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사람들이 모였다. 세상이 궁금하거나, 인지과학 혹은 자본주의에 관심을 가진. 논문을 써야 하거나 세상을 보는 편협한 시각을 교정하고자 노력하는. 그동안 몰랐던 사회나 정치 등 재밌는 세상을 알아가는. 칼 폴라니의 현대적 해석이 궁금하거나 인지자본주의가 생소해서 찾아온.
그 모든 사람이 지난달 30일, 서울 홍대 부근의 ‘다중지성의 정원(
//daziwon.net)’에 모였다.
『인지자본주의』(조정환 지음|갈무리 펴냄)의 저자 강연을 듣기 위함이었다. 시대를 집어삼키고 지배하고 있는 자본주의지만, 그것은 지난 2008년의 금융위기로 명백한 한계를 드러냈다. 자본주의를 수정하고 개선하기 위한 노력이 곳곳에서 진행되는 가운데, 저자는 현대 사회를 인지자본주의로 파악하자고 주장한다.
부와 가난의 양극화는 권력 대 무력의 양극화로, 탐욕의 끝 모르는 질주 대 희망의 추락이라는 양극화로, 마천루 높은 곳에서 아래를 굽어보는 삶 대 뒷골목 쓰레기통을 뒤지는 삶의 양극화로 이어진다. 조산된 21세기는 1968년 혁명에서 시작하여 부채위기로 점철되었고 냉전을 제국적 내전들과 테러에 대한 전쟁으로 대체했으며 2008년의 금융위기로 조로현상을 드러내고 있다.… 2011년 아랍 혁명이 그 임종의 징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조로하고 있는 21세기의 자본주의를 인지자본주의라는 말로 명명했다. (pp.12~13)
인지와 자본이라는 열쇳말을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성격, 특징, 구조를 파악하고 이야기한 시간. 당신의 인지에 가해질 수 있는 또 하나의 자극. 조 선생은 생명, 인지, 자율, 혁명의 네 가지 개념과 연관 지어 인지자본주의를 설명했다.
왜 책을 썼는가
조 선생은 1990년대 초반 이래 급속하게 변하고 있는 세상을 계속 탐구하고 있었다. 중요한 기점은 1997년이었다. IMF 외환위기. 비정규직, 실업화의 경향이 노골적으로 표출되는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조 선생은 이런 변화가 우리 삶을 어떻게 관통하는지 관심을 가졌다.
“노동의 구성이 달라졌다. 산업노동자에서 비물질적 노동자들이 본격 등장했다. 디자인을 매개로 예술이 산업과 노동으로 편입됐다. 과거 자본주의와 거리를 뒀던 예술이나 과학이 자본주의 중심부로 등장했다. 논술 등을 매개로 인지노동자들이 학원 주변에 형성되고, 컴퓨터 등의 네트워킹은 IT노동자를 낳았다. 이는 예외가 아니라 한 사회 운영의 경향으로서 뚜렷하게 나타났다.”
이는 하나의 소용돌이였다. 사람들의 시공간 감각이나 태도, 정치에 대한 생각 등이 송두리째 바뀌었다. 조 선생은 이에 주목했다. 과거 노동이 육체를 중심으로 전개됐다면, 오늘날 노동의 주류는 인지라고 부를 수 있는 현상으로 바뀌어가고 있다는 것. 책은 그런 ‘노동의 인지화’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의 성격, 정체, 파급효과가 뭔가를 파악하고 연구한 결과다.
인지의 뜻
인지는 인지과학에서 널리 알려진 말이다. 컴퓨터나 신경생리학, 생물학 등에서 사용된 용어다.
“인지라고 하면 통상적으로 마음으로 얘기될 수 있는데, 자본주의와 이질적인 것으로 느껴진다. 내가 말하는 인지자본주의는 네 가지 개념(생명, 인지, 자율, 혁명)의 상호연관성을 따져야한다.”
우선, 생명. 그는 인지활동과 생명과정이 분리되지 않고 일치한다는 점을 꼽았다. 즉, 생명활동이 인지활동이고, 인지과정이 곧 생명과정이라는 것.
“인간이라는 것이 인지력을 상실한다고 하면,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인지의 정의.
