집필은 1년 반 정도가 걸렸다. 초반에 자료를 다 찾고 어느 정도 얼개를 잡았을 때의 가제는 ‘동주와 몽규’였다.
“영화를 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송몽규가 영화에서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죠. 영화를 보고 반가운 생각이 들었는데요. 윤동주 관련자료를 찾다 보면 송몽규가 나오는데 굉장히 놀랍고 충격적이에요. 몰랐으니까요. 윤동주만 감옥에서 세상을 떠난 게 아니라, 같은 집에서 나고 자란 송몽규라는 존재가 있었고 더구나 같은 형무소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그런 사람을 왜 몰랐을까 했죠. 그래서 처음에는 두 사람을 같은 비중으로 쓰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동주와 몽규’라는 가제까지 잡았지만 결과적으로 이 책은 그러한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첫 번째 이유는 몽규에 대한 자료가 너무 없었기 때문이었다. 두 번째 이유는 몽규라는 사람을 힘차게 끌고 가면서 표현하기에는 스스로 부족하다고 느껴서였다.
“잘못된 것을 앞서서 이야기하고, 비판적이고 날카로웠던 사람의 내면 깊숙이 들어가서 이를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에 대해 제가 자신이 없었어요. 물론 이런 이유도 있었지만 사실 알면 알수록 동주라는 청년이 너무 괜찮았어요. 여리고 나약하고 유순한 이미지만 있는 게 아니라, 동주는 나름대로 우리말을 끝까지 쓰면서 내면까지 깊이 들어가 조선 청년의 저항을 표현한 것 같아요. 그전까지 앙상한 이미지로 동주를 대했을 때는 몰랐던 점이죠. 영화 제목은 <동주>죠. 간결합니다. 저는 제목을 정할 때 ‘시인’이라는 말을 붙여주고 싶었어요. 살아생전 그토록 시인이 되고 싶었지만 시인으로 불리지 못했던 청년에게 책에서는 시인 동주라고 붙여주고 싶었습니다.”
아름다움 너머, 또 다른 빛깔의 강인함
안소영 작가는 자료를 찾으면서 의문을 가진 부분이 있었다고 말했다. 윤동주는 습작노트를 만들어서 시를 쓰고 반드시 밑에 날짜를 기록하며 하루도 빠짐없이 꾸준히 시를 써왔는데 1939년 9월부터는 시가 나온 흔적이 없었다. 그러다가 1941년 5월에 「십자가」 같은 시가 나오고, 5월 한 달에만 서너 편을 쓰기도 했던 것이다. 윤동주가 살았던 1940년대, 즉 일본이 만주전쟁과 중일전쟁을 겪고 난 후에는 민족말살정책이 극에 달했다. 윤동주가 존경하던 선배 문인들, 지식인들이 적극적으로 일본에 협조하며 나섰던 때가 바로 이 시기였다.
“중학교 시절부터 어느 하루도 시를 쓰지 않은 적이 없었던 윤동주가 1년 이상 시를 쓰지 않았다는 것은 굉장한 일입니다. 그런데 41년 5월 이후에 쓴 시들은 그 전의 작품들과 조금 다릅니다. 내면에 어떤 변화가 생긴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이 기간 동안 도대체 무슨 일이 있던 것일까요? 윤동주는 절대 그 당시 사회적 문제와 무관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조선에 대해 굉장히 민감했던 사람이었죠. 당시 그가 존경했던 조선의 문인들이 조선문인협회를 만들고 ‘내선일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면서 성명을 발표했는데, 그것을 보며 윤동주가 느꼈을 분노와 허망함은 매우 컸을 것입니다. 과연 내가 조선에서 글을 계속 쓰고 문학을 계속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을 거예요. 그렇게 깊은 회의와 절망 속에서, 중학생부터 어느 하루도 시에 대해 생각을 하지 않은 적이 없던 윤동주가 펜을 놓은 것이죠. 대신 윤동주는 그 시기에 매우 많은 책을 읽었어요. 그래도 시를 안 쓰고는 살 수 없었죠. 그래서 1941년도부터 그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나는 나의 글을 쓰겠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그의 시를 볼 때 시어가 쉽다고 해서 단순히 순탄하게 볼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굉장한 고뇌가 있었고 그것을 딛고 나온 시라는 것을 생각해주시기 바랍니다.”
윤동주는 산책할 때마다 릴케와 발레리의 시집을 항상 들고 다녔다고 한다. 릴케는 현상으로부터 들어가서 본질까지 나아가는 시를 썼는데, 윤동주가 릴케를 좋아했다는 것은 분명 둘이 상통하는 맥락이 있다는 것이라고 안소영 작가는 말했다.
“윤동주는 쉬운 시어를 썼지만 읽는 사람에게는 그 시가 가슴 깊이 들어오잖아요. 보면 어려운 말은 하나도 없지만, 그런 말을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윤동주의 시도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게 하는 힘이 있는 것이죠. 생각을 거듭하며 내면 깊숙한 곳에 닿았을 때, 그것을 길어 올려서 표현하는 것이 윤동주의 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우리가 그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의 시가 굉장히 보편적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윤동주는 그렇게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우리말로 시를 썼다. 시인이 되고 싶었지만 당시 세상에 자신의 시를 드러내고 독자의 공감을 받는 길은 전부 막혀 있었다. 함께 공부하던 친구들마저 다 포기한 시기에도 윤동주는 계속해서 우리말로 시를 썼다. 마음속에 떠오르는 깊고 본질적인 것을 표현하는 행위 자체가 좋았기 때문이었다. 안소영 작가는 “결과와 상관없이 이러한 일을 계속했다는 자체가 이 청년이 대단한 내면을 지닌 사람이란 것을 말해준다. 이는 송몽규와는 또 다른 빛깔의 강인함이다”라고 전했다.
