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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 스토리]소설가 김훈 “나는 잡박이다”

<월간 채널예스> 11월호 커버 스토리 새 산문집 『라면을 끓이며』 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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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누구에게나 다가오는 거잖아요. 죽음을 마주하고 보면, 인간이 시간 앞에서 삶 앞에서 경건하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까불면 안 되는구나, 까불 시간이 없구나, 누구의 생애나 경건하고 경건해야 하고 까불면 안 되는구나’ 생각해요. 나는 말을 쓰는 사람이니까, 말을 더욱 조심하고 아끼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 그런 생각을 해요.

인터뷰를 하는 동안 김훈의 휴대폰 벨 소리가 여러 번 울렸다. 히히힝~ 2년째 울리고 있는 벨 소리는 사람의 ‘말’이 아닌, 동물 ‘말’의 울음 소리다. 누군가는 깜짝 놀라며 “이게 무슨 소리인가요?”라고 김훈에게 물었고, 그는 “광개토대왕의 말 소리”라고 우스갯소리를 날렸다. 김훈의 일산 작업실에는 각종 전집과 평전, 판례법전, 돋보기, 침상, 자전거, 등 대단한 물건들이 꽤 많이 전시되어 있다. 그러나 그 중 가장 귀한 것을 꼽아본다면 철가방이다. 그가 ‘글’로 인정한 원고들이 철가방 속에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기 때문이다. 김훈의 새 산문집 『라면을 끓이며』에는 맛있는 라면 끓이기의 비법이 들어있고 ‘밥, 돈, 몸, 길, 글’이라는 주제 안에 살아남은 전작의 글들과 새 글이 실려있다. 다섯 단어의 순서를 조금 바꿔 김훈에게 질문을 던졌다. ‘지극한 말’을 기록한다는 건, 어쩌면 불가능한 일일 터. 다만 말 소리만큼만 솔직하고 정기가 있기를 바랄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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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산문집 『라면을 끓이며』가 나왔습니다. 독자들에게는 반가운 책인데, 작가님은 정작 책이 나오면 거들떠도 안 보신다고요?


거들떠도 안 봐요. 거의 열어보질 않으니까요. 책이 나오면 그것으로부터 떠나려고 하는 거죠.

 

절판된 산문집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 『밥벌이의 지겨움』, 『바다의 기별』에 실린 글 일부를 이번 책에 수록하셨는데, 세 권의 책에 남은 글들은 모두 ‘버린다’고 하셨어요. 독자 입장에서는 배신감, 혹은 서운한 감정이 듭니다.


저로서는 어쩔 수 없어요. 하지만 결국 버려지지 않을 테니, ‘버리고 싶다’가 맞을 지도 몰라요. 그래서 말을 고쳐야 하나도 생각해봤지만. 저로서는 버린 거예요. 여느 독자들이 서운하다고 말해도, 제가 어떻게 하겠어요.

 

살아남은 글들은 지금의 생각과 동일하기 때문인가요?


아니요. 지금의 생각과 일치하기 때문에 건져 놓은 게 아니라, 덜 낡았기 때문이에요. 그래도 유효하다고 생각한 글들인데, 몇 년이 지나면 또 버려야겠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죠.

 

낡았다고요?


글은 대개 낡아지는 거예요.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가 지금 백 명이 넘었지 않습니까? 하지만 상을 받은 작가들이 다 살아있지 않아요. 낡고 퇴색했고, 우리와 관련이 없는 작품도 많아요. 그 책들을 다 읽을 필요는 없죠. 우리 한국문학사에서 문학상을 받은 작품은 얼마나 될까요? 수천 편일 거예요. 그 역시 다 읽을 필요가 없어요. 모두 풍화가 되고 없어지는 거예요. 내가 쓴 글 또한 같은 운명입니다. 자꾸만 새롭게 써서 앞으로 나갈 수 있느냐, 그게 문제죠.

