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찬호 “대학생 취업이 안 되는 게 자기계발 부족입니까?”
『진격의 대학교』 저자와의 만남 대학은 지금 ‘죽은 시민’을 만들어내고 있다
‘경영학과’ 학생들이 늘어나고, 옆 강의실에서 나비넥타이 매는 방법을 가르치는 강의가 진행되는가 하면, ‘취업 3종 세트’, ‘스펙’이라는 단어가 ‘취업 9종 세트’에게 자리를 내주고 있었다. 저자는 신작 『진격의 대학교』를 통해 ‘대학’의 문제를 좀 더 본격적으로 질문하고 진단한다. 오찬호가 진단한 대학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우골탑’, ‘상아탑’ 같은 수식은 차치하고라도 “인생은 공부”라고 했던 신영복 선생의 말처럼 공부 그 자체인 우리네 삶에서 과연 대학이 어떤 의미가 있고, 어떤 기능을 하는지 반드시 한 번은 짚어봐야 한다. 하지만 어느 대학에 걸린 현수막 문구(“여러분 대학이나 개혁하세요 / 우리는 개혁으로 초일류가 될 거니까요!”)를 본 순간 엄청난 괴리감이 밀려왔고, 그 감정은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어디서부터였나. 제대로 따져보려면 가까이, 또 넓게 관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브레이크 고장 난 폭주기관차처럼 질주하는 세상에 대학이 작지만 힘 있는 견제 역할을 하던 시절부터 가장 적극적으로 편승하여 승객들을 사지로 몰고 있는 이 순간까지, 두렵고 괴로운 심정으로 그것을 자세히 살펴봐야 한다.
‘취업사관학교’, 이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모든 대학의 공기다. 그리고 새로운 변화는 공교롭게도 기존의 교육 형태를 무시하는 감정적 자양분이 되어 대학을 ‘환골탈태’시켜버렸다. (88쪽)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에서 저자 오찬호는 ‘동병상련’없는 ‘벼랑 끝’ 청년들을 그려 보이며 많은 이들에게 지금 이 사회의 대학과 젊은이들의 삶에 대해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2007년부터 각 대학에서 강의를 하며 청년들을 만나온 저자는 가장 가까이서 그들의 문제와 불안, 현실을 연구했다. 이른바 ‘대학의 공기’가 어떻게 바뀌는지 피부로 느꼈다. 언젠가부터 저자의 강의실에 ‘경영학과’ 학생들이 늘어나고, 옆 강의실에서 나비넥타이 매는 방법을 가르치는 강의가 진행되는가 하면, ‘취업 3종 세트’, ‘스펙’이라는 단어가 ‘취업 9종 세트’에게 자리를 내주고 있었다. 저자는 신작 『진격의 대학교』를 통해 ‘대학’의 문제를 좀 더 본격적으로 질문하고 진단한다. 오찬호가 진단한 대학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주인(기업)이 더 이상 요구하지 않는데도 노예(대학)는 더 열심히 노골적으로 자신을 재단한다. 소비자들이 1 등급 소고기를 많이 찾자, 1 등급이 출현한 것처럼 말이다. 스스로를 노골적으로 전시하고 ‘경영학적’ 가치만이 전부인 양 교육한다. 그 안에서 학생들은 ‘죽은 시민’으로 키워지고 있다.
지난 4월 23일 서울 송파도서관에서 진행된 『진격의 대학교』 저자 강연은 ‘걸인의 철학’을 완벽하게 내면화 한 대학교가 어떤 인간을 만들어내고 있고, 어떤 공기를 생산하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깊이 있게 나누는 시간이었다. 먼저 “제가 담을 수 있는 모든 내용을 담고자 했다”고 『진격의 대학교』 를 설명한 오찬호 저자는 이날 강연에 대해 “무엇보다 이 책이 어떤 목적으로 쓰였고, 어떤 메시지를 갖고 있느냐 하는 말에 대해 답을 드릴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사회, 나, 그리고 우리’
‘사회, 나, 그리고 우리’라는 강연 제목에 대해 “나라는 존재가 어떤 사회로부터 과연 자유로운가 질문을 던지는 것”이라 설명한 저자는 우리 사회와 다른 사회를 비교함으로써 화두를 던졌다.