“인지라는 용어는, 생명체가 지각하고 느끼고 이해하고 판단하고 의지하는 등의 활동에 포함되는 정신적 과정을 총칭하는 용어로서, 감각, 지각, 추리, 정서, 지식, 기억, 결정, 소통 등의 개체적 및 간(間)개체적 수준의 정신작용을 모두를 포괄한다.”(p.554)
이어 마투라나와 바렐라가 1960년대
『앎의 나무』라는 책에서 제시한 생명의 기준을 든다. 오토포이에시스(Autopoiesis). 자기(자체) 생성(제작), 즉, 인지능력을 갖는 생명체는 자체 생성적(자기 생성적, 자기 제작적)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진화가 오토포이에시스에 의해 이뤄진다고 주장했다.
“창조, 창발 과정으로서의 생명과정이다. 끊임없는 변혁, 창조의 과정으로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내부적으로 끌고 나가는 힘은 인지과정에 있다. 정리하자면, 생명과정은 인지과정이고, 인지과정은 폐쇄적인 객체가 환경의 습득과정에서 새로운 세계를 창출해나가는 과정이다. 이 과정은 전적으로 자율적인 것이라고 본다.”
혁명, 생명력으로서의 노동이 빠진 질곡에서 구하는 것
그렇다면 사회에서도 그럴까. 맑스를 비롯한 이론가들이 사회를 분석할 때 가장 주목한 것이 자본이라는 현상이었다. 현실을 들여다보자. 우리 삶은 자유로울까? 그렇지 못하다. 끊임없이 강제당하고 눈치를 봐야한다. 자유로움이 생명의 본성임에도 그렇지 못한 일들이 일상에선 태연하게 전개되고 있다. 평등도 마찬가지로, 우리 삶은 전혀 평등하지 않다. 대체 이런 일들이 왜 벌어질까.
“자본을 영어(capital)로 보면, 수도, 대문자 등의 뜻도 있다. 한 사회의 수직구조, 불평등구조를 낳는 것이 자본주의다. 수직구조를 만들어 어디에 가든, 우두머리의 장을 곳곳에 만드는 시스템이고, 이게 자본주의의 기본구조다. 위와 아래의 구조를 체계화 시켜놓고, 불평등 자체를 본질화 시켜놓았다.”
즉, 자본주의에는 자본가가 있고, 이들은 생산된 부의 대부분을 가져감으로써 우두머리가 된다. 열심히 일하라는 정언명령을 의심해야 하는 이유다. 열심히 일할수록 생산된 부가 커지는데, 이는 자본가 수중으로 넘어가 악순환의 고리가 작동하는 게 자본주의 시스템이다.
노동자주의자들은 자본주의 사회를 노동의 과정으로 분석하는 게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는 1970년대 자율주의 운동을 낳았다.
“노동은 생명력이 자신을 사회 속에 표현해내는 방식이다. 특히 인간은 환경과 관계를 맺는다. 모든 생명체는, 무기물을 합성하든, 이미 형성된 유기물을 채취하든, 끊임없이 외부와의 물질대사를 하지 않고는 자체생성이 불가능하다. 생명체가 역설적인 존재다. 닫혀 있으면서도 열려있고, 열려있으면서도 닫혀 있다.”
생명활동은 외부로부터 물질의 흡수와 배출 없이 살아갈 수 없다. 허나 인간은 무기물을 스스로 합성하지 못하고, 농경사회에 들면서 환경을 인간에 맞게끔 가공을 해서 쓰는 존재로 진화했다.
“노동은 역사의 특정한 시점에서 인간이 생명과정을 유지하는 독특한 방식으로 진화한 결과로서 달성한 것이다. 노동력 자체는 인간에게는 필수적인 것이다.”
사회 형태는 그런 노동을 가동 시킨다는 측면에서는 긍정적이지만, 성과물의 착취라는 이중적인 모습을 지녔다는 것이 조 선생의 지적이다. 그에 의하면, 국가도 마찬가지다. 기형적인 구조로 권력기계가 작동하면서 생명에너지의 창발적이고 자율적인 태도가 막혀 왔다는 것. 그러나 어떤 형태로건 이런 장애를 타개하려는 움직임이 있을 거라고 그는 강조했다. 생명력으로서의 노동을 질곡에 빠뜨린 장애를 타개하는 것이 역사에서 혁명의 과정이라는 것.