 

작가의 말에 “함부로 내보낸 말과 글을 뉘우치는 일을 여생의 과업으로 삼되, 뉘우쳐도 돌이킬 수는 없으니 슬프고 누추하다”고 쓰셨습니다. 어떤 심정이셨습니까?


나는 갈등이나 자기 분열이 많은 편이에요. ‘내가 왜 이것밖에 안 되나?’ 이런 생각을 합니다. 글쎄, 남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저는 이런 것들이 견디기 어려워요. 내가 왜 책을 썼나 싶기도 하고.

 

독자들의 리뷰 같은 건, 전혀 안 보시나요?


안 봐요. 컴퓨터가 없으니까요. 저는 스마트폰을 쓰지 않아요. 구석기 시대에 쓰는 휴대폰을 갖고 사니까 못 보죠. 안 봐요. 들여다본다고 해도 백해무익하다고 생각해요.

 

‘소통’도 작가들이 갖고 있어야 할 중요한 덕목일 수 있는데요.


독자들의 요청이 있으면 가끔 작가강연회 같은 곳을 갑니다. 이건 그 분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예요. 그러나 기계, 매체를 통해서는 안 합니다. 나는 시끄럽게 막 떠드는 건 소통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냥 소음이죠. 소통을 하려면 적당한 거리로 떨어져 있어야 해요. 한 존재로서 적절한  거리로 떨어져 있어야만 이성적 사유나 판단이 가능해요. 뒹굴고 부둥켜안는 게 소통이라고 한다면, 이런 점에서 저는 소통이 안 되는 사람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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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을 끓이며」가 이번 산문집의 표제작입니다. 라면의 태생부터 시작해서 사회적 의미, 김훈의 라면 레시피에 대해 굉장히 구체적으로 쓰셨습니다.


전부터 쓰려고 했던 글이었어요. 금방 썼어요. 내가 쓰고 싶은 것의 빙산의 일각이에요. 라면만 가지고 책 한 권을 쓸 수 있어요.

 

라면 이야기는 독자들이 책을 통해 직접 읽는 게 더 좋을 것 같고요. 전 ‘김밥’ 이야기가 더 인상에 남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김밥은 그 속에 단무지와 시금치 또는 우엉 한 줄만 넣은 것”이라며 “청량감이 느껴지는 김밥”이 좋다고 하셨는데, 작가 김훈의 문장론도 이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김밥에 여러 가지 재료를 넣으면 아무 맛도 안 나요. 뒤섞여버려서 계통이 없어져서 어떤 맛도 느낄 수 없어요. 배가 부르고 여러 가지 영양소를 골고루 먹을 수 있다는 장점은 있겠지만, 맛의 계통은 전혀 없죠. 단무지를 햄이랑 같이 넣으면 완전히 망하는 거예요. 어떤 맛도 안 나요. 쓰레기를 집어 먹는 느낌이에요. 김밥이라는 항목을 보면 20, 30개가 넘어요. 햄, 참치, 어묵이 들어가는 김밥도 있고 마치 햄버거 같은 불고기를 넣은 김밥도 있는데, 난 그런 건 안 먹습니다. 한 두 가지 재료만 들어가야 맛이 납니다. 우엉은 흙 냄새가 나서 좋아요. 당근도 좋은 당근은 흙 냄새가 나요. 흙의 질감이 느껴지는 게 좋습니다.

 

김밥의 ‘김’도 꽤 중요하지 않습니까?


너무 고급 김은 맛이 없어요. 딱딱하고 뻣뻣한 김이 맛있어요. 김에 참기름은 절대 바르면 안 되요. 김밥을 망치는 거예요. 김밥은 싸서 바로 먹어야 해요. 한 시간이 지나면 김이 눅눅해져서 맛이 없어지기 때문에 바로 먹어야 해요. 일본 식당에서 파는 마끼가 참 맛있는데, 마끼를 잘하는 요리사는 절대 재료를 이것저것 넣지 않아요. 오징어젓갈이나 무순만 넣어도 진짜 맛있죠. 이것도 역시 빨리 먹어야 해요. 일류 요리사들은 절대 여러 가지를 안 넣어요.

