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김중혁의 대화 완전정복
세상에, 과정 아닌 삶이 있을까
열두 번째 문제. 세상은 커다란 학교 어린 시절의 학교를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책, 존 버닝햄의 『지각대장 존』
학교에서는 대화가 이뤄져야 한다. 지금의 학교 시설은 예전보다 훨씬 좋아졌을 것이고 훌륭한 선생님들도 훨씬 많아졌겠지만, 선생님들에게 『지각대장 존』을 권하고 싶다. 초중고등학교의 선생님뿐 아니라 누군가에게 뭔가 가르치고 있는 모든 선생님들에게 권하고 싶다.
tvN <배우학교>의 한 장면
열두 번째 문제. 세상은 커다란 학교
<문제>
tvN <배우학교>는 ‘단기 속성 액팅 클라쓰’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세웠다.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지만 연기를 새롭게 배워보려는 일곱 명의 학생에게 배우 박신양이 연기를 가르치는 프로그램이다. 얼마 전에는 박신양과 (배우로 활동하고 있지만 현재는 학생인) 심희섭 사이에 이런 대화가 오갔다. 다음 빈칸에 잘 어울리는 말은?
박신양 : (심희섭의 발표가 끝나자) 연기와 발표가 친절해야 해. 좀 더 잘 표현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 거지?
심희섭 : 전달해야 됩니다.
박신양 : 그래서 우리가 아침마다 발성 연습을 하고, 쉽게 낼 수 있는 소리를 더 잘하려고 노력하는 거지. 그래야지 전달되는 거야. 우릴 위해서 좀 더 친절하게 설명해줄 수 없니?
(다른 학생이 심희섭에게 지금 하고 있는 연기 수업이 재미있냐고 묻자)
심희섭 : 마냥 재미있지만은 않습니다.
박신양 : 재미가 없으면 없다고 해야 돼.
심희섭 : 재미의 의미를 어떻게 두느냐에 따라 다른 거 같은데…, 제 생각에는….
박신양 : 희섭이는 재미 몰라? 우리가 이런 대화를 왜 하는 거 같니? 무엇을 알고 있고 무엇을 느끼고, 어디로 가고 싶은지에 대한 점검을 하는 거지. 희섭이가 연기를 통해서 표현하고 싶은 무언가가 있을 거야. 난 그게 뭔지 알고 싶어.
심희섭 : 제 생각. 제 느낌.
박신양 : 그게 뭐냐고.
심희섭 : 현재까지의 내 모습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 같습니다.
박신양 : 무슨 이야기?
심희섭 :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
박신양 : 그게 뭔데?
심희섭 : ‘나는 이렇게 생각해요’, ‘내가 보고 듣고 느낀 건 이겁니다.’
박신양 : 보고 듣고 느끼는 게 주로 어떤 건데?
심희섭 : 주로….
박신양 : 희섭아, 너의 말이 아니라 너의 생각대로 이뤄지는 거야. 너의 어떤 생각을 선호하니?
심희섭 : 생각이 너무 많아져서, 방해가 될 정도로 느끼는 게 많아서, 어느 하나를 붙잡고 몰두할 수가 없었습니다.
박신양 : 자기 생각과 느낌에 대해서 말할 때 과감해보자. 우리 처음에 약속하고 시작했잖아. 여긴 학교야. 학교는 ( ) 곳이야. 스스로 자기 모습을 들여다본다는 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일이야. 그런데, 추하건 나약하건 공허하건 그게 어떻게 생겼건 그걸 있는 그대로 봐야 해. 자기 자신을 똑바로 보고 인정하자. 이 대화의 목표는 그거 아니었나? 깨끗하게 지우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거야.