“우리는 사회에서 성공하기 위해, 시민이 되기 위해 아등바등 살아야 하지만 어떤 사회는 대단한 노력을 투자하지도 않는데 굉장히 합리적으로 시민정신을 갖추고, 서로를 생각하고, ‘저녁이 있는 삶’까지도 삽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회와 무관하게 스스로가 노력하면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또 그것을 ‘자유’라 착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회 안에서 ‘나’라는 존재는 기대만큼 자유롭지 않다. 본인의 생각이라고 여겼던 것조차 온전히 나만의 것이 아닌 경우가 많다. 선호하는 것들이 유행에 따라 바뀌는가 하면 어린이들의 장래 희망은 그 시기의 가치를 대변하는 가장 가시적인 지표가 된다.
이에 대해 저자는 “‘나’라는 존재는 사회가 어떻게 만들어졌느냐에 따라 어떤 ‘감정’을 느낀다”고 설명했다. 저자가 말하는 이 ‘감정’의 정체는 무엇일까?
“여러분의 체중이 4kg이 늘었다고 할 때 느껴지는 느낌이 있을 겁니다. 체중 증가란 객관적인 현상일 뿐이지만 거기서 뭔가 불안하고 불쾌한 감정이 생깁니다. 그런데 그 감정이 인간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감정인가요? 아니죠. 오늘날, 한국에서, ‘외모도 경쟁력이다’하는 말들이 아무 거리낌 없이 나타나는 이 시대에 우리가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갖게 되는 감정입니다. 자신은 그 감정이 순수한 줄 알아요. 하지만 어떤 나라에서 그런 얘기를 하면 아주 우스갯소리라는 말을 듣는 거죠. 이는 상품성에 현혹된 말이라는 거예요.”
비판은 인간이 누려야 할 권리
우리 사회는 ‘비판’을 무척 낯설어한다. 오찬호 저자는 “어느 순간부터 비판이 비난이라는 것과 동의어가 되어 비판이 온갖 나쁜 이미지로 다가왔다”고 말했다. 건전한 ‘비판’에 대해 강변한 것이다. 비판과 비난은 분명 다른데 그것을 구분하지 못하는 우스꽝스러운 일이 우리 시대에 만연한 것이 현실이다. 저자는 말한다.
“우리가 무엇을 비판한다는 것은 모름지기 인간이라면 누려야 할 권리라는 거예요.”
저자는 진화론의 관점에서 이를 설명한다. 인간은 ‘의심’을 하며 진화했고, 그 결과 ‘이성의 힘’을 가지게 된다. 이로써 인간은 동물이 따라올 수 없는 문명의 발전을 이룩했다. “이성이라는 것은 주어진 것을 그대로 믿는 것이 아니라 합리적으로 의심을 한다는 것”이라고 저자는 말하면서 “인류는 비판정신을 발판삼아 경제, 정치, 사회를 발전시켰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이 대목에서 대학을 조명한다. “대학은 제도적으로 그에 대한 비판의 기능을 수행하는 역할로 상당 부분 존재했다”는 것.
모두들 오늘날 대학이 문제라고는 한다. 비판의 기능을 상실했다고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대학의 문제를 정작 자신과는 무관한 것으로 여긴다. 대학을 떠났거나 당장 대학과 상관없는 삶을 살고 있으므로 그 문제에서 떨어져있다고 느낀다. 아무리 지금 대학의 문제가 심각하다 해도 앞으로 대학이 어떻게 변할 것인지, 얼마나 더 나빠질 것인지 잘 상상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다. 저자는 “대학이 이 사회의 공기를 만든다”고 말한다. 대학의 변화에 따라 사교육 지형이 바뀌고, 어떤 사건에 대해 개인이 느끼는 감정마저도 바뀐다는 것이다.