“생명의 자율성을 회복하기 위해 고민하고 실천하는 방식이 인지자본주의다. 생명, 인지, 자율, 혁명이 내적으로 연결된 개념이다. 인지자본주의는 하나의 프로젝트로 사고하고 있다. 5월에도 ‘인지와 자본’ 심포지엄(19~21일)을 가진다. 우리 사회의 변화와 인지과학의 발전을 통합하려는 작업에 노력을 기울일 생각이다.”
Q & A (혹은 토론)
다음 책은 언제 출간되며, 이번 선거결과는 어떻게 봐야 할까?
“이 책도 4개월여를 집중해서 만들어졌다. 이어서 나올 『혁명의 세계사』(가제)의 원고는 90% 정도 돼 있다. 다만 파편적인 글의 묶음이 아닌 하나의 뜻이 꿰뚫을 수 있는 방식으로 묶을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 핵심적 고리가 잡히면 서술할 텐데, 연내 서술했으면 좋겠다.
혁명의 문제는 앞서 (강연에서) 간략하게 넘어갔는데, 4.27보선 결과를 음미해보도록 하자. 첫째, 선거라는 절차다. 선거라는 행위는 후보자가 정해져 있다. 즉, 외부로부터 주어져서 선택을 하는 문제다. 사지선다형이고, 주관의 개입을 허용하지 않는 질문방식이다. 선거 자체는 우리를 정치적으로 단련시키기보다 바보로 만드는 과정처럼 대부분 주어진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1994년 1월12일 멕시코 사파티스타 혁명군이 봉기를 일으켰다. 전 세계의 관심 있는 사람들이 치아파스주로 몰려들었다. 이들은 멕시코 정부군이 총도 들지 않은 사람들을 향해 탱크포를 쏘아대서 죽게 한 사건을 목격했고, 고발했다. 정부라고 하는 것이 너무 잔혹하지 않느냐.
이후 정부가 사파티스타에게 휴전을 제안했다. 사파티스타는 내부 토론을 통해 결정하겠다고 했다. 이 주변에 삼천여 부족이 사는데, 전부 모아 5개월에 걸쳐, 휴전이냐 싸움이냐를 놓고 토론을 했다. 말이 잘 안 통하니, 통역을 통해 설명하고 이해하고 결정하는 과정을 거쳐 투표를 했다. 대표자들이 하면 될 텐데, 왜 그리 오래 하냐고 정부는 그랬지만, 우리 시각은 다르다고 하면서 토론하고 투표해서 결정을 내렸다. 전쟁을 계속 하겠다.
이 투표는 일련의 형식적 절차 이후 인맥과 금맥이 작용해 이뤄지는 투표와는 다르다. 대의민주주의에서 투표라는 절차는 많은 것이 왜곡되고, 그 과정이 우리를 주체로 일깨우는 과정이라기보다 ‘투표자’라는 왜소한 존재로 전락시킨다. 지금의 선거는 에너지를 축소시킨 상태에서 자본주의적으로 정의된 정치행위에 참가하는 과정임을 전제해야 한다.
둘째, 오늘날의 투표는 얼마 전의 투표와 다르다. 오늘날 인터넷이 준 놀라운 위력 중의 하나는 일방적이지 않고 쌍방적이거나 ?방적으로, 아래로부터의 개입이 가능해졌다. 트위터 등의 공중출판물이 과거의 일방성에 비하면 선거과정에 일정한 유연성을 부여하고 있다. 왜곡이라는 측면만 봐선 안 되고 아래로부터 정치적인 에너지가 나오는 측면도 읽어야 한다.
이번 선거결과, 민주당이 일정하게 유리한 입지에서 선거를 끌고 나갔는데, 반사효과가 크게 작용했다. 한겨레에 나왔듯, ‘민주당이 좋아서가 아니고, 한나라당이 싫어서 찍었다’는데, 참 슬픈 표현이다. 자기가 찍을 후보가 없었다는 거고, 강제된 선거구조가 못마땅하다는 거다. 이번 선거에서 표현된 감정들을 보면, 각 정파에게 뭔가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숙제를 남겨줬다고 본다. 그러면서도 대안을 마련해줄 수 있는 사람들인가에 대해선 숙고해야 한다.
