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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에서 안 좋은 날씨를 만난다면

안개 낀 리오데자네이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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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오데자네이루에 도착했을 때, 나에겐 일주일이 있었다. ‘여행지에서의 단 하루’가 아니라 ‘리오에서 일주일이나’였던 것이다. 그러나 누가 알았겠는가. 일주일 내내 날이 흐리고 중간 중간 잊지 않고 비가 내릴 줄 말이다.

여행을 하다보면 이러저러한 일들을 겪기 마련이지만, 그중에 인력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 하나 있는데 바로 날씨다. 적당히 덥지도 춥지도 않고 화창한 날들만 계속되면 좋겠지만 그게 어디 맘대로 되는가. 여행지에서 날씨에 따르는 리스크는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많다. 태풍이 오면 비행기가 결항될 수 있고, 추위는 폭포도 얼어붙게 만든다. 아무리 치밀하게 짠 여행계획이라도 사실 미래를 예측해 만든 것이기 때문에 날씨 때문에 다 짠 여행이 엎어지는 경우가 생기기도 하는 것이다.

 

대략적으로 그 나라를 여행하기에 좋은 때가 있긴 하다. 계절별 혹은 건기와 우기 등으로 예측이 가능하다. 최적인 때를 알아보는 방법은 매우 간단하다. 대부분의 것들이 그렇듯 비쌀 때가 좋은 때다. 연휴기간을 빼고 말이다. 보다 정확한 방법으로는 검색이 있다. 예를 들어 런던을 검색하면 11월에서 이듬해 2월까지 짙은 안개가 자주 낀다는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다.

 

그러면 여행가기 좋을 때를 알면 그 때 갈 수 있을까? 언제나 확률은 반반이다. 휴가일정은 내 맘대로 주어지지 않으며, 여행경비는 언제나 간당간당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거시적으로 기후가 좋은 때를 골라서 간다하더라도, 매일매일 변경되는 날씨는 여전히 랜덤이란 걸 명심해야 한다. 우산과 가벼운 바람막이 점퍼, 여벌 운동화 등 여행자의 가방이 가벼워질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갑작스런 비를 만났을 때의 대처법은 어떨까? 여기에 머물 수 있는 게 딱 하루뿐이라면, 비바람이 몰아쳐도 보고가야 하지 않겠는가. 마을사람들이야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룰 수 있지만, 여행자에겐 내일이 없다. 친한 친구인 M양은 그래서 독일의 뇌르틀링겐 마을을 강풍과 폭우 속에 관광해야 했다. 심지어 한쪽 발목을 삐어 절뚝거리며 돌아다녔다. 춥고, 아프고, 배고프고, 쓸쓸하고,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고.

 

사실 이 정도까지 악조건이 겹치기도 힘들지만, 이런 상황에 부닥치면, ‘여행지에서의 단 하루’의 마법에 빠지고 만다. 그리고 따뜻한 창에서 새어나오는 주황색 불빛을 부러워하며 이를 덜덜 떨며 마을을 배회하게 되는 것이다.

 

유럽은 여행단가가 상당히 높은 곳이라 하루하루가 소중할 수밖에 없지만, 남미의 경우는 유럽보다는 일정에 여유가 있는 편이다. 문화관광보다는 자연관광이 중심이 되면서 자연히 여행거리가 길어지고 일정도 최소 한 달 이상을 잡게 되는 것이다. 심지어 여행자의 성서 론니플래닛엔 남미여행에 대해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여행 일정이 길어질수록 여행경비는 점점 낮아진다.” 숙박비와 식비가 저렴하기 때문에 성립할 수 있는 기묘한 문장으로, 비행기 대신 버스를, 직행 대신 경유를 선택하면 전체 여행경비가 낮아지는 걸 뜻한다.

 

어쨌거나 그런 사유로 리오데자네이루에 도착했을 때, 나에겐 일주일이 있었다. ‘여행지에서의 단 하루’가 아니라 ‘리오에서 일주일이나’였던 것이다. 그러나 누가 알았겠는가. 일주일 내내 날이 흐리고 중간 중간 잊지 않고 비가 내릴 줄 말이다. 날이 좋아지길 기다렸지만 일기예보는 계속 흐리기 짝이 없었다. 그나마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지 않을 때가 간간이 있었다. 먹구름 사이로 잠깐 햇살이 줄기라도 비치면 그건 아주 좋은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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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속에서 실루엣만 보이는 거대예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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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가 너무 짙어 상체에 초점을 맞추면 상체만,
하체에 초점을 맞추면 하체만 대략 나오는 상태였다.
그러나 이 때에도 많은 사람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거대예수상을 봤을 땐 안개 때문에 실루엣도 제대로 안 보였다. 이맘때쯤 늘 이런지 거대예수상의 발밑 근처엔 맑은 날을 합성해주는 사진사들이 있었다. 안개에 대한 기본적인 대처는 기다림이다. 다른 기상상황도 다 그렇지만, 기다리다보면 안개가 사라지고 맑게 갠 하늘이 보이기도 하니 말이다. 그러나 이 날의 안개는 사라지지 않았다. 아주 두텁게 이불처럼 거대예수상을 감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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춥고 물안개 낀 코파카바나의 해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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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의 물결무늬는 포르투갈 양식인데, 브라질은 포르투갈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자주 보인다. 마카오에서도 볼 수 있다.