주지하듯이 대학은 점점 기형적인 모습으로 문제를 만들어내고 있다. 사람들은 대학의 문제가 바닥을 쳤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저자는 “더 나빠진다는 것이 한국 사회에 불가능한 게 아니”라고 말했다.
“처음 ‘스펙’이란 말이 나오고, ‘취업 3종 세트’라는 말이 나올 때 모두 문제라고 말했어요. 하지만 불과 10년 만에 세 배로 진화했습니다. 사회가 정상이라면 좀 막는 느낌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게 없죠. 우리 사회는 굉장히 끔찍해졌어요.”
다음 한 가지를 살펴보자. 우리나라 사람들이 생각하는 중산층의 기준은 무엇일까? (빚 없이)아파트 30평 이상, 월 소득 500만 원 이상, 2000cc 이상 차종 소유… 우리가 쉽게 상상하는 이러한 기준들은 모두 ‘돈’으로 수렴된다. 다른 사회도 이러한가? 어느 사회에게 중산층의 기준을 물었을 때 돌아오는 답은 사뭇 달랐다. ‘공분(公憤)에 의연히 참여할 것’, ‘페어플레이’, ‘약자를 두둔하고 강자에 대응할 것’, ‘불의, 불평, 불법에 대처할 것’ 처럼 표현된 단어 자체가 다르다. “비판적으로 사회를 의심하면서 더 좋은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사회는 문제가 많으니까 개선해 나가야 한다, 하는 것을 대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나오는 말들”이라고 저자는 설명했다. 그에 비하면 우리 사회의 답은 이 사회가 돈이라는 것을 얼마나 지상 최대의 가치로 삼았는지 적나라하게 반증하고 있다. ‘비판’은 인간이 마땅히 누릴 권리지만 ‘비판’이라는 권리를 상실한 사회에 살고 있는 것이다.
‘경제’가 종교가 되어버린 사회
저자는 “경제적인 것을 우선 해결하면 다른 것들이 해결될 거라 ‘착각’을 한다”고 문제의 한 측면을 진단했다. 그 어떤 문제도 ‘경제 부양’이라는 한 마디면 모든 것이 뒷전으로 물러난다. ‘돈’을 많이 벌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는 착각이다. 과연 그럴까? 욕망이란 그칠 줄 모르는 것이 그 속성이다. “사회정의에 참여하는 것이 본인이 경제적으로 성공한 이후에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라고 질문을 던진 저자는 ‘NO’라고 말했다.
“못합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는 거죠. 어릴 때부터 훈련을 받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그런 훈련은 사회 전체와 학교 전체가 힘을 합쳐 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렇지 못한 공간에 살고 있다고 저자는 설명했다.
저자는 이 사회를 “능력주의라는 것이 지나치게 신성화된 사회”라고 했는데, 능력주의란 능력에 따라 차별 받는 것이 정당하다는 보는 것이고 이런 시선이 가감 없이 나오게 된 데에는 ‘평등주의에 대한 오해’가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평등주의라는 것은 1등부터 100등까지 모두가 똑같은 급여를 받자는 얘기가 아니에요. 인간이라면 어떤 경쟁의 결과가 나오더라도 존엄성을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거든요. 존엄성에 차별을 받아선 안 되는 거예요. 인턴, 수습, 비정규직으로 이어지는 고용 조건은 구조적으로 계속해서 개인의 존엄성이 훼손되는 상황입니다.”
사회정의에 참여하는 것, 평등에 대해 명확히 이해하는 것, 모두 제대로 된 교육이 선행되어야 했던 개념들이다. 우리 사회는 아무 철학 없이 그저 ‘먹고 살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인간다움’이란 그것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인데도 말이다. 커피를 마실 여유, 취미활동을 할 여유, 성실히 돈을 모으면 집 한 채 살 수 있는 정도도 불가능한 사회가 지금 우리 사회의 현재다.
대학은 문제를 해결했는가?