1) 열심히 뛰어노는
2) 어딘가로 향하는 통로 같은
3) 자신을 비춰볼 수 있는 거울 같은
4) 실수를 해도 괜찮은
5) 예술 작품을 만들어내는
<해설>
학교를 졸업한 지가 오래되기도 했지만, 중고등학교 시절에 기억나는 선생님이 거의 없다. 문제아까지는 아니지만 공부를 열심히 한 것도 아니어서 애증의 관계로 묶일 만한 선생님이 없었던 것이다. 선생님들은 공부를 무척 잘하는 학생이나 문제아들만 기억한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선생님들은 고개를 내저을지도 모르겠지만 내 경우엔 그랬다. 졸업하고 나서 몇 년이 지난 후 선생님을 우연히 만나게 되더라도, “아, 그래, 너는…, 우리 반이었지?” 정도가 선생님이 기억하는 전부였다. 불만은 없다. 나는 어정쩡한 위치가 좋았다. 공부를 아주 잘한 것도 못한 것도 아니고, 키가 아주 큰 것도 작은 것도 아니고, 얼굴이 아주 잘생긴 것도 못생긴 것도 아니었다.
졸업을 하고서 가장 아쉬웠던 것은 선생님과 제대로 된 대화를 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세계적인 작가 살만 루슈디는 학창 시절 자신에게 영향을 주었던 역사 교사를 기억하고 있었다.
“훌륭한 역사 교사셨을 뿐만 아니라 제가 열다섯 살 때, 『반지의 제왕』을 소개해 주신 분이기도 합니다. 저는 그 책에 홀딱 빠졌습니다. 그래서 공부를 약간 게을리하기도 했지요. 여전히 내용을 기이할 정도로 상세하게 기억하고 있고요. 저는 여기 나오는 언어 프로젝트인 모든 가상의 언어에 빠져들었습니다. 한때 엘프의 언어도 상당히 잘했지요.” (『작가란 무엇인가 2』 파리리뷰)
선생님과 제대로 된 대화를 할 수 있었다면, 『반지의 제왕』을 비롯한 다양한 책의 세계로 빠져들 수 있었을 텐데 무척 아쉽다, 고 쓰고 싶지만 내가 다니던 중고등학교에서 『반지의 제왕』을 읽었다가는 (그때는 제대로 된 번역본도 없었지만) 교무실로 끌려가거나 교실 뒤에서 벽을 보고 서 있어야 했을 것이다. 선생님들이 보기에 『반지의 제왕』은 공부를 방해하는 심심풀이 읽을거리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선생님에게 독서 상담을 받을 수 있는 분위기도 아니었거니와 선생님들의 안목을 믿지도 못했다. 독서에 빠진 선생님이 어딘가 한 명은 있지 않았을까. 그런 선생님을 만났으면 내 인생이 또 어떻게 달라졌을지 모른다.
어린 시절의 학교를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책이 한 권 있다. 존 버닝햄의 『지각대장 존』이다. 존 패트릭 노먼 맥헤너시는 학교에 갈 때마다 별의별 일을 다 겪는다. 악어와 실랑이를 벌이고, 사자에게 엉덩이를 물어 뜯기고, 거대한 파도가 자신을 덮치기도 한다. 학교에 늦을 수밖에 없다. 지각한 이유를 말하면 선생님의 입장은 단호하다. “이 동네 하수구엔 악어가 살지 않아! 사자도 살지 않고, 거대한 파도도 없어! 한번만 더 거짓말을 했다가는 회초리로 맞을 줄 알아라.”
존 패트릭 노먼 맥헤너시는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는 반성문을 써야 했다. 선생님이 존 패트릭 노먼 맥헤너시의 말을 믿어주고 이야기를 이어갔으면 어땠을까? 『지각대장 존』에서 중요한 것은 존 패트릭 노먼 맥헤너시의 이야기의 사실 여부가 아니다. 악어와 사자와 거대한 파도는 존이 지어낸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거짓말인지도 모른다. 존은 늦잠을 잤고, 학교에 늦었고, 발에 불이 나게 뛰어가면서 이런 상상을 했을지도 모른다. ‘아, 사자가 내 엉덩이를 깨물었으면 좋겠네. 거대한 파도에 휩쓸려 갔으면 좋겠네.’ 모든 이야기가 거짓말이었다 해도 존의 이야기를 선생님이 믿어주었다면, 이야기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 것이다.