현실 정치적 수준에서 대안이 나올 수 없는 상황인데, 어디에 눈을 두고 누구를 바라봐야 하는가를 봤을 때는, 우리 자신을 가장 먼저 응시해야 한다. 손학규, 박근혜, 이정희, 노희찬 등은 한정지어진 것이고, 그 중 선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 나타나서 우리 마음을 편하게 하고 위안을 줄 수 있는 건 한정적이다. 문제 해결의 수단은 정파를 통해 도달할 수 없다. 우리 자신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무엇을 느끼고 바라고 사는지, 무엇을 당연한 전제로 생각하는지를 성찰해볼 필요가 있다.
지금 제3노조나 현대차 노조 등을 봤을 때, 정규직은 과거 마름과 위치가 비슷하다. 인지자본주의의 메시지는 그거다. 자본가들의 부가 노동자들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고, 고용되지 않은 사람들도 부의 축적에 기여하고, 인지력 자체가 생산력의 핵심을 차지할 때는 고용과 비고용, 정규와 비정규 모두 우리 사회의 부의 창출에 참여하고 있는 상태라는 거다.
한국 금융자본의 상당부분은 정규직 노동자의 임금에서 나오는 것으로 지탱되고 있다. 국민연금공단을 보자. 연금공단이 투자하는 영역이 엄청 크다. 삼성만 해도 제2의 지분소유자다. 다른 대기업도 마찬가지다. 즉, 연금공단이 금융자본의 핵의 핵이다. 이건 무슨 뜻이냐. 노동자들이 자본가라는 것이다. 전쟁 반대를 외치는 노동자들이 무기를 사는 셈이다. 자세히 사회를 들여다보면 내가 전쟁론자이며 자본가다. 인지자본주의는 이런 걸 묻는다. 이럴 때 혁명과 사회변혁은 어떻게 가능한가. 우리가 처단해야 할 적이 나라면 어떻게 할 것이냐.”
지금 대학 등록금이 이슈다. 나는 84년에 대학을 갔는데, 지금 등록금은 한 10배 올랐다. 나는 돈이 많진 않지만, 10배 오른 것 갖고 왜 그러지? 하는 생각이 든다. 왜냐면 서울 부동산 값이 10배 이상 올랐거든. 대학은, 선택이지만 주거는 필수잖나. 쟁점을 다른 데로 가게 하는 것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든다. 또 욕망이라는 기제가 사회적으로 문제가 있음에도 내 탓만으로 돌려버리기도 한다. 욕망과 인지를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연결이 잘 안 된다.
“좀 전의 말씀은, 욕망을 희귀의 형태로 말씀한 거다. 자기는 하지 못하고 있는데, 다른 사람이 거둬가고 있는 상황에서 느끼는 불구화된 욕망, 선망, 희귀의 구조가 가난한 사람들의 마음에 자리 잡고 있다. 능력이 있으면 하라는 차별화된 욕망 구조가 나타난다. 위너와 루저가 카운터 파트너로 자리 잡는 셈이다.
지각이 행동으로 나가기 전에, 욕망이 다듬질 되면서 행동을 창발 할 수 있는 가공공장 역할을 하는 것이 넒은 의미의 정서다. 정서가 행위로 뻗어나가려는 구조가 욕망이다. 정서는 욕망을 매개로 행동으로 표출된다.
부동산을 예로 들면, 오늘날 부동산은 말이 안 맞게 됐다. 움직이지 않는 재산이 부동산인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지구 전체가 다 움직이는 재산, 동산이 됐다. 이런 구조에서 부동산에 대한 우리의 접근 태도를 보면, 인간이 돌아가야 할 고향, 품속으로 관계를 맺지 않는다. 사람은 끊임없이 떠돌아다니면서 대지와 일시적인 관계만 맺는다.
맑스는 지대가 사라질 것이라 예측했지만, 케인즈만 해도 지대를 안락사 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 케인즈의 정책은 먹혀들지 않게 됐고, 모든 돈은 지대화 됐다. 부동산 자체가 산업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대지의 산업화다. 그러니까, 생태라는 것은 엄청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다.
