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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의 신호등이 켜질 때

정차식 <나는 너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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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된 음악들이 자꾸 머그컵처럼 묵직하게 다시 소비되는 건 일회용 종이컵 같은 음악들이 너무 범람했다는 반증이기도 한 것 아니겠나.

나는 어떤 음악에 꽂히면 식후 30분마다 들어 재낀다. 최근 2주 동안 부동의 식후땡 음악은 정차식의 <나는 너를>이었다. 야식도 먹으니까 하루 네 번씩 복용한 셈이다. 겨우내 상처 입은 정신 건강이 많이 좋아졌다. 그렇다면 이번 주 칼럼엔 정차식 얘기를 안 할 수가 없겠는데, 지난 회 김정미의 <봄>에 이어 또 작곡자가 한국 록 교장 샘 신중현 님이시다. 오오. 2회 연속 영예의 신중현 할아버지께서는 소정의 소주를 수령하시러 인천광역시 우리 집에서 열리는 시상식에 꼭 참석해주시길 바라며.... 는 안 웃기고, 첨단의 21세기를 살며 왜 자꾸 신중현 샘이 오래전 송신한 신호들에 자꾸 꽂히는지 의문이다. 사회 분위기가 촌스럽게 자꾸 거꾸로 돌아가서 그런가. 아니겠지. 물론 음악이 아름다워서겠지. 뒤늦게, 또, 여전히 아름다워서겠지. 

 

크기변환_정차식.jpg

 

응팔 때문에 금, 토에 드라마 보는 습관이 생겨버려 <시그널>이라는 드라마를 또 보는데(혜수 누님, 여전히 사.... 사랑합니다) OST가 구성지다. 지금까지 세 곡 공개됐는데 두 곡이 신중현 곡, 한 곡이 산울림 곡이다. 응팔 때문에 복고가 주는 빈티지한 매력이 트렌드인가, OST를 리메이크로만 채운 것이다. 그중 하나가 오늘의 주제곡 <나는 너를>이다.
 
누구 음악인지 정보도 없이 드라마를 켰다가 나는 <시그널>의 시그널뮤직에 딱 꽂혔다. 순간 여러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아, 이건 분명 오래된 음악인데, 어떻게 신선하지? 리메이크라면 누가 이런 독보적인 미학을 가진 오리지널 곡을 썼지? 게다가 감각의 겨드랑이를 쿡쿡 찌르는 이 개성 넘치는 목소리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당장 찾아봤다.  
 
그랬더니 오예 그리운 정차식이었다. 레이니 선(Rainy Sun)의 그 정차식!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독보적으로, 감정적으로, 개성적인 창법의 양다리 산맥 중 한 명 아닌가! (나머지 한 명은 백현진 -그냥 동북아에서 가장 개인적인 제 소견입니다) 아무튼 그리웠던 그분, 정차식의 목소리를 듣고도 바로 알아 뵙지 못했다니 아아 소주 좀 그만 마셔야 하나.

 


레이니 선 시절의 정차식은 정말 소름 돋는 보컬이었다. 공포 창법 때문에 ‘귀곡메탈’이라 불리기도 했지만 나로선 그의 아름답고 독특한 음색에 전율을 느끼느라 소름이 좍좍 돋은 거였다. 특히 1집에서 리메이크한 조덕배의 <꿈에>에서 ‘나 눈을 뜨면 꿈에서 깰까 봐’ 부분을 부를 때, 정차식은 꿈속의 그대를 떠나고 싶지 않은 절실함을 미친 옥타브의 비명으로 표현해냈다. 그게 벌써 15년이 넘었는데 지금 다시 들어도 소름이 바짝 돋는다. 아껴뒀다가 한여름 무더울 때 또 들어야겠다. 그리고 어느 날 내가 열세 번째 사랑에 실패하고 비틀거릴 때 우중충한 비애를 완벽하게 감싸 준 곡 <유감> 역시 그의 흐느낌 창법의 매력을 15년째 풍기고 있고, 앞으로 150년 더 풍길 예정인 것 같다. 아껴뒀다가 다음에 또 사랑에 실패할 때 들어야겠다. 어쨌든 정차식은 레이니선 활동을 멈추고 작년까지 솔로로 <황망한 사내>, <격동하는 현재사>, <집행자> 등 세 장의 앨범을 내 진화된 독특한 창법을 여전히 들려주고 있다. 
 
그의 앨범들을 틀어놓고 운전하면 신묘하게도 우수에 찬 예술영화에 들어가는 기분이 된다. 듣는 이의 배경을 현실에서 영화로 바꿔버리는 공감각 능력자를 우리는 위대한 아티스트라 부르지 않던가. 과연 그의 목소리가 품은 비애감과 폭발성에 촉촉이 젖으면 비루한 일상과 삶의 못생김이 알아서 스르륵 꺼지며 그 자리에 예술적인 위안이 움트고 만다. 고로 울적한 기분의 황망함에 빠지고 말았을 때, 혹은 어쩐지 우수에 흠뻑 젖고만 싶을 때 정차식의 솔로 앨범들은 몹시 알맞다. 특히 비 오는 날, 가슴 속에 우수의 신호등이 어둡게 켜질 때 이마에 손을 짚고 정차식의 음악들을 들으면 그냥 끝내준다. 그의 음악들은 착잡한 쓸쓸함조차 예술로 승화시키는 마법을 꼭 부리니까. 
 
그건 그렇고 드라마 <시그널>의 OST들은 가사에 공통점이 있었다. 떠난다는 말이 꼭 들어있는 거다.


묻지 않았지 왜 나를 떠나느냐고
하지만 마음 너무 아팠네 (OST 1 회상 - 산울림 곡, 장범준)
 
떠나야할 그 사람 잊지 못할 그대여
하고 싶은 그 말을 다 못하고 헤어져 (OST 2 떠나야할 그 사람 - 신중현 곡, 잉키)
 
모두 다 잊고 떠나가야지
보금자리 찾아 가야지 (OST 3 나는 너를 - 신중현 곡, 정차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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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사물 드라마인데 제작진이 이렇게 선곡한 의도가 무엇인지 아직은 드라마가 안 끝나서 모르겠는데 만약 음악을 통한 이야기의 상징을 쓴 것이라면 상당히 고급지겠다. 아닐 수도 있겠지만, 문화적으로 사려 깊고 단단한 것들이 많이 나타나 유치하고 헐렁한 것들을 점점 밀어내는 분위기가 판치면 좋겠다. 오래된 음악들이 자꾸 머그컵처럼 묵직하게 다시 소비되는 건 일회용 종이컵 같은 음악들이 너무 범람했다는 방증이기도 한 것 아니겠나. 
 
뭐가 됐든 겨울은 이제 쫑난 것 같고, 햇살이 감미롭게 내리쬐는 창밖을 보며 <나는 너를>을 듣고 있자니 모두 다 잊고 돌연 떠나고 싶다는 시그널이 딸랑딸랑 울린다. 여행 병이 곧 도질 것 같은데 안 되겠다. 빨리 돈 모아서 떠나야겠다. 가방에 정차식의 음악을 꽉꽉 채워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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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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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박상 (소설가)

소설가. 장편소설 『15번 진짜 안 와』, 『말이 되냐』,『예테보리 쌍쌍바』와 소설집 『이원식 씨의 타격폼』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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