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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 코미디 계의 우량아

지방으로 일관하지 않고 각종 영양가로 꽉 찬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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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현재 개봉 중인 영화들에서 '큰 사람의 매력' 을 보여준 경우가 과연 얼마나 될까? 폴 페이그 감독은 그 매력을 알아봤고, 거의 모든 면에서 ‘커다란 매력’ 을 내뿜는 멜리사 맥카시의 매력을 <스파이> 에서 가장 잘 살려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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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 레이나 (로즈 번) 와 수잔 (멜리사 맥카시)


폴 페이그 감독의 <스파이>는 CIA 최고의 요원인 브래들리 파인 (주드 로) 를 돕는 내근 요원 수잔 쿠퍼 (멜리사 맥카시) 의 이야기다. 그런데 파인은 임무를 수행하던 중, 핵무기 밀거래를 추진하는 마피아들에게 현장 요원의 신분이 노출되고 곧 희생된다. 문제가 생긴 CIA. 그들은 곧 마피아들이 존재를 모르는 요원을 보내자고 고안 해내는데, 여기에 쿠퍼가 자원한다. 평소 자신이 연정을 품고 있었던 파인을 위해서인 것도 있지만, 그녀의 개인적 욕망들도 뒤섞여 있다. 그녀는 뭔가 멋있는 인생을 살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CIA에 지원했다. 그러나 그 곳 현실은 무척 열악하다. (그녀가 일하고 있는 사무실은 원체 허름해서, 심심하면 쥐가 나오고 박쥐들이 날아다닌다.) 현장에 나가면 그나마 쫙 빠진 수트와 드레스를 입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주어지는 임무는 오직 미행과 도청뿐이다. 위장 신분마저 촌스러운 판국에, 일은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로 위험하다. 수잔은 딱히 나아진 게 없는 이런 상황에서 위험천만한 현장의 임무들을 수행하게 된다.


이 작품은 폴 페이그 감독과 배우 멜리사 매카시의 세 번째 합작이다. <내 여자친구의 결혼식> 을 만든 후, 산드라 블록과의 찰진 콤비 연기가 돋보였다는 <더 히트> (안타깝게도 한국에는 개봉하지 않았다.) 를 거쳐, 마침내 그녀를 거의 단독 주인공 수준으로 배치한 작품을 만들어낸 것이다. 자국 개봉 당시부터 평가가 좋았기에 이 작품이 과연 얼마나 웃기려나 궁금했다. 작품은 웃겼다. 그런데 숨 못 쉴 정도로 웃기거나 하지는 않았다. 지독한 욕설을 동반한 속사포처럼 치고 나오는 대사와 슬랩스틱 코미디가 난무하는데도 말이다. 심지어 작품 속 총격 액션은 웬만한 액션 장르 뺨칠 정도의 섬뜩함을 전해주는 편이다.


굳이 이렇게 만든 이유가 무엇이지 궁금해지는 순간이다. <스파이>는 분명 코미디이지만 ‘가장 웃긴 코미디’ 대신 ‘가장 완성도 높은 코미디’ 를 지향하고 있다. 덕분에 분명 몇 번 더 강하게 웃길 수 있는 순간에서도, 절제하는 태도를 보인다. 코미디를 절제함으로써 작품이 더 강하게 집중하는 부분은 드라마와 액션이다. 의도적인 컴퓨터 그래픽의 티가 나지만 피가 난무하는 총격전의 폭력수위는 그녀가 마주한 가혹한 현실로 기능한다. <스파이>는 그렇게 ‘장난 아닌 첩보 세계의 현장’ 을 묘사해 내는데 성공한다. 동시에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현장에서 둔해 보이는 수잔의 모습은 시종일관 조롱의 대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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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작품은 수잔이 기를 쓰고 살을 빼거나 성형을 한다거나 하는 과정을 넣지 않는다. 수잔은 오히려 웃기지 말라는 듯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비난과 조롱을 향해 바락바락 대들어댄다. 그리고 육중한 몸과 현장 대신 내근직에서 얻은 방대한 지식을 최적으로 활용해서 사건을 해결해 나간다. 주인공이 자신의 현재를 부정하지 않고, 또 주눅들지도 않는 것이다. 이야기 역시 적절한 개연성과 무게감을 보충하는 모습을 보인다. 덕분에 이야기의 허술함을 코미디로 때워야 하는 상황은 없어지며, 다른 배우들까지 굳이 어울리지 않는 오버 액션 개그를 무리하게 벌이지 않아도 된다. 그들은 자신에게 맞는 자연스러운 코미디 연기를 찾아서 해낸다. <스파이>는 멜리사 맥카시의 원탑 작품이면서, 출연 배우들이 골고루 스스로 코믹한 순간을 주도해서 보여주는 성과를 획득해낸 작품이다. (그리고 거기서 가장 분발하는 사람은 포드 역을 맡은 제이슨 스타뎀과 로즈 번이다.) 동시에 처음부터 끝까지 시종일관 자연스러우며 영화적인 균형이 잘 잡힌 코미디라 할만하다. 작품의 설정들이 굉장히 허무맹랑한데 말이다.