등록금이 치솟는 것도 마찬가지다. 1968년 프랑스 학생들은 등록금을 내기는커녕 수업 노동에 대한 임금노동을 주장??. 수업이 자본가를 위한 노동력을 양성하는 과정이라, 교육과정이 무상인 것은 당연할뿐더러, 돈을 내놓으라는 게 요구조건이었다. 요즘은 등록금을 상품화시켜서 등록금 문제는 전세계적인 쟁점이 됐다.
나는 75년에 대학에 갔는데, 한 달 아르바이트를 하면 등록금을 내고도 라면 한 박스를 살 수 있었다. 이렇게 치솟은 것은 교육이라는 행위가 자본주의적 행정에 포섭된 결과다. 교육이 자본주의와 분리돼 있고 국가와 연결돼 있을 땐 문제가 달랐다.
지금 우리는 공장에 붙인 이름을 대학에 붙여야 한다. 대학이 다 공장이거든. 인지 공장이다. 등록금 문제는 예사로운 문제가 아니다. 예전 파업투쟁을 벌일 때, 임금, 노동조건, 노동시간의 문제를 놓고 투쟁했는데, 지금 학생을 비롯한 인지노동자의 요구조건을 어떻게 정식화할 것인지 생각해야 한다. 네그리는 보장소득, 정보 접근권 등을 내세웠는데, 그것보다 훨씬 세분화된 구체적인 투쟁 쟁점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자본주의가 외부를 갖지 못하는 구조에서 욕망이 자본주의 방식으로 구조화돼야 자본주의는 돌아간다. 자본주의는 광고라는 방식을 통해 대중의 마음에 끊임없이 들어간다. 광고가 무슨 짓을 하는지 들여다보라. 이런 선망의 구조가 공기처럼 돌아다니면서 우리의 습관이자 의식처럼 박힌다. 드라마는 이것을 반복한다. ‘부자 돼라’는 말이 80년대에 나왔으면 맞아 죽었을 텐데, 지금은 그 말이 일상화 됐다. 이런 말을 누가 하나. 부모, 형제, 선생, 나 자신. 우리가 자본주의를 재생산하는 주체로 자본주의 생산자로 참여하고 있다. 이것을 직시하는 것에서 모든 게 출발해야 한다.”
자본주의를 욕망하는 구조에 문화가 가장 큰 기여를 하고 있지 않나 싶다.
“나는 경제도 ‘경제 문화’라고 본다. 정치 역시 문화라고 생각하고, 사회는 곧 문화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기본적으로 문화 아닌 것이 없다. 인지과정이 생명과정과 동일하다고 했던 것처럼, 오늘날 문화가 우리 삶의 많은 것을 결정하고 있다. 정치나 경제를 문화로 보는 건, 정치인이나 경제인처럼 살고 싶다거나, 그들의 행위가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외부에 아무것도 없다는 거야말로 자본주의에겐 위험한 거다. 자본주의가 승승장구 할 수 있었던 것은 외부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제국주의가 없어질 거라고 예언했다. 식민지가 있어야 제국주의가 가능한데, 더 이상 식민화할 수 있는 외부가 없으니 죽게 될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틀렸다. 식민지가 끝나고 열강끼리 전쟁을 통해 식민지를 나누는 투쟁을 하더니, 지금은 인위적 외부를 만들어서 착취하잖나. 이주노동자들이 골목을 도망치게 만들면서. 로자의 예언은 틀렸지만, 외부가 필요하다는 것에선 옳았다.
그래도 생명이 자본과 직접 대응할 수 있는 전선이 형성되고 있다. 외부가 있는 한에선 선망의 구조가 계속 가동될 수 있다. 끊이지 않는 욕망시스템 속에서 살아왔는데, 이제는 외부에서 내부로 진입하는 구조는 끝났다. 생명 자체가 자본주의의 에너지로 되고 있어서 생명이 절멸될 것인가, 아니면 다른 길이 발생할 것인가의 근원적인 문제에 도달했다고 본다.
스튜어드 홀은 문화가 지배의 논리이자 해방의 논리라고 했다. 그래서 아래로부터의 문화투쟁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문화가 지배의 수단이라 우리를 옥죄는 측면이 있어도 그 문화를 활용해서 해방의 길을 열어나가자고 했다. 인지자본주의는 인지가 자본과 직접 대면한 상태다. 인지를 생명의 근원적인 과정과 동일시한다면, 생명이 자율적으로 새로운 세계를 창발하려는 노력과 자본주의가 맞설 수밖에 없다.
