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산 연필
김연수의 여행 에세이
가끔 심심풀이 일문일답으로 “10억 원이 하늘에서 떨어진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같은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내가 생각하는 것은 제주도 협재에 바다가 보이는 문구점을 여는 일이다. 문구점 제목은 ‘필시’다.
PHOTOGRAPH : LEE CHUN-HEE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산 연필
2015년 5월, 나의 소설들이 번역ㆍ출간된 것을 계기로 러시아에서 낭독회 일정이 잡혔다. 첫 번째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출발하기 전, 일정을 주관하는 쪽에서 꼭 가보고 싶은 곳이 있으면 미리 알려달라고 했다. 여행을 많이 하긴 했지만, 관광을 즐기는 편은 아닌지라 러시아라고 해서 딱히 가고 싶은 곳은 없었다. “그렇지만,”이라고 나는 메일에 썼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든 모스크바에서든, 한 번은 꼭 문구점에 들렀으면 합니다.”
외국에서 문구점이 어디 있는가 유심히 살펴보는 버릇이 생긴 건 도쿄 긴자의 이토야(ITOYA) 때문이다. 몇 년 전 혼자 도쿄에 갔을 때 봄비가 추적추적 내리기에 긴자 4초메에 가서 자루소바나 먹고 오자고 나섰다가 근처의 대형 문구점 이토야까지 갔다. 도쿄는 몇 번 갔지만, 이토야는 처음이었다. 소설을 쓰는 사람이 되기 오래전부터 공책에다 뭔가를 긁적이는 걸 꽤나 좋아했고, 덕분에 쓰는 도구에 대한 집착이 심했다. 그런 나의 눈에 이토야 12층 건물은 보물창고나 마찬가지였다.
큰 건물 하나가 통째로 문구점이니, 거기에서 내가 살 물건은 그 건물 전체였다고나 할까. 모든 게 다 사고 싶어서 하나도 못 사는 결정장애자가 있다는 말이 실감났다. 모든 것을 살 수 없다면, 그럼 무엇을 살 것인가? 그건 마치 인생의 질문처럼 느껴졌다. 모든 삶을 살 수 없다면, 그럼 어떤 삶을 살 것인가? 그래서 나는 연필을 사기로 했다. 연필은 내게 가장 겸손하면서도 가장 큰 변화를 이끄는 도구기 때문이다.
가끔 심심풀이 일문일답으로 “10억 원이 하늘에서 떨어진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같은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내가 생각하는 것은 제주도 협재에 바다가 보이는 문구점을 여는 일이다. 문구점 제목은 ‘필시’다. 筆詩. 시집과 연필과 공책을 파는 가게. 낱개로는 팔지 않고, 무조건 세 품목을 묶음으로만 판다. 그 연필로 자작시를 써서 가져오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시를 연필 1자루와 맞바꿀 생각이다. 그렇게 모은 고객의 시들을 한쪽 벽에 붙여놓는다. 벽에 공간이 부족하면 천장에다가, 그것도 부족하면 백사장에 늘어놓겠다.
그런 가게가 실제로 장사가 잘될 리는 없겠지만, 몽상이야 돈이 들지 않으니 무슨 상관인가? 덕분에 나는 연필을 볼 때마다 협재 바다를 떠올리게 됐다. 특히 이토야 같은 문구점에서, 국내에선 구하기 힘든 연필 같은 걸 보면 더더군다나. 귀한 연필은 잘 갈무리해놓았다가 두세 배의 값을 매겨 팔면 되겠다. 몽상 끝에 그런 꾀가 생기니 외국에 나갔다가 낯선 메이커의 연필을 보면 하나 둘 사 모으기 시작했다. 연필은 제아무리 비싸봐야 1자루에 1만 원을 넘지 않는다. 게다가 몇 다스씩 사더라도 여행 가방에 얼마든지 들어간다. 러시아에서 제일 가보고 싶은 곳은 문구점이라는 생각에는 그런 내력이 있었다.
PHOTOGRAPH : LIM HARK-HYOUN
5월 하순의 상트페테르부르크는 그 도시에 사는 이들이 앞다퉈 가장 좋은 때라고 자부하는 계절이다. 밤 9시에 공항을 빠져나오는데 하늘이 여전히 훤했다. 다음 날 아침,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마리아가 시내를 소개하겠다며 찾아왔다. 우리가 탄 승합차는 고골리의 소설에서나 읽은 넵스키 거리(Nevski Prospect)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마리아는 한국어가 빼곡하게 적힌 작은 수첩을 힐끔거리며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나중에 물어보니 밤새 위키피디아를 찾아가면서 그 문장을 한국어로 적었다고 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표트르대제가 1703년에 설립한 도시로, 1713년부터 1918년까지 러시아제국의 수도였습니다”로 시작하는 개괄적인 소개가 끝나고 나자, 수첩에서 눈을 뗀 마리아가 스쳐가는 건물을 가리키며 여기는 카잔 대성당(Kazan Cathedral)이고, 저기 광장 너머는 에르미타주 국립미술관(The State Hermitage Museum)이라는 등 눈에 띄는 대로 시가지를 소개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어느 광장 앞을 지나가는데, 에르미타주만큼이나 중요한 곳이 거기 있다는 듯 큰 소리로 우리에게 말했다. “저기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가장 큰 문구점입니다.”
물론, 나를 위해 특별히 준비한 소개였다. 누가 그런 안내를 받겠는가. 감동적이었다. 그리고 다시 시내 소개가 이어지는가 싶더니 마리아가 손을 들어 또 외쳤다. “저기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두 번째로 큰 문구점입니다.”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위로 올라가면서 웃음이 나왔다. 지금 마리아는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 사실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덕분에 나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두 번째로 큰 문구점이 어디인지도 알게 됐다.
러시아에서는 3종류의 연필을 구했다. 하나는 모스크바의 크라신. 다른 하나는 시베리아 연필 회사에서 만든 콘스트룩토로와 루스키 카란다시. 콘스트룩토로는 파는 곳을 못 찾아 모스크바의 푸시킨 호텔에 있는 것을 가져왔다. 호텔 연필을 가져올 때는 내가 가진 여분의 연필과 바꿔놓는 것이 기본 예의다.
김연수는 하루도 빠짐없이 글을 쓰며 쉬지 않고 소설과 에세이를 발표하는 부지런한 소설가다. 그가 <론리플래닛 매거진 코리아>를 통해 꼭꼭 숨겨두었던 특별한 여행의 추억을 풀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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