‘자기계발’의 환상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취업하기 위해, 정규직이 되기 위해, 남보다 앞서기 위해 ‘자기계발’은 만능열쇠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하지만 이 사회는 환상과 달리 더 나빠지고만 있다. 자기계발 자체에 문제점이 있는 게 아니다. 모든 것을 ‘자기계발’로 돌리는 건강하지 못한 사회가 문제다.
“대학생 취업이 안 되는 게 자기계발 부족입니까? 말이 안 되는 얘기죠. 평균 토익 점수가 과거에 비해 그렇게 많이 올라갔으니 그렇다면 모두 취업이 되어야죠. 애초에 취업문이 좁아진 것은 자기계발 탓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완벽한 오진을 한 거예요.”
자기계발 환상은 사회 구조적 진단을 제대로 하지 못해 일어난 ‘오진’이라고 말하는 저자는 철학의 부재가 개인을 좀먹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사실상 자기계발 환상 덕분에 객관적으로 명백한 사회 문제가 교묘하게 모습을 숨길 수 있었다. 대학은 더 열심히 ‘자기계발’에 집중했다. 대학은 커피믹스 6개 타 마시며 대기업에 합격했다는 이야기를 퍼뜨리고, 권장했다. 결과는? 20대 자살률, 우울증 증가다. 이는 명백한 사실이다. 사회의 완벽한 직무유기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은 기업이 원하는 사람을 만들어주겠다며 문제의식 없이 ‘취업 중심’의 공간으로 변화했다.
“학교가 영어 점수에 개입하기 시작하죠. 토익 강좌를 열어주고, 전교생이 토익 시험을 치도록 합니다. 취업문이 좁아졌는데 대학이 이런 것들을 도와주면 취업이 된다고 10여 년 전부터 외쳤어요.”
과거의 대학을 부정하고, 취업이 가장 큰 목표가 되어 ‘취업학교’로서의 기능만 비대해진 것이다. 이 기형적 구조 안에서 기업인에게 명예 학위를 수여하고, 대학 안에 기업 이름을 딴 건물을 짓고, 기업이 대학을 인수해 회사를 운영하듯 대학을 운영하게 되었다.
“사회가 잘 변하면 대학이 따라가는 것이 맞죠. 사회가 잘못 변하고 있는데 대학이 발 맞춰 가는 것이 좋은 대학이라 평가받는 건 그 자체가 비판이라는 것이 대학에 전혀 없다는 뜻이에요.”
대학은 말한다. 네 스스로를 상품화시키고 ‘스펙’을 높이면 성공할 것이라고 장밋빛 미래를 그려 보인다. 그럴수록 개인이 감수해야 하는 고통은 더욱 증가하고, 사회와 대학이 말하는 이른바 ‘성공’은 점점 더 멀어진다. 스펙을 갖추지 못하는 것, 취업하지 못한 것을 개인의 탓으로 여기도록 한다. 취업 9종 세트(인턴, 자격증, 학점, 학벌, 봉사활동, 공모전 경력, 어학연수, 영어점수 그리고 ‘성형’)라는 말에 학생들은 계속 갇히고만 있다. 취업에 꼭 필요하다는 조건을 모두 갖추기 위해 학생들이 들여야 하는 것은 노력만이 아니다. 영어 점수를 만들기 위해서는 공부할 시간이 있어야 하고, 학원에 다닐 돈이 있어야 한다. 봉사활동 기록을 위해 아르바이트 시간을 포기하거나 부모님의 재정적 지원을 받아야 한다. 어학연수는 더욱 그렇다.
“계급 재생산을 유지하도록 하는 상황이 가속화되는 거죠. 계층 상승을 이룰 수 있는 조건이 사전에 차단되는 겁니다.”
특히 ‘성형수술’이라는 조건은 무척 상징적이다.