작품을 다 봤을 때쯤에는 아예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멜리사 맥카시가 몇십년 일찍 태어나서 이탈리아의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이나 미국의 러스 메이어 감독과 작업 했으면 어땠을까 같은… 펠리니나 메이어는 태어난 나라나 다루는 장르가 달랐으며, 각자 영화계에 센세이션을 일으킨 감독들이다. 당대에 상반된 대접을 받았다는 점이 특징이기도 하다. (칭찬받은 사람은 펠리니다. 메이어는 왕성하게 활동할 당시 대부분의 평단에서 지탄 받았다.) 두 감독에게는 여성에 대한 동일한 취향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풍만한 덩치와 큰 가슴을 가진 여배우를 선호한다는 것이었다. 어느 정도냐면, 가령 러스 메이어 감독의 경우 "감독님은 수술한 큰 가슴과 C컵 자연산 가슴 중 어떤 쪽을 더 좋아하십니까?" 라고 한 누군가의 질문에 대해 이런 명답을 남긴 바 있다. "그걸 질문이라고.. 무조건 큰 게 좋습니다. 수술 여부가 뭐가 중요합니까. 큰 게 최고에요, 멍청하기는."


폴 페이그 감독의 <스파이>를 보는 동안 자꾸 펠리니와 메이어의 얼굴이, 그 중에서도 메이어의 대답이 끊임없이 떠올랐다. 나는 여자의 몸을 음탕하게 희롱하고자 이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아니다. 질문을 던지고 싶어서다. 지금 현재 개봉 중인 영화들에서 '큰 사람의 매력' 을 보여준 경우가 과연 얼마나 되는가? 몇 개 없을걸. <스파이>는 그 드문 작품 중 하나다. 개인적으로는 멜리사 맥카시가 분명 두 감독의 뮤즈가 되어 있었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물론 그녀는 두 사람의 시대에 활동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덕분에 폴 페이그 감독을 만났다. 감독은 모든 면에서 ‘커다란 매력’ 을 내뿜는 그녀의 재능을 이 작품에서 가장 잘 살려낸다. 폴 페이그 감독에, 멜리사 맥카시 출연의 코미디라면 믿어도 될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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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1 - 다만 <스파이>의 한글 자막 번역은 굉장히 심각하다. 사실 표현 수위를 생각하면 이 작품은 마땅히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을 받아야 하는데, 무슨 수를 썼는지 15세 관람가를 받았다. 그 바람에 등급을 고려하면서 독하게 웃기는 원 대사들의 매력이 다소 반감됐다. (이로 인해 가장 많은 손해를 본 캐릭터는 개인적으로, 로즈 번이 연기한 레이나가 아닐까 싶다.) 자막 번역에는 전문 자막 번역자와 <SNL 코리아>의 작가팀이 참여했는데, 거의 대사와 상관없는 작문 급의 번역을 해 놨다. 작품 속 배우는 <다운튼 애비>를 인용하는데 자막에는 버젓이 <셜록>이 뜨질 않나. 번역자나 작가 팀이나 이렇게 저질스럽게 번역해놓고, 따박따박 보수를 받아갈 거라는 생각에 헛웃음만 나온다.

 

p.s.2 - 그리고… 이번 글로서 <싱글 필름 크리티’끄’> 의 연재도 끝이 났습니다. 처음엔 채널 예스에서 반년만 연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 칼럼까지 하면서 1년동안 연재를 할 수 있게 됐었어요. 더 할 수 없는 것이 아쉬울 정도네요. 얼마나 많은 분들이 제가 끄적인 것을 읽어주셨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글을 읽어주신 분들이 제겐 큰 힘이 되었습니다. 언젠가 다른 글로 다시 뵐 수 있기를 고대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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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홍준호

네이버(에서 전혀 유명하지 않은)파워블로거, 대학졸업생, 딴지일보 필진, 채널 예스에서 글 쓰는 사람. 혼자 작품을 보러 다니길 좋아하고 또 그런 처지라서 코너 이름을 저렇게 붙였다. 굳이 ‘리뷰’ 라고 쓰면 될 걸 뭐하러 ‘크리티끄’ 라고 했냐 물으신다면, 저리 해놓으면 좀 고상하게 보여서 사람들이 더 읽어주지 않을까 싶어서다. 이거 보시는 분들 글 마음에 드시면 청탁하세요. 열과 성을 다해 써서 바칠께요. * http://sega32x.blog.m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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