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나, 영원이 깃든 허방
찰나와 영겁에 관하여
시간 단위로 쓰이는 말 중 가장 긴 시간에 해당하는 말이 ‘영겁(永劫)’이다. 말이 시간 단위이지 실제 의미는 시간의 시작과 끝, 그러니까 천지가 한 번 개벽했다가 다음에 개벽할 때까지의 까마득한 시간을 말한다.
문학평론가 함돈균의 에세이 <시간의 철학>이 매주 화요일 연재됩니다. 시간과 날짜에 대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 다르게 생각해보면 좋을 것들을 철학적으로 풀어봅니다.
영겁, 하늘이 무너지고 지구가 꺼진 후 허공의 시간
시간 단위로 쓰이는 말 중 가장 긴 시간에 해당하는 말이 ‘영겁(永劫)’이다. 말이 시간 단위이지 실제 의미는 시간의 시작과 끝, 그러니까 천지가 한 번 개벽했다가 다음에 개벽할 때까지의 까마득한 시간을 말한다. ‘겁(劫)’은 산스크리트어 ‘kalpa’의 음역이다. 그런데 천지가 개벽했다가 다시 개벽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도저히 상상이 되지 않으니 불경에서는 이를 ‘개자겁(芥子劫)’과 ‘불석겁(佛石劫)’이라는 말로 다시 비유적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게자겁’은 둘레 사십 리 되는 성 안에 겨자씨를 가득 채워 놓았는데 하늘나라 사람이 한 알씩 겨자씨를 가지고 가서 모두 없어질 때를 말하며, ‘불석겁’은 둘레 사십 리 되는 바위를 잠자리날개보다 더 얇은 깃털로 3년마다 한 번 씩 스쳐서 돌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의 시간이다.
장자는 하루살이가 밤낮을 모르고, 한 여름 살다 죽는 매미가 가을과 겨울을 모르듯, 8천 년에 겨우 한 줄의 나이테를 만드는 어떤 나무를 모르는 인간이, 칠백 살까지 산 팽조라는 사람을 제일 오래 살았다고 칭송한다고 비꼬았다. 불경에서 비유적으로 얘기한다고 한들, 장자가 지적한 것처럼 유한한 인간이 어떻게 무한한 시간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시인 네루다는 『질문의 책』에서 “하늘이 무너지면/ 새들은 어디서 날까?// 지구가 꺼지면/ 허공은 얼마나 깊어질까?/ 사람은 어디에 발 디디고 살지?” 라고 물었지만, ‘하늘이 무너지고 지구가 꺼진 후 허공의 시간’은 사람의 것이 아니다. 말은 개념을 만들지만, 이런 종류의 개념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생각 너머에 있다. 비유도 그 너머를 헤아리지는 못한다.
순식간, 별안간, 삽시간, 그리고 찰나
‘찰나(刹那)’는 영겁에 반대되는 시간 개념이다. 역시 산스크리트어 소릿값을 딴 한자 번역어이며, 원어는 ‘ksana’, 즉 ‘순간(瞬間)’이다. ‘순간’에 해당하는 개념은 동아시아에서는 한자 단어에 여러 방식으로 분화되어 있다. 눈 한 번 깜박이고 숨 한 번 쉬는 사이를 순식간(瞬息間)이라고 부른다. ‘순(瞬)’은 눈을 깜박인다는 뜻이고 ‘식(息)’은 숨을 한 번 들이쉬는 동안인데, 당나라 시인 두보는 자신의 글에서 ‘눈 한 번 깜박이고 숨 한 번 쉬는 사이에 얻고 잃는다’고 쓰기도 했다. ‘별안간(瞥眼間)’이란 말도 있다. ‘별(瞥)’은 언뜻 잠깐 스쳐 지나는 것을 뜻하고, 거기에 눈(眼)을 뜻하는 글자를 붙였으니, ‘별안간’은 언뜻 잠깐 눈 한 번 돌릴 사이 또는 눈 한 번 스칠 사이의 짧은 시간이라는 뜻이다. ‘삽시간(?時間)’이란 말도 있다. ‘삽(?)’은 이슬비 또는 가랑비를 뜻한다. ‘삽시간’에 어떤 사태가 벌어졌다고 할 때, 이슬 같은 빗방울이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지는 짧은 시간에 겉잡을 수없이 일이 터지고 전개되는 걸 말한다. (박수밀, 『박수밀의 알기 쉬운 한자 인문학』)
‘찰나’는 ‘순간’의 개념 중에서도 가장 짧은 시간에 해당하는 낱말이다. 영겁이 무한대의 시간 간격을 뜻한다면, 찰나는 무한소의 시간 간격을 뜻한다. 현대의 시간 개념으로 바꾼다면 ‘75분의 1초’라고 얘기되기도 하지만, 오메가(omega) 같은 시계명가에서 1000분의 1초, 10000분의 1초 단위로 시침을 나눈 시계가 나오는 시대임을 감안하면 그 간격은 사람의 상상 너머를 지시하는 극한적인 순간으로 미분된 시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차라리 ‘75분의 1초’라는 말보다는 불경의 비유 아닌 비유가 역시 더 생생하다. (물론 상상은 잘 되지 않지만!)