“더 이상 흔히 말하는 ‘외모지상주의’에 관한 논쟁을 하면 안 되는 거예요. 우리 사회에 어떤 식으로 비판의 촉수가 사라졌느냐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런 사회를 사는 청년들에게 ‘희망을 가져라’, ‘시민이 되어라’ 이런 말 못하는 거예요. 사회가 엉망진창이라는 걸 아는데 비판하려면 자기만 머리 아프죠. 적극적으로 적응하고 살아가는 게 오히려 더 편해요.”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기업이 정말 그런 사람을 필요로 하는가? “중요한 것은 실제 그런 것과 무관한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기업이 외모로 채용에 차별을 둔다는 의미가 아니다. 다만 대학에 그러한 ‘분위기’가 만연해 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취업문이 너무 좁으니까 ‘왜 떨어졌을까’를 생각하다가 혹시 그런 것 때문이 아닐까 하고 짐작하는 것이죠. 기업의 의도와 무관하게 스스로 자기 검열을 하게 되고 세상의 가치에 따라가야 손해 보지 않는다고 여기게 될 수밖에 없어요.”
대학이 사실상 아무것도 해결해주고 있지 못하다는 증거다. 취업이 어렵기 때문에 취업을 돕겠다고 대학이 변화했는데, 현실은 더욱 힘들어졌다.
지금 대학은 어떠한가? - 1)걸인의 철학
번지수가 틀린 대학평가가 야기한 사회적 문제는 엄청나다. 이는 마블링이 많아야 좋은 소고기라고 생각하는 것과 비슷하다. (중략)물론 소도 평가를 받아야 한다. 하지만 ‘마블링’으로 평가할 이유는 없다. 한국의 대학도 평가받아야 한다. 하지만 그 평가기준을 선정하는 데는 신중해야 한다. 아니, 신중했어야 했다. (182~183쪽)
어쨌든, 대학은 변했다. 변화에 맞춘 학생들은 아팠다. 그런데 그런 사람을 세상은 ‘인재’라고 말한다. 그가 사회에 나와서 활동한다. 자신이 배웠던 가치를 가지고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게 될 것이다. “그 사회가 과연 아프지 않을 수 있느냐?” 오찬호 저자는 지적한다.
“1 등급의 소가 나온 것처럼, 계속해서 대학이 진격을 하는 거죠. 영어 특강을 하더니 어느 순간부터 신입생 필수 수업이라면서 학점을 걸어놓고 영어를 가르치고, 수업 시간에 나비넥타이 매는 방법을 가르칩니다. 외부에서는 그런 대학을 ‘잘 가고 있다’고 하고, 대학 평가를 좋게 하니까 멈춰지지가 않는 거예요.”
이를 저자는 ‘걸인의 철학’이라고 말한다. 먹고 사는 것을 가장 우선적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신념’이다. 걸인의 철학은 잘 먹고 잘사는 것이 해결이 되면 ‘더’ 잘 먹고 ‘더’ 잘사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먹고 사는 것과 관계없는 것은 쓸데없는 것으로 여기고 폐기한다. 취업률 낮은 학과를 폐지시킨다. ‘경제적’ 어떤 것에 해결책으로 다가오지 않으면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 그것이 지금 이 사회가 가진 ‘걸인’의 철학이다.
돈도 안 되는 것을 붙들고 있는 건 어쭙잖은 짓에 불과하다. 대학은 학문 자체에는 관심이 없다. ‘돈이 되면’ 키우고 ‘돈이 되지 않으면’ 버릴 뿐이다. 국어국문학? 그게 한국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지적 생태계에서 어떤 위치에 있어야 하는지 따지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취업이 잘되지 않으니 폐지할 뿐이다. (60쪽)
과거 대학은 이렇게 질주하는 사회를 어느 정도 견제하는 역할을 했었다. 정글화되는 사회의 속도를 조금이나마 늦추어주는 기능을 가졌었다.
“사회는 옛날부터 그랬어요. 정글이었는데, 대학이 자꾸 다른 소리를 한 거죠. 사회는 걸인의 철학을 주장하지만 대학에서는 그것을 비판하니까 지금보다는 덜 야만적일 수 있었죠.”
지금 대학은 어떠한가?