내년이면 윤동주가 태어난 지 100년이 되는 해이다. 안소영 작가는 마지막으로, 윤동주와 송몽규 외에도 그 시기를 살았던 알려지지 않은 청년들이 많다며 앞으로 그들의 삶도 많은 이들에게 알려지게 되기를 바란다고 이야기했다.
“제 책이 장편소설로 돼 있죠. 글을 쓰면서 소설이라고 생각하고 쓴 것은 아닌데, 출간 후 분류를 위해 편의상 장편소설로 구분된 것 같습니다. 저는 가능하면 그 인물에 이입하고 밀착해서 사실적으로 드러내고 싶었습니다. 실제 존재했던 사람에 대해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인간이란 게 뭔지, 현재 우리의 모습에 대해서도 이해를 하고 생각이 깊어지는 것 같습니다. 제 책은 흔히 말하는 소설과는 다릅니다. 그냥 ‘윤동주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독자들이 안소영 작가에게 묻다
Q. 책 속에서 식민지 시대를 살았던 청년들의 고뇌를 보여주셨는데,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에게는 어떤 마음을 가지고 계시는지 궁금합니다.
그저 답답하고 미안하고 안타깝습니다. 점점 세상이 나아져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것 같아요. 지금 청년들은 노력하는 것에 비해 기회가 충분히 보장되지 않는 것에 대해 굉장히 안타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백 년, 이백 년 전 이야기를 책으로 쓸 때는 시간적 거리감이 있어서 그런지, 옛날 사람들도 우리와 비슷하구나 하며 배우는 점이 많았는데 이 책을 쓸 때는 예전부터 지금까지 갑갑한 구조가 이어져 내려오면서 되풀이되는 연장선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참 달라지지 않는 것 같아요. 1940년도에 대거 지식인들이 일본을 적극적으로 협력하고 지지했다고 말했는데 사실 그때가 불과 몇 십 년 전입니다. 자료도 많습니다. 그때 신문을 보면 멀미가 날 것 같습니다. 아프더라도 그러한 사실들을 마주하면서 어떠한 상황에서 인간의 지적인 논리가 어떻게 전개되어갈 수 있는가를 살펴본다면 다시 또 비슷한 시기가 왔을 때 부끄러운 일이 되풀이되지 않을 것 같은데, 여전히 그 시기를 암흑기로 간주해 다 덮어놓는다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Q. 글을 쓸 때 등장인물들이 통제를 벗어나 자기 소리를 내려고 할 때가 있을 텐데, 선생님의 경우 동주가 자기 목소리를 내려 할 때 어떻게 제어하시는지 궁금합니다. 또 하나는, 글을 쓰실 때 찬란한 빛보다는 주로 쓸쓸한 그림자와 같은 인물들을 다루시는데 여기에 어떤 계기가 있나요? 마지막으로 차기작은 무엇인가요?
그 사람들이 살았던 실제 자료들을 많이 찾으면서 그 사람에 대해 계속 상상합니다. 그 과정을 거치다 보니까 쓰면서 인물이 정말 스스로 나갈 때가 있어요. 그런데 사실관계를 찾는 과정에서 그게 나오다 보니까 크게 절제하거나 제어하지 않아도 인물이 자기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것 같아요. 다음으로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을 하겠습니다. 억울하게 쓰러져간 사람들 중 알려진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죠.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이 매우 많은데 그런 것에서 느껴지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드러나는 대로 겉만 보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이면을 보면서 그 사람을 이해하려 하는 것 같아요. 세 번째는 차기작에 대한 질문이었는데요. 사실 첫 책을 쓸 때부터 작정하고 쓴 것이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 계속 시대를 이어 내려오게 됐습니다. 다음은 해방공간이 될 텐데요. 아직 충분히 표현할 수 있는 자유도 없어서 고민하고 있습니다. 저의 가장 주된 관심은 사람에 대한 것입니다. 실제로 흔적을 남기며 살았던 사람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실패든 성공이든 그 과정을 통해 인간에 대해 많이 배웁니다. 아마 당분간은 실제로 살았던 사람에 대해 더 관심을 두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Q. 책에서 가장 애착 가는 부분이 어디인지, 그리고 윤동주의 시 중 가장 사랑하는 시는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사람의 감정 중에 안타까움이 가장 강한 것 같습니다. 특히 마지막 장면, 감옥에서 세상을 떠나는 장면이 기억에 남아요. 형사가 윤동주에게 시를 일본어로 번역하라고 했는데 자신이 애착을 갖고 우리말로 공들여 쓴 시를 번역하는 윤동주의 심정이 안타까웠습니다. 가장 애착이 가는 시는, 「팔복」에서 똑같은 말을 여덟 번 계속 반복할 수밖에 없는 동주의 심정이 느껴졌어요. 그리고 윤동주가 일본에서 쓴 시 중에서 「흰 그림자」라는 시가 있습니다. ‘신념이 깊은 의젓한 양처럼 하루 종일 시름없이 풀포기나 뜯자’라는 문장이 있는데, 강하고 큰 목소리는 아니지만 의연히 그 상황을 견뎌내겠다는 목소리가 담겨있는 것 같아서 그 시를 좋아합니다.
시인 동주안소영 저 | 창비
아무도 시를 쓰려 하지 않던 시대에, 묵묵히 위대한 문학을 이루어 낸 시인 윤동주의 이야기.「별 헤는 밤」, 「자화상」, 「서시」 등 국어 교과서에 가장 많은 작품이 등장하는 시인이자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 윤동주의 삶을 소설의 형식으로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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