 

작가님이 글을 쓸 때, 수식을 피하는 것과 관련이 있을까요?


그건 모르겠어요. 나의 식성은 유년의 가난에서 오는 것이 대부분이에요. 단순한 식재료를 먹고 자라왔으니까요. 물론 서양 음식을 먹고 싶었던 때가 있었죠. 고기나 버터, 치즈, 우유 같은. 그런데 나이를 먹으니까 돌아가게 돼요. 나이가 들면 고기를 먹기가 싫거든요. 생선도 기름이 많지 않은 게 좋고요.

 

 


『라면을 끓이며』는 ‘밥, 돈, 몸, 길, 글’, 총 5부로 나뉘어 있습니다. 분량만 놓고 보면 밥과 돈에 대한 글이 많습니다. 작가님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우선순위로 보이기도 합니다. 또 독자들의 서평을 보면 “먹고 사는 게 여전히 힘들다”는 이야기가 압도적입니다.

 
저는 젊은이들을 걱정합니다. 나는 먹고 살 수 있거든요. 내가 젊었을 때는 우리나라가 너무 가난했어요. 1인당 소득이 83달러였고 캄보디아, 에티오피아와 같이 세계 최빈국이었죠. 우리는 필리핀의 원조를 받고 살았어요. 그런데 지금은 1인당 소득이 3만 달러를 눈앞에 두고 있어요. 잘 살게 됐고 먹을 게 넘치는 세상이 됐는데, 젊은이들은 이 세상 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있어요. 온갖 풍요로움을 다 만들어놓고 젊은이들은 외곽에서 변두리에서 방랑하게 만든 거예요. 이 모든 사태는 나 같은 기성세대들의 책임이고 그들의 죄악이에요. 역사 앞에 저지른 끔찍한 죄악이죠.

 

‘기회의 부재’, 젊은이들이 맞닥뜨린 현실입니다.


내가 젊었을 때 겪었던 밥벌이의 고통보다 더하죠. 접근조차 못하게 해놓았으니까요. 노량진 고시촌에서 취직 못하고 헤매고 있는 젊은이들, 자기소개서를 50번이나 넘게 쓴 사람들과 여러 번 이야기를 나눠 봤어요. 기성세대를 증오하고 저주하고 있는 걸 알게 됐어요. 이 시대는 세대 간의 전쟁이 싸움처럼 번져 있는데, 나는 이 싸움의 구도가 잘못됐다고 생각해요. 이건 기성세대가 전적으로 양보해야 해요. 안 그러면 해결할 길이 없어요. 왜냐면 우리는 금방 자연사 해서 없어질 운명이기 때문에 돈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앞으로의 시대는 젊은이들의 몫임을 인정해야 해요. 기성세대는 돈도 있고 권력도 있고 여유도 있고 채용의 자유도 있는데, 이것을 포기하지 않는 한 문제 해결이 안 되는 거예요. 자기가 세상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면 안 되요. 우리는 지나가는 세대라는 인식을 분명하게 가져야 해요.

 

“능력 있으면 해봐라. 왜 못하냐”고들 하는데요.


물론 개인의 능력이 출중한 사람들이 있어요. 그러나 극소수밖에 안 되고, 대개 그런 자들은 좋은 혜택을 갖고 태어난 사람들이 많아요. 부모를 잘 만났다거나 특출한 재능이 있거나 유산이 있거나. 어른이라면, 몇 명의 젊은이들을 본보기로 삼아서 모두에게 “너 그렇게 해야 해”라고 말하면 안 되는 거죠. 개인의 능력으로는 이미 할 수 없는 세상이에요.

 

그럼 그들은 지금, 무엇을 해야 하나요?