지금 대학은 어떠한가? - 2)호모 맥도날드
지금의 대학은 그 스스로가 걸인의 철학을 추구하고 있는 형편이다. 효율성을 지상 최대의 목표로 삼는다. 한국에 있는 190여 개의 4년제 대학 중 640여 개의 ‘경영학과’가 존재한다. 학교마다 3~4개의 다양한 버전의 경영학과를 설치하고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경영학과에서 개설한 과목의 개수가 웬만한 인문사회 과목을 합친 것보다 많다. “파죽지세로 밀어주는 것”이라고 저자는 설명한다.
이러한 공급 과잉은 또다시 취업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다만 그 이념을 가진 학생만 양산하는 꼴이 되었다. ‘경영학적 마인드’를 가진 학생들이 공격적으로 여론을 형성하기 좋은 조건이 되었다.
“조지 리처(George Ritzer)가 『맥도날드 그리고 맥도날드화』라는 책에서 패스트푸드점의 풍경을 보고 산업화 이후 흔히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선택한다고 여기지만 그 안에는 비인간적인 덫에 걸릴 수밖에 없는 요소가 있다는 점을 잡아냈습니다.”
패스트푸드점을 보자. 깔끔한 외관, 빠르고 효율적인 구조 뒤에는 최저임금, 저질 식재료 등과 같은 여러 문제들이 잠복해있다. 얼마 전에는 실제로 ‘알바 꺾기(손님 없는 시간대에 알바노동자들을 조기 퇴근시키거나 늦게 출근시키는 방식으로 인건비를 절감하는 불법적인 방식)’로 문제를 일으킨 패스트푸드점에 대해 크게 뉴스가 되었다. 이것들에 대해 사람들이 어떤 불편한 감정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부당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효율적 경영’, ‘경비 절감’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순간 문제는 희석된다. 모두들 어쩔 수 없다고 말한다. 부수적 피해로 여기고 만다. 이렇게 변화하는 감정을 대학이 ‘구조적’으로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경영학적 마인드’로 무장한 인구의 등장인 것이다.
지금 대학은 어떠한가? - 3) 죽은 시민
“‘죽은 시민’이란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한 반감이 커졌다는 거죠. 예전에는 열심히 취업 준비하는 학생들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다른 학생에게 관심이 없었는데 지금은 싫어해요. 쟤 때문에 우리 학교 이미지가 나빠질 수 있다, 저런 식으로 하면 평가가 안 좋을 수 있다, 고 생각합니다. 공포가 워낙 크기 때문에 생각조차 스스로 획일화를 강요하는 형편인 것이죠.”
저자는 이러한 변화를 대학의 가장 큰 변화로 짚었다. 대학에서 정치를 배워가던 시기에서 ‘정치’ 자체를 불온시하는 분위기의 변화. 대학이 얼마나 왜소해졌는지 생각할 수 있는 대목이다.
“생각이 다양해지려면 생각을 다양하게 가르쳐주는 학문이 존재해야 하잖아요. 근데 학문이 없는 거죠. 배울 기회가 없잖아요. 철학과 망했고, 사회학과 망하고 있고, 인문학은 융합이라면서 겨우 탈출을 꾀하고 있고요. 개인이 아무리 의지를 가져도 대학이라는 공간 내에서 비판적 사고, 다양한 사고를 가질 수가 없는 거죠.”
이 와중에 기업은 대학에게 더욱 엄격한 상대평가를 요구한다. 좀 더 세분화해서 학생을 줄서기 시키기 좋게 하라고 대학에 요구한다. 숫자로, 서류로만 학생이 존재하기 때문이 아닐까. 하지만 수치로 측정할 수 없는 지식이 대학에는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평가를 위해 “셰익스피어 「오셀로」에 등장하는 손수건의 무늬는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등장시켜야 하는 우스꽝스러운 일이 벌어진다. 이 과정에서 사고력을 증폭을 소외시키는 현상이 일어난다. 상대평가가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말이다. 어떤 문제에 대한 비판 능력과 사고력 함양을 위해서는 수치나 점수로 비교할 수 없는 개별적인 평가가 수반되어야 하지만 기업의 요구대로 상대평가를 위해서는 고민없이 그 방법을 택한다.