어린아이들은 사소한 거짓말들을 자주 한다, 고 쓰고 싶지만 모두 나 같지는 않았겠지. 나는 거짓말을 자주 했다. 오락실로 향하면서 거짓말을 했고, 학교에 가기 싫어서 거짓말을 했다. 거짓말을 하기 위해서 머릿속에 엄청난 규모의 공장을 지었다. 그 속에서 새로운 공상을 했다. 그때 지었던 공장의 기계들로 아직까지 소설을 생산하고 있다. 공장은 잘 낡지도 않는다. 점점 커지고 있다. 누군가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거짓말은 어린아이에게 좋은 안식처이자, 훌륭한 도피처가 된다. 아이들이 책 속의 이야기로 잘 빠져드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현실에서 잠깐 벗어날 수 있는 이야기, 현실을 잠깐 잊을 수 있는 이야기가 필요하다. 나는 이야기를 상상하면서 어린 시절을 견뎠다.
『지각대장 존』의 결말은 선생님이 고릴라에게 붙잡히는 장면으로 끝난다. 선생님은 이렇게 외친다. “난 지금 커다란 털복숭이 고릴라한테 붙들려 천장에 매달려 있다. 빨리 날 좀 내려다오.” 존 패트릭 노먼 맥헤너시는 이렇게 대꾸한다. “이 동네 천장에 커다란 털복숭이 고릴라 따위는 살지 않아요.” 선생님에게 통쾌한 복수를 하는 것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이해하지만, 나는 이 결말이 무척 슬펐다. 존 패트릭 노먼 맥헤너시는 너무 빨리 어른이 된 것은 아닐까. 아무도 존의 이야기를 믿어주지 않는다면, 존은 더 이상 이야기를 하지 않을 것이다.
학교에서는 대화가 이뤄져야 한다. 지금의 학교 시설은 예전보다 훨씬 좋아졌을 것이고 훌륭한 선생님들도 훨씬 많아졌겠지만, 선생님들에게 『지각대장 존』을 권하고 싶다. 초중고등학교의 선생님뿐 아니라 누군가에게 뭔가 가르치고 있는 모든 선생님들에게 권하고 싶다. 선생님에게는 믿어주는 연습, 이야기를 망치지 않는 연습, 학생과 함께 이야기를 더 크게 만들어가는 연습이 필요하다. 이야기의 세계에서 한번 멀어지면, 되돌아가기가 쉽지 않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tvN <배우학교>의 한 장면
박신양의 <배우학교>도 추천하고 싶다. <배우학교>를 보면 대화의 묘미를 깨닫게 된다. 박신양은 질문을 잘하는 선생님이다. 문제에 등장한 심희섭과의 대화에서도 느낄 수 있다. 질문은 추상에서 구체를 끌어낼 수 있는 좋은 유도제다. 누군가 “우울해.”라고 했을 때, “야, 그렇게 앉아만 있으니 그렇지. 나가서 산책 좀 해.”라고 하면 대화가 이뤄지지 않는다. “왜 우울해? 어제 무슨 일이 있었어?”라고 물어보는 순간, 대화가 시작된다. 추상적인 우울이 부서지고, 구체적인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자, 이제 문제를 풀어보자. 학교는 어떤 곳일까? 1번부터 5번까지 전부 답이 될 수 있다. 학교는 열심히 뛰어노는 곳이고, 통로이며, 거울이기도 하다. 아무런 거리낌없이 예술 작품을 만들어내는 곳이기도 하다. 방송에서 나왔던 답은 4번이다. 실수를 해도 괜찮은 곳. 우리가 가끔 학교를 그리워하는 이유도 바로 실수를 해도 괜찮은 곳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어른이 되고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하면서부터 실수를 없애야 했다. 실수는 곧 무능이다. 실수는 곧 낙오다. “그래, 괜찮아. 지금은 다 과정이니까 실수해도 괜찮아.” 우리 모두 이런 소리를 듣고 싶을 것이다. 세상에, 과정 아닌 삶이 있을까? 실수 없는 발전이 있을까. 학교만이 실수를 인정해주는 곳이라면, 우리 주위의 세상을 커다란 학교로 만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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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쓰고 산문도 쓰고 칼럼도 쓴다. 『스마일』, 『좀비들』, 『미스터 모노레일』,『뭐라도 되겠지』, 『메이드 인 공장』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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