젊은이들의 지옥이 오래 계속되고 있잖아요. 대량으로 소외되고 있는데, 그렇다고 나라를 저주하고 기성세대를 미워하면 우린 희망이 없는 거예요. 젊은이들은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저항해야 해요. 배척당하고 소외 당한 자리에서 욕이나 하고 있으면, 기성 세대들은 자기의 것을 절대 스스로 내놓지 않을 거예요. 정치적인 행태가 됐건, 사회적인 행태가 됐건 젊은이들은 저항해야 해요.

 

밥벌이를 고민하면서 동시에 인문학 열풍입니다. 고전 읽기가 유행인데요.


고전을 읽으면 물론 좋아요. 책을 읽지 말라는 것도 아니고요. 그러나 인문학이란, 자기 주변을 반성하고 자기를 반성하는 힘을 갖는 거예요. 가령 자연과학, 생물학, 화학 등이 훌륭한 학문이지만, 이 학문들은 인간 자신을 반성하는 기능은 없어요. 물리학으로 자기 자신을 반성할 수 있나요? 사회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능력이 있나요? 이건 인문학이 할 수 있는 거예요. 물론 인문학만 가지고 현실의 문제를 해결할 순 없어요. 자연과학, 경제학 같은 학문과 합쳐져야 가능하죠. 인문학의 가장 기본은 인간과 자기 환경을 반성하는 데 있어요. 고전을 아무리 읽어도 자기 주변을 반성할 수 없으면 인문학이 아니에요.

 

그간 문학의 효용성보다는 노동의 가치에 대해 강조하셨습니다. 문학은 사람에게 어떤 의미가 있다고 보십니까?


크게 두 가지가 있을 겁니다. 하나는 심미적 만족인데, 아름다움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어요. 건전한 것, 퇴폐적인 것, 고전적인 것, 전위적인 것 등이 있을 거예요. 또 하나는 삶이나 현실을 반성하게 되는, 그 세계를 개조할 수 있는 힘을 준다는 겁니다. 그러나 나는 현실을 적극적으로 조금이라도 개선하려는 실천적 노력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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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많이 읽지 못한 일은 부끄럽지 않지만. 못이 휘는 일은 부끄럽다”고 쓰셨는데, 보통 사람들은 거꾸로 생각하지 않습니까?


나의 독서는 ‘잡박(雜博)’이에요. ‘잡’은 계통이 없다는 것이고, ‘박’은 넓고 박식하다는 뜻도 있지만 피상적이라는 뜻도 있어요. 나의 경우에는 후자예요. 내가 읽은 책들이 지금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냐를 생각해보면, 등에 식은 땀이 나는 거예요. 대체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나? 그걸 반성해야 하는데. 책을 읽는 것보다 더 중요한 대목이죠. 『자전거 여행』을 쓸 때, 시골에서 농부들을 많이 만났어요. 한글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도 많이 만났는데, 그들은 자신과 이웃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 자신과 환경과의 관계에 대해서 나보다 훨씬 잘 알고 있었어요. 자기가 키우는 소, 말과의 관계에 대해 잘 알고 있을 뿐 아니라 평생 실천하고 있는 분들이 많아요. 이런 분들을 만나면 책을 읽는다고 사람이 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 사회의 수많은 부정부패, 범죄가 있잖아요? 권력형 범죄를 살펴보면 다 공부 많이 한 놈들이 한 거예요. 일류 대학 나오고 책 많이 읽은 사람이 한 거예요. 너무나 분명해요. 나는 증거를 댈 수 있어요.

 

“일은 나를 나 자신으로부터 소외시킨다. 부지런을 떨수록 나로부터 멀어진다”고도 하셨어요. 『밥벌이의 지겨움』에서 어찌됐든 살아남은 글인데요.


