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유희열 산문집 『익숙한 그집 앞』이 떠올랐다. 지금은 절판된 이 책, 나에게는 왜 이렇게 여운이 길까. 오늘은 순전히 한 글의 제목 때문이다. ‘거지 같은 취향 따지기’. 유희열은 "한 개인의 취향을 보고 그 사람의 품격이나 인간성을 평가하려는 사람들에게 강한 반발심을 가지고 있다”며 아래의 글을 썼다.
“뭔가를 좋아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고 배경이 있고 또 근거가 있을 테니 다른 사람의 잣대가 개입될 수 없다. 취향에는 서열이 없다. 순위도 없다. 넌 왜 겨우 이런 취향을 가지고 사느냐고 따져서도 안 된다. 내가 좋아하면 그뿐, 굳이 다른 시선을 의식하거나 눈치 볼 필요가 없다.”
글보다 내 눈에 띈 건 ‘거지 같은’이라는 적나라한 표현이었다. 요즘은 잘 쓰지 않는 수식어인데, 마음에 콕 박혔다. 이후, 내가 타인의 취향을 두고 뭔가를 따지게 될 때, 이 표현이 떠올랐다. 제발, 거지 같은 취향 따지기 좀 하지 말자며.
며칠 전, 오랜만에 남편이 나에게 책을 주문했다. 본인이 사도 될 것을 꼭 내게 주문한다. 마치 내가 매년 연말정산 소득공제를 남편에게 부탁하는 것처럼. 그래도 책을 보겠다는 남편의 호출은 언제나 반갑다. 서둘러 책 리스트를 받아 주문 완료 버튼을 눌렀다. 남편의 주문 도서는 지난해 예스24에서 선정한 ‘올해의 책’ 선정 도서 중 하나인 『마션』과 역시 지난해 호평을 받았던 경제경영 도서 『일론 머스크, 미래의 설계자』. 당일 배송을 받고 화려한 표지를 마주하고 있으니, 웬열! 일독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다. 퇴근 후 서둘러 남편에게 두 권의 책을 넘겼다. 남편은 이틀 만에 『마션』을 헐레벌떡 무척 빨리 읽고는 “완전 재밌다”고 말했다.
“그 정도야? 흠. 나도 읽어볼까?”
“어? 어어어. 네가 좋아할 내용인지는 모르겠지만 읽어봐. 재밌어.”
화려하게만 느껴졌던 표지는 다시 보니, 귀엽게도 보였다. 책을 천천히 읽는 편인 남편의 강추 도서는 과연 어떤 매력이 있을까, 궁금했지만. 나는 첫 장을 넘기면서부터 이미 숨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어, 이걸 어떻게 그렇게 빨리 읽었지?” 어려운 책은 아니었지만 나는 빨려 들지 않았다. 10쪽쯤 읽다가 “나 도저히 못 읽겠는데?”하고 책을 덮었다. 만약 숙제로 이 책이 주어졌다면 열심히 읽긴 했겠다. 재밌다는 평을 했을 것도 같다. 하나, 지금 내가 읽고 싶은 책이 한가득인데 굳이 남편의 취향을 알고자 이 책을 읽어야 할까? 나는 이미 서로의 취향이 꽤 상반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데 말이다. 시간 낭비다 싶어, 얼른 내가 읽던 중인 책을 가방 속에서 꺼냈다. 순간 마음이 편안해졌다. ‘아, 난 역시 이런 책이 좋아’ 혼자 속삭이면서 사람들에게 책 추천할 때 정말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친해지면 타인의 취향이 읽힌다. 내가 읽었는데 너무 좋은 책, 추천해주고 싶어 안달을 낸다. 사무실 옆자리 후배에게는 꽤 많은 책을 추천하는데, 후배가 주말 사이에 책을 금방 읽고는 “재밌는데요?”라고 후기를 전해주면, 내가 저자가 된 것처럼 괜히 뿌듯하고 좋다. 재밌는 책을 정말 순수하게 나누고 싶은 마음에서다.
가끔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까 싶어 책을 선물한다. 한 달이 지나도 책에 대한 리뷰가 없으면, ‘아, 안 읽은 건가?’ 궁금하다. 친한 친구 몇 명에게는 대놓고 물어보기도 했다. 곧 “어, 지혜야. 미안한데 시간이 없어서 아직 못 읽었어.”라는 답장이 왔다. 이 친구는 두 아이를 키우는 직장맘이다. 책 읽을 시간이 없다는 이야기는 사실이다. 이 현실을 알기에 친구만의 시간을 좀 갖기를, 위로하는 마음에서 천천히 편안하게 읽을 수 있는 산문집을 선물했는데, 역시 그래도 커피 쿠폰이 더 나은 선택이었나? 나의 오판이었다. (그러나, 언젠가 읽으리라! 읽으면 분명 좋아할 책일 거라고는 확신한다)
요즘 나는 소설을 못 읽고 있다. 소설광은 아니지만 그래도 좋아하는 편인데, 그렇게 극찬이 쏟아지는 소설책이 책상 위에 쌓여 있는데 선뜻 손이 안 간다. 소설이 읽히는 때가 있고, 비소설이 읽히는 때가 따로 있나? 『글쓰기의 최전선』을 쓴 은유 작가는 “먹고 싶은 음식에 눈길을 빼앗기듯 책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뇌도 몸이기 때문이다. 이성적으로 책을 고른다고 하지만, 알고 보면 본능적인 육감에 의한 선택일지 모른다. 나는 최근 『예민해도 괜찮아』,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를 읽었다. 꽤 닮은 두 책은 내 뇌가 선택한 책이다. 이유가 있다. 나는 안다.
취향으로 시작해 본능까지 왔다. 다양한 주제로 책을 추천하는 코너 ‘내일 뭐 읽지?’까지 만들어 놓고서, 나는 지금 딴 소리를 하고 있다. “책 추천, 다 부질없어”가 아니다. 내 본능, 내 취향보다 더 중한 것은 없다는 뜻이다. ‘권독사’라는 단어만큼 바보 같은 단어가 없다. 누가 권독사가 될 수 있단 말인가? 교만하다, 정말! 나는 안다. 아무리 “이 책 진짜 좋아요. 당신에게 도움이 될 거예요”라고 말해도, 내 몸이 끌리지 않으면 읽을 수 없다는 것을. 무수한 리뷰도, 알찬 기사도 쓸데없다. 내 취향과 많이 닮은 이의 ‘책 추천 페이스북 포스팅’이 훨씬 효과 있다는 사실을,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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