『대비대사론』에는 ‘가는 명주실 한 올을 젊은 사람 둘이서 양쪽 끝으로 당기면서 칼로 명주실을 끊었더니, 명주실이 끊어지는 시간이 64찰나였다’는 얘기가 나온다. 명주실 끊어지는 순간의 64분의 1이 ‘찰나(1찰나)’라는 것이다. 전해 오는 얘기로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 순간 사람이 그것을 느끼는 순간이 1찰나의 120배인 120찰나라고 하며, 손가락을 한 번 튀기는 사이(一彈指時)가 65찰나라고도 한다. (최기호, 『어원을 찾아 떠나는 세계문화여행』)
의미심장한 것은 이러한 개념이 시간에 대한 물리적 측정을 위한 단어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찰나’에 대한 불경의 해석이나 동아시아 문화의 수용 과정은 여기에서 인생의 영고성쇠가 이뤄지는 ‘세계 시간’을 본다. ‘인생이 찰나처럼 지나간다’라는 말을 흔히 쓰거니와, 김만중의 고전소설 『구운몽(九雲夢)』도 이러한 시간관 속에서 나왔다. 연화도량에서 도를 닦던 성진이 양소유로 세상에 태어나 오욕칠정을 겪던 삶의 전생애가 실은 ‘찰나’였던 것이다. 시간의 변증법에서 보자면 『구운몽』의 주제는 인생의 무상함에 대한 단순한 각성을 촉구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찰나’에 깃든 ‘영겁’, 순간에 깃든 영원, 유한의 생에 담길 수 있는 무한성에 관한 성찰이라고 뒤집어 읽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꿈이 깨고 난 뒤에야 그것이 꿈임을 각성하지만, 꿈이 깨기 전에 우리는 그것이 꿈임을 알지 못하며, 꿈속의 생은 그것대로 한 생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양소유에서 성진으로 다시 돌아와 꿈을 깬 성진이 ‘스승이 자신으로 하여금 꿈을 꾸게 해서 깨닫게 한 것이다’라고 얘기했더니, 오히려 스승인 육관대사가 아직도 ‘꿈’을 운운하는 것을 보니 꿈과 실재를 구분하려 하고, 아직도 꿈을 깨지 못했다고 제자를 혼내는 것이 아닌가. 『구운몽』에 녹아 있는 궁극적 철학은 ‘인생은 꿈이다’가 아니라, 꿈과 실재를 구분하는 관념의 이분법에 대한 해체다. 찰나든, 삽시간이든, 순식간이나 별안간이든 간에 순간에 대한 이런 오래된 낱말들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도 결국, 순간이 짧은 시간이니 무의미하다는 게 아니라, 무언가 중요한 일은 순간에 발생한다는 사태의 심각성에 대한 성찰이 아닌가. 히포크라테스는 ‘인생은 짧고 배워야 할 기술(techne/예술)은 길다’고 했지만, 기술을 출현시키는 것이 순간의 인생이며, 그 인생을 내포하는 작업이 기술(예술)이다. ‘순간’은 짧지만, 두께 없는 시간의 평면에 우주의 깊이와 물질의 신비가 깃들어 있음을 알려준다.
한 줄기 번갯불, 아득히 먼!
양소유에게 인생의 오욕칠정을, 연화도량 승려 성진에게 현묘한 각성을 부여한 ‘찰나’의 시간은 도시인에게는 다른 방식의 상처를 남기기도 한다. 보들레르의 시 <지나가는 여인에게>는 ‘찰나’가 지닌 ‘현대성’에 대한 예민한 암시를 다음과 같은 시적 예화로 보여주고 있다.