인지과정의 다른 용법이 필요하다. 지금의 인지과정은 축적과정에만 매여 있으나, 어떻게 이 장치에 균열을 내서 다른 용법이나 다른 이용 맥락으로 가져갈 것인가가 중요하다. 인지과정을 축적이 아닌 생명과정과 연결시킬 것인가. 말의 도구로 인지과정이 사용된다면, 생명을 앞에 놓고 달려가게 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 집단적으로 숙고해야 한다.”
인간은 혼자 살 수 없는 동물인데,
“마투라나와 바렐라는 생명체의 진화과정에서 생명활동이 공동화된다고 봤다. 인간은 특히 공동 생명활동을 수행하는 존재로서 진화해왔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공동생명 활동은 언어라는 매개를 통해 이뤄진다는 점에서 다른 생명체의 공동생명 활동과 구분된다. 인간은 혼자 살 수 없을 뿐 아니라, 타인이나 타자, 사물을 요구하고, 언어를 매개로 하는 상호소통 과정을 필수로 한다. 언어를 중시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생산의 많은 부분은 언어적 생산이라고 해도 되고, 언어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이는 게 필요하다.
외국어도 마찬가?인데, 외국어를 모르면 본능적으로 내셔널리즘으로 들어간다. 외국어를 알게 되면 언어라는 장치가 가하는 네이션의 틀을 상대화시킬 수 있다. 이게 없으면 의식 체계가 닫힌 체계로 구조화될 위험성이 있다. 언어학습을 계속 하는 것은 그래서 필요하다.”
예술가들은 하고 싶은 일 하니까, 낮은 대가를 받는 게 당연하다는 인식이 있는데…
“좋은 문제제기다. 구체적으로 한 예술가가 자기의 작업성과에 대한 평가를 원하고 소득으로 연결되기를 원하는 것은 지난 세기까지 굳건하게 지탱된 노동과 소득의 연결 메커니즘이었다. 소득은 노동으로부터 나온다는, 좌파와 우파 공동으로 가졌던. 그런데 이런 연결고리는 자본가가 더 반복해서 강조한다.
우리는 소득이 있어야 산다. 그런데 소득을 노동이라는 틀에 묶어 놓은 게 근대자본주의의 과정이었는데, 이 상식에 함정이 있다. 자본가는 자기가 노동한 만큼만 가져가진 않는다. 그 상식대로라면 죽을 만큼, 즉 24시간 일해도 노동자의 3배 이상 가져가면 안 되지 않나. 노동을 애초 소득과 분리해 사고하기 때문에, 자본가에겐 예외주의가 형성돼 있다. 즉, 노동과 자본을 연결하는 것은, 노동자에게만 적용되는 원리로 관철돼 왔다.
따라서 노동과 소득을 잘라내야 한다. 부당하기 때문이다. 인지자본주의는 모든 사람이 노동하는데, 자본가, 노동자에 국한해도 몇 사람만 소득을 갖고 가는 게 잘못됐다고 말한다. 기본소득운동이 몇 년 전부터 시작됐는데, 이는 모든 구분을 넘어 모든 사람은 생에 필요한 소득을 받을 수 있다. 노동과 소득의 고리를 끊는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진다.
예술가가 예술 작업을 하려는데, 먹고사는 것은 물론 예술작업에 충분한 소득이 주어진다면 자신의 성과물을 시장 메커니즘에 던져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해방될 수 있지 않겠나. 노동이라는 말에 주어진 불순하고 강제적이고 딱딱한 이미지를 벗겨내야 한다. 이미 삶과 노동이 일치하는 시대가 왔다. 산다는 게 노동이다.
자본축적으로 연결되는 고리를 끊어내면, 노동과 삶은 일치하고 우리 삶이 노동이어서 삶이 소득과는 무관하게, 삶의 자기생산이 이뤄질 수 있는 관계를 창출하는 것이 필요하다. 고전에서 코뮤니즘이라는 말을 썼는데, 코뮨. 공동으로 나누고 책임진다는 의미인데, 공동으로 사회적 부를 나누고 책임지는 것도 생각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