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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하지 않은 여자들> 착할 필요 없는 여자들에 대한 명랑한 보고서

KBS 드라마 <착하지 않은 여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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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이 세상을 향해 날리는 최초의 반항에서 드라마가 시작된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더 이상은 참지 않겠다, 내가 살아온 길이 어쩌면 다를 수도 있었다는 깨달음에서 그들이 여태 눌러온 에너지가 폭발한다.

김인영 작가의 전작 KBS <태양의 여자>에서 주인공 신도영(김지수)은 독특한 위치에 서 있었다. 동생 지영(이하나)에겐 어린 동생을 서울역에 유기하고 인생을 망쳐놓은 가해자이지만, 양모 최정희 교수(정애리) 혹은 친모(김미경)와의 관계에서는 어릴 때부터 유기와 학대를 당한 피해자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최 교수와 도영의 친모가 악인이냐고 묻는다면 섣불리 고개를 끄덕일 수는 없다. 최 교수 역시 어린 친딸을 잃고 정서적 불안 상태에서 오랜 기간 신경증을 앓아왔으며, 친모 역시 자신의 과오를 반성하고 후회하며 살아왔다. 작품은 선과 악의 경계를 모호하게 흐리고 그들이 받은 상처를 조명하는 데 주력한다. 김인영 작가는 자신이 삶에 영구한 흔적을 남기는 상처와 그로 인해 비틀리고 조각난 인간, 특히 여성상을 그리는 데 탁월한 능력이 있음을 이미 증명해 보인 셈이다.
 
KBS <착하지 않은 여자들>의 주인공들이 어떤 상처를 입었는지 관찰하는 것은 그래서 흥미롭다. 인물들은 약속한 것처럼 인생의 암초를 만나고, 힘찬 항해가 잠시 멈춘 사이 이 암초가 대체 어디서 불쑥 튀어나왔는지, 나의 항로는 바른 길이었는지 돌이켜 생각할 기회를 갖는다. 그리고 놀라운 깨달음을 얻는다. 나의 인생은 보이는 것과 같지는 않았음을, 이제 다른 길을 걸어보고 싶다는 것도. 드라마는 여기서 그들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현숙(채시라)의 상처다. 어릴 적 레이프 가렛의 콘서트에 가서 꿈에 그리던 그와 포옹을 하고, 그 기억을 못 잊어 공항에서 그의 이름을 울부짖다 신문에 얼굴이 실렸다. 1면에 실린 현숙의 얼굴―2015년이라면 초상권 침해나 언론의 편향 보도라고 두드려맞았을 법한―을 보고 학교에서는 명예를 실추했다며 정학 처분을 내리고, 연달아 도둑질을 했단 이유로 퇴학을 당한다. 누명인 것도 억울한데 처음부터 제게 낙인을 찍어놓은 담임 나말년(서이숙)은 현숙의 말은 듣지도 않고 퇴학을 결정짓는다. 중년이 된 지금, 이리저리 비틀대는 거친 삶을 되돌아보며 현숙은 자신의 인생은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잘못되었다고 울부짖는다. 현정(도지원)은 결혼도 가족도 포기하고 얻은 직업적 성취가 후배들의 말 몇 마디로 공격받고 흔들리는 사상누각이었음을 깨닫고, 최연소 박사이자 인기 강사였던 마리(이하나) 역시 짧은 방송으로 한순간 모든 것을 잃고 아르바이트 인생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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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_ KBS 


“이 집엔 어떻게 남자가 하나도 없냐….” 두진(김지석)이 하는 말처럼, 이야기의 중심에서 상처 받고 흔들리는 사람들이 모두 여성이라는 것은 흥미롭다. 그들의 인생에 불현듯 나타난 암초가 단순한 개인적 고난이 아님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얼핏 악역처럼 보이는 장모란(장미희)과 나말년도 차별적 프레임 안에서 상처받은 여성이다. 모란의 약혼이 깨진 것은 첩의 딸이라는 투서가 날아들었기 때문이고, 말년 역시 남동생을 기원하며 말년이란 이름을 받았으나 어머니가 더 이상 출산을 하지 못 해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으며 자랐다. 약혼이 파기됐기에 모란은 철희(이순재)의 구애를 매몰차게 떨쳐내지 못했고, 어린 시절부터 차별받고 컸기에 말년은 아집과 편견을 버리지 못하고 나쁜 선생이 됐다. 상처의 연쇄는 얼핏 개인적 차원에서 발생한 문제처럼 보이지만 오랜 기간 존재했던 차별적 프레임의 문제라고 지적하는 것이다. “난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뭘 잘해 본 적이 없어. 모자란 딸이고, 처진 학생이었지. 그런데 아부지, 잘나지 못했다고 해서 그게 비난 받을 일인가요? 잘해 보고 싶었는데 안 됐어요. 나 같은 사람은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 현숙의 울부짖음이 마음을 울리는 것은 그래서다. ‘나 같은 사람’으로 치환되는 착하지 않은 여자들은 ‘세상’의 프레임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모르고 길을 잃는다.
 