거리는 내 주위에서 귀가 멍멍하게 아우성치고 있었다.
갖춘 상복(喪服), 장중한 고통에 싸여, 후리후리하고 날씬한
여인이 지나갔다, 화사한 한 쪽 손으로
꽃무늬 주름 장식 치마 자락을 살풋 들어 흔들며,
날렵하고 의젓하게, 조각 같은 그 다리로.
나는 마셨다, 얼빠진 사람처럼 경련하며,
태풍이 싹트는 창백한 하늘, 그녀의 눈에서,
얼을 빼는 감미로움과 애를 태우는 쾌락을.
한 줄기 번갯불…… 그리고는 어둠! 그 눈길로 홀연
나를 되살렸던, 종적 없는 미인이여.
영원에서밖에는 나는 그대를 다시 보지 못하련가?
저 세상에서, 아득히 먼! 너무 늦게! 아마도 ‘끝내’!
그대 사라진 곳 내 모르고, 내 가는 곳 그대 알지 못하기에,
오 내가 사랑했을 그대, 오 그것을 알고 있던 그대여.
- 샤를 삐에르 보들레르, <지나가는 여인에게>, 황현산 역
도시를 걷는 일은 새소리를 들으며 숲길을 걷거나, 농촌의 마을길을 걷는 일과는 다르다. 어제의 꽃과 새소리와 이웃들은 오늘도 내일도 보고 들을 수 있지만, 도시의 걷기는 군중의 대규모적이고 무정부주의적인 흐름에 묻혀 그와 하나가 되는 일이다. “거리는 내 주위에서 귀가 멍멍하게 아우성치고 있”는 까닭은 차량소리 때문이 아니라, 익명성과 일회성의 부딪힘으로 이루어진 군중의 거리, 현대적 무질서가 촉발하는 감각의 혼돈 때문이다. 현대적 무질서가 야기하는 도시의 이 정서적 과잉 상태에서 ‘나’도 예외일 수 없다. 그 거리에서 ‘나’는 모르는 “날씬한 여인”을 잠깐 스쳐 지나간다. 그것은 일종의 ‘찰나’다. 이 찰나는 물리적 시간에 그치지 않으며 ‘나’에게 시간의 까마득한 허방을 개방한다. 이 찰나에 ‘나’는 “그녀의 눈에서” “얼을 빼는 감미로움과 애를 태우는 쾌락”을 감지한다. “한 줄기 번갯불”은 찰나의 시간인 동시에 찰나가 촉발한 감각적 경이의 강렬함을 표현하고 있다. 나의 시선이 “그녀의 눈에서” “태풍이 싹트는 창백한 하늘”을 보았을 때, 두 시선은 서로 아주 잠깐이나마 교차했을 것이며, 이 하늘은 어쩌면 그녀가 ‘내’ 눈에서 본 세계일 수도 있을 터이다. 아직 태풍이 되지 못하고 태풍을 예비한 이 하늘은 순간적 현재에 담긴 아직 오지 않은 시간(미래)이며, 찰나에 담긴 영원의 시간이다. “그리고는 어둠!”이 찾아온다. “그 눈길로 홀연/ 나를 되살렸던” 그녀는 “종적 없는 미인”이 된다. “그대 사라진 곳 내 모르고, 내 가는 곳 그대 알지 못하”는 도시적 익명성과 일회성, 현대적 무질서는 어쩌면 “내가 사랑했을 그대”를 “어둠”으로 사라지게 한다. “저 세상에서, 아득히 먼!” 곳에서나 가능할 재회는 “영원에서밖에” 가능하지 않은 내생(來生)의 소망으로 남는다.
이 시에서 번갯불의 번쩍임과 어둠의 아득함은 순식간에 교차된 만남과 이별의 드라마, 존재의 연결과 단절의 서사에 대한 찰나적 감각의 깊이를 드러낸다. 이 찰나적 교차는 도시인에게 아득한 신비이자,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재회가 어렵다는 점에서) 회복하기 어려운 예민한 몸의 상처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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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가이며,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 한국문학 속에 나타난 전위적 감각과 윤리를 탐구하는 연구·비평·강의에 매진하고 있다. 인문정신의 사회적 확산과 시민적 공공성을 확보하기 위해 ‘실천적 인문공동체 시민행성’을 기획하여 공동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매일경제신문에 문명의 무의식과 시대정신을 사색하는 <사물의 철학>이라는 인문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문학평론집으로 《예외들》, 《얼굴 없는 노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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