우리 세대는 가난을 돌파한 세대잖아요. 젊었을 때, 잔혹한 노동에 혹사 당해서 무지비한 훈련을 받은 거예요. 노동이 나를 소외시킨다는 걸 뼈저리게 알았죠. 농부, 어부를 보면 힘든 작업을 하는데 그들의 노동은 비록 고달파도 소외된 노동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우리가 바친 노동은 자본의 시스템 안에 들어가서 한 부품이 돼서 일하는 거잖아요. 1차산업 노동자들을 보면 자신의 몸을 갖고 일하는데 작더라도 자신의 소출을 가져요. 어떻게 보면 노동과 인격이 분리가 되지 않았던 시대의 노동이 아니었나 싶죠. 이런 이야기를 하면 시대에 뒤떨어진 말밖에 안 되겠지만, 우리는 잔혹한 노동 속에 살고 있어요. 그렇게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나로부터 멀어져요. 하지만 우리가 정말 즐거운 노동을 한다면 자유로부터 멀어지지는 않겠죠.

 

여전히 원고지와 연필로 글을 쓰고 계십니다. 기계를 다루는 것은 오직 자전거 뿐이고요.


나는 기계를 안 만져요. 카메라로 사진을 찍은 적도 없고 운전도 안 합니다. 육필로 원고를 쓰는 가장 큰 이유는 컴퓨터를 못하기 때문이에요. 나의 체질과 안 맞기 때문에 컴퓨터 근처를 가는 것도 싫어해요. 제일 싫어하는 건 비행기입니다. 비행기를 타면 너무 빡빡합니다. 인구 밀도가 너무 높아서 가축을 수송하는 느낌이 들어요. 사람을 묶어 놓고 밥을 갖다 주는 게 너무 모욕적이에요. 메놓고 밥을 주니까 답답해요. 육필로 쓰는 건, 제가 기계로부터 멀기 때문이에요. 육필은 몸의 리듬감이 살아 있어서 좋아요. 앞으로도 나는 컴퓨터를 배울 생각이 없어요. 여생의 시간이 많지 않은 사람이 굳이 고칠 필요도 없고요. 불편을 즐기면서 살면 돼요. 이건 나의 자랑이 아니고 나의 낙후됨을 말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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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에서 또 하나 눈에 끄는 문장이 있었습니다. “지극한 말은, 말의 굴레를 벗어난 곳에서 태어나는 것이리라” 입니다. ‘지극한’이란 표현을 작가님의 여러 글에서 본듯한 기억이 있습니다. 좋아하는 단어인가요?


글쎄요. 이 또한 과장된 언어가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어쨌든 말은 말이 없는 곳에서 태어나는 것 같아요. 지난 추석 때, 달을 봤습니다. 슈퍼 문(Super moon)을 봤죠. 동네 산에 올라가서 봤는데 정말 깜짝 놀랐어요. 달이라는 단어와 관련이 없는, 어떤 객관적인 실체가 내 마음속에 딱 들어오더라고요. 언어의 매개 없이 사물이 딱 들어오는 느낌을 받았어요. 내가 세상에서 태어나 처음으로 달을 본 느낌이었어요. 내가 그동안은 ‘달’이라는 글자를 쳐다보고 살았구나, 싶었어요. 지금 쓰고 있는 글이 달에 관한 이야기예요. 달과 사물, 인간의 직접성에 대해 쓰고 있어요. 그런데 이게 또 써놓고 보니까 말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쓰게 된 문장이에요. 지극한 말이란 것이, 말이 없는 곳에 있더라는 겁니다.

 

글에 대한 두려움 못지않게 ‘말’에 대한 두려움도 있지 않습니까? 인터뷰 또한 말이 기록되는 것인데요.


그래서 되도록 하지 않으려고 하는데 어쩔 수 없이 해야 할 때도 있죠. 인터뷰할 때 가장 무서운 게, 거짓말을 하게 될까봐서예요. 사실 따져보면 거짓말과 과장된 말은 같은 거라고 볼 수 있어요. 과장을 심하게 하면 거짓말이 되는 거잖아요. 적극적으로 진실을 말하지 않은 것도 일종의 허위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런 오류에 빠지지 않으려고 해요. 대개 정치나 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기자와 인터뷰를 할 때, 과장을 많이 합니다. 백 퍼센트는 아니겠지만 자신의 소망을 업적인 것처럼 말하니까요. 그런 과오를 저지르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나의 오판에 의해서 남에게 잘못 전달되는 것들도 있을 거예요. 나는 그런 것을 두려워합니다. 인터뷰는 힘든 일이에요.