이들이 세상을 향해 날리는 최초의 반항에서 드라마가 시작된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더 이상은 참지 않겠다, 내가 살아온 길이 어쩌면 다를 수도 있었다는 깨달음에서 그들이 여태 눌러온 에너지가 폭발한다. 착하지 않으면 실패한 것으로 취급되던 인생, 그들은 그래서 실패했지만 결코 그릇된 것은 아니었다는 각성은 뒤늦게 찾아온다. 국어사전에서는 ‘착하다’를 ‘언행이나 마음씨가 곱고 바르며 상냥하다’라고 정의한다. <착하지 않은 여자들>이라는 제목은 의미심장하다. 당연히 곱고 바르며 상냥해야 할 여성이라는 집합 속, 예외적 집단에 속한 몇몇에 대한 발고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곰곰 생각해 보면, 오히려 이 제목은 그들에게 씌워진 고약한 프레임에 대한 은근한 각성이다. 왜 착해야 하는가? 왜 곱고 바르며 상냥해야 하는가? 왜 착하다는 프레임이 오랜 기간 그럼직한 것으로 취급되어 왔는가? 프레임 밖에 선 개인에게 사회를 지배하는 고정관념이 어떤 형벌을 내렸는가? 드라마는 여태 당연하게 의식했던 사실에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열정으로, 항의로 프레임을 깨려다 주저앉은 그들을 조명함으로써 우리에게 묘한 감회를 불러일으킨다. 드라마 속 등장인물은 섣불리 누구도 선이라, 혹은 악이라 단언할 수 없고 그저 상처 받은 사람들일 뿐이다. 그들이 최초로 더 이상은 착할 필요 없음을 깨닫고 제 자리를 뻥 차고 일어서는 순간을 덤덤하고 명랑한 손길로 그려내기 때문이다.
 
물론 <착하지 않은 여자들>이 차별적 프레임이나 불공평한 시스템에 대한 사회적 고발은 아니다. 시스템의 영역에 대한 질문은 끊이지 않지만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행간에서 교묘히 제기된다. 각자의 문제는 철저히 등장인물 개개인의 관점에서 다뤄지고, 신기할 정도로 명랑하고 발랄하게 묘사된다. 모란의 가슴에 순옥(김혜자)이 발을 날리는 장면이나 퇴학당한 후 빗속에서 어린 현숙이 정신없이 춤을 추는 장면엔 해학이 넘친다. 지나치게 무겁거나 어두워지지 않고 삶의 고난과 환희를 절묘하게 오가며 극은 외줄을 탄다. 절망은 깊게 침잠하지만, 이후 터져나오는 에너지는 밝고 거세기에 시청자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안긴다.
 
상처 받은 여자들은 분연히 일어선다. 상처가 작용이라면 궐기가 반작용인 것처럼. 그 반동이 인간을 살게 하는 동력이 된다고 드라마는 말한다. 끝없는 절망과 무력보다는 가끔 분노가 사람을 일으키기 마련이다. 그들이 날리는 발차기가 후련한 것은 그 때문이다. 내가 이토록 상처 받고 힘들었다고, 더 이상 참지만은 않겠다는 선언이 아닌가. 아무리 힘들고 지쳐도 일단 일어서고 볼 일이다. 허공에 악다구니라도 한 번 지르고 나면 명랑하고 씩씩하게, ‘착하지 않아도’ 다시 걸을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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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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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르크 막스아이너, 미카엘 미르슈 공저/안인희 역9,000원(10% +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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