“구조적으로 생각이 단순화되니까 어떤 정치적 요구, 의사표현을 하려고 하는 사람들이나 소수자들의 주장이 굉장히 낯설어집니다.”
저자는 ‘죽은 시민’을 보게 된 후 대학이란 공간에서 강의를 하는 것이 낯설어졌다고 소회를 밝혔다. 기업의 노예가 된 대학이 만들어 낸 기가 막힌 단절이었다.
“‘민주주의’라는 단어가 있죠.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잖아요. 살다보면 민주주의가 훼손되는 사건이 늘 등장합니다. 이에 대해 토론을 하면 그 현상이 민주주의가 훼손되었다는 것에 대해 누구도 부인하지 않아요. 민주주의가 어긋났다는 것은 동의를 하는데 가슴이 안 아프대요.”
이런 상황에서는 오히려 민주주의를 얘기하고, 정치적인 의식이나 시민의식을 이야기하는 것이 죄를 짓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저자는 말했다. 저자가 학생들에게 농담처럼 “내게 배운 것과 반대로만 하면 취업이 된다”고 자조적으로 말하는 이유기도 하다.
대학의 변화가 어찌 나와 무관할 수 있는가?
이 무력감은 나만 해서는 바꿀 수 없다는 데서 기인한다. 사회학은 힘이 없다. 인문학에 권력이 없으니 학생들은 이 논리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저 ‘돈 안 되는’ 가르침일 뿐이다. 이러한 분위기를 가진 집단 안에서 개인이 그와 무관하게 순수하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택할 수 있는가?
“호기심을 가지고 배우도록 사회가 만들어져야 하는데 잘못된 공기가 너무 커져버리면 그걸 미리 준비하지 않는 것이 당연한데도 그 사람이 바보가 되는 거예요.”
영어가 그렇지 않은가. 지금 아이들은 유치원 때부터 영어를 공부한다. 영어를 모르는 7살 아이는 그 또래집단 안에서 바보 취급을 받을 수 있다. 이것이 건강한가? 7살 시기에 해야 할 것들을 하지 못하고 영어 공부만 한 아이들이 성장해 구성하는 사회를 상상해보라. 뭔가를 잃어버린 시민들에게 연대, 공동체, 민주주의를 이야기하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일인지를 말이다. 사람들은 점점 더 미래가 불안하다. 그래서 자식에게 더욱 치열하게 공부시킨다. 취업 10종, 11종이 계속 탄생할 것이다.
대학의 변화가 나와 무관할 수 없는 이유다.
‘차별에 찬성’하는 사회, ‘진격’하는 대학교 안에서 우리는 무슨 희망을 말할 수 있을까? 책 첫 장에 인용된 제니퍼 워시번의 문장이 자꾸 맴돈다.
“대학은 시장의 편협한 명령에 항복하도록 내버려두기에는 너무나도 중요한 공적 기관이다.”
진격의 대학교오찬호 저 | 문학동네
‘효율’이라는 잣대로 끊임없이 이루어지는 평가에서 살아남기 위해 대학은 기업(의 자본)에 종속되기를 주저하지 않았고, 기업이 요구하는 부단한 ‘개혁(!)’의 과정을 통해 아무런 고민 없이 취업의 전초기지가 되는 길을 택했다. 하지만 대학이 한 사회의 최고 교육기관인 이상 대학의 문제는 그곳만의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대학은 기본적으로 ‘시민’을 배출해야 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와 같은 문제의식 아래 이 책에서 현재 대학의 실상을 가감 없이 공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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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이십대는 어떻게 괴물이 되었는가 학력과 스펙을 기준으로 차별의 벽을 쌓고 상대를 밀어내고 있는 오늘날의 이십대들의 뒤틀린 모습을 세밀히 탐구하고 이들의 속마음을 들여다본 책이다. 비정규직, 지방대생의 눈물에는 공감하면서도, 이들에 대한 차별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십대들은 ‘정상적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