 

하루에 원고지 5매는 꼭 쓰려고 노력한다고 하셨습니다.


5매는 못 써요. 도달할 수 없는 일이에요. 하루에 5매만 쓰면 만사가 해결됩니다. 한 달에 150장을 쓰면 10달에 장편 1개를 끝낼 수 있는데,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산문은 소설과 다르지 않나요?


산문은 길게 쓸 수 있어요. 하루에 20, 30장을 쓸 수 있어요. 내 주관적 내면을 그대로 드러내면 되니까요. 그런데 소설은 불가능해요. 소설은 등장인물을 통해서 말해야 하니까, 내가 직접 말할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어요. 작가는 없고 인물만 존재하니까, 3인칭 객관에 의한 표현이니까 어렵죠.

 

책장 아래에 놓여 있는 철가방은 뭔가요?


안산에 있을 때 선감도라는 곳에서 글을 썼습니다. 서해안인데 그 동네 쓰레기통에서 주웠어요. 가방이 3층이잖아요? 원고를 써서 거기다 둡니다. 책상 위에 있는 원고들은 다 미완성이에요. 나만 알아볼 수 있는 글이죠. 철가방에는 완성된 원고만 갖다 넣어요.

 

아버지의 시대를 긴 글로 쓰고 싶은 소망이 있으나, 여러 번 실패했다고 하셨어요. 지금도 요원한가요?


아직 못하고 있는데, 아주 힘든 일이에요. 우리 아버지는 1910년에 태어났으니 식민지의 아들이었어요. 식민지를 유산으로 받은 세대죠. 저는 그 아버지로부터 야만적인 가난과 권력으로부터의 억압을 유산으로 받았고요. 아버지의 생애와 나의 생애에는 한국 현대사의 질곡, 고통이 들어가 있어요. 그런 것들은 표현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에요. 그러나 한 번 해볼 생각은 있어요. 앞으로 나는 소설 두어 편, 혹은 세 편이나 네 편 정도를 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 이상은 아마 힘들 겁니다. 그렇잖아요. 한없이 할 수 없으니까요.

 

최근에는 어떤 생각들을 하고 계신가요? 작가 김훈을 떠나 한 개인으로서의 생각들이요.


나의 내면에 있는 모순이라든지, 인간의 죽음 같은 것들을 생각해요. 요즘 문상을 자주 갑니다. 한 달에 서너 번 가요. 문상을 가면 다들 저의 형뻘입니다. 예전에는 우리 아버지뻘 되는 분들의 문상을 갔는데 이제는 형뻘이에요. 죽음은 누구에게나 다가오는 거잖아요. 죽음을 마주하고 보면, 인간이 시간 앞에서 삶 앞에서 경건하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까불면 안 되는구나, 까불 시간이 없구나, 누구의 생애나 경건하고 경건해야 하고 까불면 안 되는구나’ 생각해요. 나는 말을 쓰는 사람이니까, 말을 더욱 조심하고 아끼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 그런 생각을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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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을 끓이며김훈 저 | 문학동네
‘밥벌이의 지겨움’ ‘아들아, 다시는 평발을 내밀지 마라’ 등 길이 회자되는 김훈의 명문장들을 읽는 기쁨과 함께, 국가가 국민을 지켜주지 못하는 시대에 진영 논리에 휩싸여 악다구니를 벌이는 권력가들에게 그가 ‘슬프고 기막혀서’ 써내려간 글, 여전히 ‘먹고살기의 지옥을 헤매고 있’는 보통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김훈 산문의 정수’가 이 책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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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엄지혜


eumji0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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