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최민석의 영사기(映思記)
오늘은, 조금 먼 이야기로 시작. 고대인들에게 바다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바다는 용이 사는 곳이었다. 그런데, 이 용이 뜻하는 바가 바로 뱀이었다. 뱀은 알다시피 인류를 현혹해 선악과를 먹게 한 최초의 짐승이자, 마귀, 사탄의 상징이었다. 그러므로 용, 즉 뱀이 사는 바다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때문에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이집트를 탈출할 때, 홍해 바다가 갈라지는 것은 ‘두려움의 대상’이 걷히는 은총의 장면이었다. 성경뿐 만이 아니다. 비슷한 맥락의 러시아 속담도 있다. ‘전쟁터에 나갈 때는 한 번 기도를 해야 하고, 바다에 나갈 때는 두 번 기도를 해야 하고, 결혼을 할 때는 세 번 기도를 해야 한다.’ 갑자기 논의가 이상하게 흘러가지만, 결국 전쟁보다 무서운 게 바다고, 바다보다 무서운 게 결혼이다.
영화 <탐정: 더 비기닝>을 이끄는 모든 사건의 원인은 결혼이다. 극 속에 등장 하는 두 인물, 즉 성동일과 권상우는 결혼 생활에 치일대로 치인 사람들이다(이하 스포일러 주의). 아울러, 영화 속에 살해된 네 명 중 세 명이 가정주부인데, 이들을 살해한 사람은 모두 남편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들은 각자의 아내를 살인교사 했다. 요약하자면, 이 영화는 결혼으로 인해 힘들게 사는 두 주인공이 결혼으로 인해 살인까지 저지른 범인들을 색출해내는 이야기다. 줄거리 끝.
그런데, 영화는 ‘교환살인’이라는 다소 독특한 개념을 소개한다. 아내가 죽으면 남편 입장에서는 의심을 받을 수 있으므로 제 3의 인물이 남편 대신 살인을 해주고, 자신 역시 이 제3의 인물을 대신해 살인해주는 것이다. 예컨대, 어떤 인물의 아내가 죽는다면, 남편은 첫 번째 용의자가 된다. 형식적인 절차이건 아니건, 남편은 언제나 합리적 의심의 첫 번째 대상이다. 그러므로 마치 협동조합처럼 미리 설계한 알리바이 뒤에 꼭꼭 숨은 뒤, 자기 차례가 오면 의무적으로 다른 조합원의 아내를 살해한다. 단지 영화일 뿐이라, 냉정하게 말하자면 계를 타는 순서와 같다.
실제로 <탐정>에서, 한 명이 다른 사람의 아내를 죽이기 전에 주저하자, 또 다른 공범이 ‘이 자식! 뭘 주저해. 어서 해치우라고. 순서를 지켜야지!’ 라는 투로 다그친다. 마치 ‘곗돈 미리 타먹고, 어디로 튀려는 거야!’라는 식이다. ‘사랑은 주고받는 것’이라고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살인도 주고받는 것’이다. 비록 영화지만, ‘세상이 이렇다니!’하며 움찔했다. 이러니, 독신남성인 내 결혼이 자꾸 늦어지는 것 아닌가. 거, 참.
한데, 모든 살인에는 ‘동기’가 있다. 영화에서 남편들이 아내를 죽이려 했던 이유는, 아내의 외도와 배신이었다. 기대와 신뢰가 무너진 관계에서 남편들은 살인을 택했던 것이다. 나는 영화를 보며, ‘아니, 이혼을 하면 될 것을 왜 사람을 죽이고 그러나’ 하며 봤다. 그러니까, 이 영화 속에 등장하는 남편들은 ‘이혼은 죽기보다 싫다’는 유의 극단적인 결혼 유지파인 셈이다. 그러니, 이거 이혼을 너무 싫어하는 사람도 곤란하다는 생각이 든다(살인을 하지 말고, 이혼을 하십시오. 이혼을!).
그나저나, 사실 인생은 이리 살아도 고통, 저리 살아도 고통이다. 쇼펜하우어는 인간을 인생이라는 섬에 유배 온 존재라고 했다. 그러니, 결혼을 기준으로 구분하자면, 어차피 인간은 ‘고독이라는 고통’이나 ‘부대낌이라는 고통’ 중에 감당할 만 한 쪽을 택해야 한다. 인생엔 어차피 피할 수 없는 고통의 총합이 존재한다(고 나는 믿고 있다). 고통이 한 번 퇴장했다 해서, 생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건 아니다. 고통은 이 가면 저 가면을 바꿔 써가며, 생의 여정에 ‘어이. 기쁜가?’하며 다가온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이런 게 인생이라 생각하니, 그저 묵묵하게 인내하며 웃는 수밖에.
*
노파심인데, 이 영화는 시리즈 같다. 이번엔 남편들이 아내를 살해했으니, 다음엔 아내들이 남편들을 살해하지 않을까 싶다. 부디 독자들이 작가를 살해하는 영화만은 안 나오길. 재미없다고 죽이면 정말 곤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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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시티투어버스를 탈취하라’로 제10회 창비신인소설상(2010년)을 받으며 등단했다. 장편소설 <능력자> 제36회 오늘의 작가상(2012년)을 수상했고, 에세이집 <청춘, 방황, 좌절, 그리고 눈물의 대서사시>를 썼다. 60ㆍ70년대 지방캠퍼스 록밴드 ‘시와 바람’에서 보컬로도 활동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