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쾌한 인문 발칙한 인문] 우물에서 하늘을 보았다
황현산의 『우물에서 하늘보기』를 읽고
나는 이제야 고백할 수 있을 것 같다.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과 함께 세상을 죽음에서 삶으로 되돌려 놓기 위해 애썼던 몸부림이 바로 문학이었음을. 앞으로도 그 문학이 나를 살게 할 것임을. 나는 우물에서 하늘을 보았다.
“예술가의 일은 농부들의 세계에 선원들의 세계를 끌어들이는 것과 같다. 사람들은 이미 준비된 디자인을 유일한 것으로 여기고 거기 묻혀 살지만, 예술가는 그 디자인 속에서 행복하지 않다. 그가 보기에 이 디자인은 세상의 참 모습이 아니다. 세상의 눈가리개에 불과한 이 디자인은 필요 없이 거추장스럽고 또한 미래의 씩씩한 삶을 끌어안기에는 너무나 허술하다.”
“그래서 그는 또 하나의 인간 디자인을 이 세계에 들고 들어오려는 사람이다. 그의 디자인은 낯설다. 다른 사람들에게 낯설 뿐만 아니라 그 자신에게조차 낯설기에, 그 낯선 세계의 최초 희생자는 그 자신이기도 하다. 낯익은 세계에 낯선 세계를 연결해야 하는 고역 또한 그의 희생이다.”
(『우물에서 하늘보기』에서 인용)
스물 넷 봄, 친구 둘과 함께 인천의 만석동으로 들어갔다. 빈민운동을 할 지역으로 만석동을 선택한 이유가 일본식 창고건물의 붉은 벽돌과 미로 같은 골목, 갯벌을 따라 놓인 낡은 철길과 오랜 세월 하나씩 쌓아 올린 판잣집의 조형미에 반해서라는 말은 오랫동안 하지 못했다. 그해 가을에 친구 하나가 만석동을 떠났고, 겨울이 되자 남은 한 명마저 다른 길을 선택했다.
혼란스러워진 나는 무작정 여수행 열차를 탔다. 손에 든 것은 인동출판사에서 갓 나온 김남주의 시집 ‘나의 칼 나의 피’뿐이었다. 이틀 만에 만석동으로 돌아 온 뒤 나는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 그때까지 시는 나를 움직이는 힘이었다. 어렸을 때는 동화나 소설보다 시가 더 가까이 있었다. 내가 부르던 노래는 대부분 윤극영이나 이원수의 동시였고, 어머니아버지가 불러주던 노래도 시였다.
초등학생 때는 여름 방학마다 도시에 있던 할머니 댁에 가서 지냈다. 심심하고 외로웠다. 그래서 벽에다 시를 끼적거렸다. 청소년 시절 도시로 전학을 와서도 수업은 듣지 않고 교과서 여백에다 시를 끼적거렸다. 대체로 그리움이나 외로움에 관한 웅얼거림이었을 것이다. 나중에는 시를 쓰던 교과서 여백마다 평면도를 그렸다. 시는 가슴 깊이 밀어 넣고, 나 하나를 온전히 숨길, 안전하고 평화로운 나만의 공간을 상상하고 또 상상했다. 그러나 시를 잃었던 그 시간은 불행했다.
스무 살 무렵 다시 만난 시는 사방이 막힌 감옥 같은 세상의 유일한 숨구멍이었다. 시는 담장 너머를 볼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기도 했다. 그러나 만석동에 들어 온 뒤 다시 나는 시와 멀어졌다. 아니 문학과 멀어졌다. 저절로 멀어진 것이 아니라 일부러 멀어졌다. 가난한 삶에서 문학은 사치라고 여겼다. 사실 오랫동안 문학은 내 삶의 일부였다. 문학은 어린 시절 기지촌에서 맞닥뜨린 부조리와 모순들을 이해하게 했고, 더 나은 세상을 꿈꾸게 했다.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그림을 포기한 뒤 내게 남은 위로는 문학뿐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마주한 자본의 실체와 허깨비 같은 민주주의는 나를 절망케 했지만 문학 덕분에 그 너머를 꿈꿨다. 나는 문학을 통해 세상을 만났고 세상 속으로 들어갔다. 나보다 더 가난한 이들의 삶 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것도 타인의 고통을 상상하고, 그 고통을 내 것으로 느낄 수 있는 감수성이 문학으로부터 키워졌기 때문이라고 나는 믿는다.
빈민지역에서 산 첫 10년 간, 시와 소설과는 멀어졌으나 만석동 사람들은 나를 문학으로 더 가까이 이끌었다. 한글이 서툰 공부방 어머니들과 함께 2년 간 모둠일기를 쓰면서 나는 말에 담긴 삶의 깊이와 그 말에 스민 슬프고도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만났다.
