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임경선의 성실한 작가생활
외국어로 읽고 쓴다는 것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을 원어로 읽는 것만큼 행복한 일이 없다
번역이 서툴러서, 번역의 문맥이 달라서가 아니라 나는 원서로 읽는 나 자체가 다른 사람이 되어서 읽는다는 느낌을 가진다.
나는 유치원과 초등학교 저학년을 일본에서 다녔기에 쓰기와 읽기를 처음으로 배운 것은 한국어가 아닌 일본어였다. 대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는 한국어로 정규수업을 받은 적도 초등학교 2년을 제외하고는 없었다. 그런데 지금 내가 한국어로 글을 쓰고 그것으로 심지어 먹고 산다고 생각하면 무척 불가사의한 기분이 든다.
삼십 대 중반 무렵까지 한동안은 영어원서와 일어원서로 된 책을 골고루 즐겨 읽었던 것 같다. 지금은 주로 영어는 번역서를, 일어는 원서로 읽는다. 그 차이는 아마도 내 첫 언어가 일본어였기 때문에 그에 대한 무의식적인 편안함이 작용했으리라 짐작해본다. 영어책도 원서로 봐야지 하면서도 자꾸 쉬운 길을 택하게 된다.
사람들은 내게 ‘원서로 읽으면 역시 느낌이 다르냐’는 질문을 참 많이 물어왔는데 나는 이에 대해 ‘확연히 다르다’고 대답해 왔다. 번역이 서툴러서, 번역의 문맥이 달라서가 아니라 나는 원서로 읽는 나 자체가 다른 사람이 되어서 읽는다는 느낌을 가진다. 가령 내가 일본어 원서로 어떤 소설을 읽을 때는 내가 일본 사람이거나, 일본문화를 지극히 잘 아는 ‘인사이더’가 되어 읽게 되고 영어 원서로 책을 읽으면 미국사람인 내가 그 책을 읽고 있는 것만 같다. 텍스트가 나에게 맞추는 게 아니라 ‘내’가 달라져서 텍스트를 체화시키는 것이다. 반면 번역된 작품을 읽으면 나는 한국인의 정체성으로 책에 필터를 껴서 읽는 기분이다.
한국문학을 일본에서 가르치는 한 일본인교수에게도 같은 질문을 물어본 적이 있다. 한국소설을 일본번역서로 읽으면 어떠냐고. 그는 단칼에 한국소설을 일본어로 읽으면 재미없다고 했다. 음감이나 단어의 깊이, 미묘한 뉘앙스의 감를 번역만으로는 부족함을 느끼는 것이 크다고 했다. 원서로 계속 읽다 보면 점점 원서가 아니면 책을 즐기지 못한다고 한 부분은 내 생각과도 일치했다. 정말이지, 외국어를 열심히 공부해서, 원서로 읽을 수 있다면, 원서로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다. 그것은 전혀 새로운 감각의 즐거움을 선물하고 내 정신적 세계를 넓혀줄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원서
특히나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을 원어로 읽는 것만큼 행복한 일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가장 행복했던 일은 얼마전 일본 아마존에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에세이 『직업으로서의 소설가』가 도착했을 때였다. 작가인생 30여년의 총결산격의 자전적 에세이이자 창작론이기도 한 이 책은 그간의 에세이 중 무라카미 하루키의 가장 솔직한 ‘속마음’과 '민낯'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수작이었다. 누가 뭐래도 이런 글은 아무런 중간자의 개입없이 직접적으로 소화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외국어를 원어 그대로 읽는 기쁨이 있는가 하면 외국어로 글을 쓰는 희열을 경험한 작가도 있다. 인도계 미국작가 줌파 라히리는 최근 모국어인 영어가 아닌 이탈리어로 직접 쓴 첫 산문집 『이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를 냈다. 이탈리아어에 푹 빠진 줌파 라히리는 두 번째 장편소설 『저지대』를 집필하는 와중에 로마로 이주하며 그 곳에서 거주하는 동안 오로지 이탈리어로 된 책만을 읽으며 모국어를 철저히 등지며 이탈리어어로 산문집와 단편을 완성하기에 이른다. 외국어를 일상적인 말하고 쓰기는 가능하다. 그러나 외국어로 한 권의 완결성을 갖춘 책을 쓰는 것은 완전히 다른 열망과 애착의 결과물이다. 줌파 라히리의 새로운 도전에 대한 행보를 듣고서 질투가 났던 것은 나도 언젠가 일본어로 글을 써보고 싶었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 한국어로라도 잘 써야지’싶지만 내가 가진 언어저장고의 다른 부분을 매만지고 싶은 것 역시도 모종의 아득한 귀소본능일지도 모르겠다.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
줌파 라히리 저/이승수 역 | 마음산책 | 원서 : IN ALTRE PAROLE
이 산문집은 줌파 라히리가 로마에 머물며 이탈리아어를 발견하고 공부하고 탐색하고 마침내 이탈리아어 작가로 거듭나기까지의 과정을 특유의 간결한 문장과 깊은 성찰로 기록한 책이다. 더없이 유려하게 정제된 23편의 산문 가운데에는 그녀가 이탈리아어로 쓴 단편소설 2편도 포함되어 있다.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는 줌파 라히리가 이탈리아어에 대해 시도한 지극한 사랑의 은유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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