 

코파카바나 해변은 조금 달랐다. 브라질에서 가장 유명한 해변이지만, 이날은 한적했다. 모래사장에서 축구공으로 묘기를 부리는 현지인과 가볍게 산책을 즐기는 사람들만 조금 있을 뿐. 2월에 왔다면 화려한 삼바 축제로 거리가 시끌시끌했겠지만 말이다. 막 여름으로 접어드는 무렵이라 바닷물도 아직 차가웠고, 심지어 옅은 빗방울도 흩뿌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에서도 말했듯 그때의 날씨는 폭우만 아니면 다 괜찮은 날이었다.

 

그래서 과감히 바다로 뛰어 들어갔다. 바닷물에서 노는 것은 오직 외국인들뿐이었다. 얼굴이 파랗게 질린 사람들. 물도 춥고, 바깥도 춥고, 그러나 인생에 한번뿐인 기회를 포기하고 싶지는 않고 미묘한 기분이었다.

 

이 날 이후로 시즌이 되기 전에 해운대에서 살이 에일 것 같은 바닷물에 수영하는 외국인들을 그저 굉장하다며 쳐다볼 수 없게 되었다. ‘그렇지, 나름 필사적인거구나’하고 바라보게 된 달까. 얼마를 머물든, 어떻게 여행을 하던 그건 그들에게도 인생에 한번뿐인 시간일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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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낀 그랜드캐니언

 

날씨 이야기가 나온 김에 그랜드캐니언 이야기도 해볼까 한다. 그랜드캐니언에 갔을 때, 나는 첫 해외여행과 첫 패키지여행을 동시에 경험하고 있었다. 안개와 마주했을 때, 날씨 때문에 못보고 돌아갈 수도 있다는 사실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그렇게 먼 시간을 이걸 보기 위해 왔는데, 안개와 다음 스케줄 때문에 제대로 보지도 못한 채 가야한다니 말이다.

 

밥을 포기하고라도 기다리고 싶었는데 여행사 입장은 또 그렇지 않았다. 식사를 모두 포함해 계약을 했는데, 나중에 민감한 문제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나 보다. 다행히 베테랑 가이드를 만나 저녁식사 예약시간을 미루고, 미룬 끝에 다른 여행 팀들보다 더 기다릴 시간을 얻을 수 있었다.

 

새벽부터 출발했는데, 안개 낀 그랜드캐니언만 보고 돌아서는 다른 관광버스를 보고 있자니 허무함이 밀려들었다. 만약 다음에 여행을 간다면 무조건 배낭여행으로, 내 맘대로 가볼 거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내 맘대로 하는 여행엔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리스크가 따랐지만 말이다. 두 시간여의 기다림 끝에 마지막으로 돌아서기 직전에 안개가 개여 그랜드캐니언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처음에 안개가 걷혔을 때는 그냥 바위네 싶었는데 보면 볼수록 더 거대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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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가 서서히 걷히는 그랜드 캐니언

지평선 저 너머, 시야의 끝까지 바위산만 보이는 웅장함을 느낄 수 있다.

 

트래킹 코스를 따라 걷는데 눈앞의 경치가 변하지 않았다. 그랜드캐니언이 너무 거대해서 내가 조금 움직인 것 정도로는 다른 모습을 볼 수 없었던 것이다. 그제야 당나귀를 타고 며칠씩 이동하며 봐야 제대로 볼 수 있다던 가이드의 말이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만약 안개가 10분만 더 늦게 걷혔더라면, 나는 버스에 있었을 것이다. 그랜드캐니언에 대한 기억은 아쉬움으로 끝났을 것이고 말이다. 이래서 여행을 운이라고 하나보다.

 

변덕스런 날씨에 대한 모범답안이 있다면, 지나면 다 추억이 된다는 것이다. 화창한 날씨에 보고 싶었던 것을 보면 좋고, 못 보면 못 본대로 추억이 된다. ‘내가 브라질까지 갔었는데 거대예수상을 못 봤지 뭐야’ 이렇게 말할 거리가 또 하나 생기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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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최은정

안녕하세요, 어쩌다보니 이곳저곳 여행 다닌 경험이 쌓여가네요. 여행자라기엔 아직도 어설프지만, 그래도 오래 다니다 보니 여행에 대한 생각이 좀 깊어지는 것 같습니다. 미국, 캐나다, 페루, 볼리비아, 칠레, 아르헨티나, 브라질, 일본, 대만, 중국 등을 다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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