“문학이 저 하찮은 것들의 말이 아니라면 어디서 숭고한 말을 찾을 것인가.”
IMF로 무너진 것은 한국 경제와 중산층만이 아니었다. 원래 가난했던 노동자들과 빈민들의 삶은 뿌리 채 뽑혀 내던져졌다. 1999년 봄, 쓰러지고 뿌리 뽑힌 가난한 이들 틈에서 같이 신음하다 생각했다. ‘글을 써야겠다. 가난한 이들의 목소리를 내야겠다.’ 그 것이 문학이라고 생각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용감하고 더 무모했을 그 시작이 나를 다시 살게 했다. 그 것은 어쩌면 내 안에 숨어있던 “흔히 미학적 재능이라고 부르는 이 능력은 둔중한 것에서 날카로운 것을 발견하고 단단한 것에서 무른 것을 발견하며 더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의 질서를 바꾸는 힘”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괭이부리말 아이들』이 세상에 나온 뒤에도 나는 감히 문학을 말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나는 아주 조심스럽게, 아주 수줍게 문학을 말하고 싶어졌다. 그 용기를 황현산 선생의 『우물에서 하늘보기』에서 얻었다.
나는 부끄럽게도 황현산 선생의 이름을 <한겨레> 칼럼에서 처음 만났다. 날짜를 챙기며 읽은 것은 아니었으나 글을 읽을 때마다 이름자가 저절로 마음에 새겨졌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 SNS에 공유되던 한국일보의 칼럼을 읽으며 가슴이 울렁였다. 그 기억 때문에 『우물에서 하늘 보기』가 출간되자마자 책을 샀다. 그러나 정작 그 책을 펼친 것은 만석동 골목에서 만나 18년 동안 함께 했던 아이를, 한 여자의 남편이고 한 아이의 아버지였던 그 아이를 바다에서 잃은 1월이었다. 선생의 글은 내게 ‘너에게 문학은, 시는, 삶은, 희망은 무엇이냐?’고 끊임없이 물었다. 몇 번 눈물을 삼켰다. 그러다 끝내 ‘최승자 어깨’란 글에서 울음이 터졌다.
“이 욕망의 거리에서, 아무것도 쌓아둔 것이 없고 아무것도 기대하는 것이 없는 사람만이 마침내 그 슬픈 어깨를 얻는다고 해야 할까. 끌어안기조차 어려운 이 어깨, 그러나 어쩌면 우리가 마지막 기대야 할 어깨가 바로 그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그 아이의 장례식에 모인 이들의 어깨에서 시인의 어깨를 보았다. 그리고 살아남은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했다.
“어두운 날을 넘어가서, 슬픔의 힘이 바다처럼 펼쳐질 수 있다고 믿는 것이 공덕이다. 시의 아름다움이 헛되지 않다고 믿는 것이 공덕이다. 앉지도 서지도 못하는 처지에서의 행복이 바르게 앉고 꼿꼿이 설 수 있는 날의 행복으로 길어지고 넓어지기를 바라는 것이 공덕이다. (중략) 넘어설 수 없는 것을 넘어서려는 자들에게 복이 있다.”
나는 이제야 고백할 수 있을 것 같다.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과 함께 세상을 죽음에서 삶으로 되돌려 놓기 위해 애썼던 몸부림이 바로 문학이었음을. 앞으로도 그 문학이 나를 살게 할 것임을. 나는 우물에서 하늘을 보았다.
우물에서 하늘보기황현산 저 | 삼인
이 시대의 낭만가객, 평론가 황현산이 겨울을 여는 시화詩話집을 선보였다. 가히 ‘시 마을에서 세상 보기’라 할 만하다. 우물에서 올려다보는 하늘이 필경 좁고 편협하다면 그가 시를 통해 바라보는 세상은 넓고 여유로우며 다양하되 처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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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인천에서 태어나 방송대학교 교육학과를 졸업했습니다. 1987년부터 인천 만석동에서 '기차길옆작은학교'라는 공부방을 꾸려왔으며, 지금은 강화로 터전을 옮겨 농사를 짓고 인천과 강화를 오가며 공부방 활동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1999년, 창작과비평사에서 공모한 '좋은 어린이 책' 공모 창작 부문에서 『괭이부리말 아이들』로 대상을 받았습니다. 지은 책으로는 『괭이부리말 아이들』,『종이밥』, 『우리 동네에는 아파트가 없다』, 『거대한 뿌리』, 『꽃섬고개 친구들』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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