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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사의 세계

이성복, 김혜순, 최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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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성’이라는 단어를 지겨워하는 시대를 살고 있지만, 그래서 진정성이라는 말이 가장 진정성이 떨어지는 것처럼 괴롭게 들리지만, ‘진정성’이라는 말 뒤에 오는 ‘기교’라는 말은 꽝꽝 얼어붙은 냉동된 ‘진정성’이라는 단어의 진정성을, 도끼가 아니라 꼬집기로써 깨운다



격주 월요일, 시인 김소연이 읽은 책 이야기 
 ‘김소연의 내향적 삶을 옹호함’이 연재됩니다. 

 

 

 

 

 대체로 우리는 아픔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 몸 어딘가가 썩어 들어 가는데도 아프지 않다면, 이보다 더 난처한 일이 있을까? 문제는 우리의 아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아프게 하는 것들에 있다. 오히려 아픔은 <살아 있음>의 징조이며, <살아야겠음>의 경보라고나 할 것이다.


  정신의 아픔은 육체의 아픔에 비해 잘 감지되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 정신은 병들어 있으면서도 알아채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정신의 아픔, 그것만 해도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자신이 병들어 있음을 아는 것은, 치유가 아니라 할지라도 치유의 첫 단계일 수는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아픔만을 강조하게 되면, 그 아픔을 가져오게 한 것들을 은폐하거나 신비화하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자신을 속이지 않고 얻을 수 있는 하나의 진실은 우리가 지금 <아프다>는 사실이다. 그 진실 옆에 있다는 확실한 느낌과, 그로부터 언제 떨어져 나갈지 모른다는 불안한 느낌의 뒤범벅이 우리의 행복감일 것이다. 망각은 삶의 죽음이고, 아픔은 죽음의 삶이다.
   - 이성복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표사

 

80년에 이성복은 아프다는 사실을 아프게 발견하느라, 아프다는 사실만이 마지막 남겨진 단하나의 진실이라는 사실을 아프게 인정하느라, 아픔 곁에서 느끼는 온갖 느낌들을 삶의 환희로 아프게 받아들이느라, 필사적으로 아팠다. 그래서 가장 아름다운 시인이 되었다. 영원한 시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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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겐 기댈 기둥이 없다. 방이 없다. 벽이 없다. 집이 없다. 우리에겐 디디고 설 땅조차 없다. 없는 것은 다 있는데,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래서 우리의 발은 공중에 떠 있다. 아마도 유령인가 보다. 우리는 안개 담요를 덮고, 안개 신발을 신는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우리만 보면 나가라고 한다. 아마도 우리는 질병인가 보다. 질병이 살아 있으려면, 질병이 사랑하는 몸과 함께 죽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그런가. 우리는, 질병인 우리는, 사각형인 그들의 방에서 날마다 쫓겨난다. 우리는 물처럼 섞일 수 있지만, 물처럼 머물 수는 없다. 구름처럼 만나지만, 구름처럼 기약 없이 헤어진다. 우리에겐 지평선도 없고, 수평선도 없다. 우리는 없는 것으로 있다. 그래서 우리는 흐르는 세상의 시간 속엔 없고, 다만 시간의 틈 속에 있다. 균열 속에 있다. 위태로움 속에 있다. 명멸 속에 있다. 우리는 사랑처럼, 질병처럼, 그리고 이 시들처럼 이렇게 세상에 있다가 간다. 아니 없다가 간다. 그러니 모두 잘 있어라.
  - 김혜순 시집, 『한 잔의 붉은 거울』 표사

 

80년의 이성복의 표사와 2004년의 김혜순의 표사 사이에는 24년의 세월이 흘러 있다. 이미 질병인 우리가 어떻게 질병이 되었는지, 어디에서 사는지, 어떤 식으로 살아가는지를 간명하게 말해주었다. 이 세상에서 있다가 가는 게 아니라 이 세상에 없다가 간다고 말하였다. 없다가 가는 마당에, 이미 “잘 있어라”며 작별인사까지도 해두었다. 이미 질병인 우리 자신에 대하여 가장 당당했다. 어쩌면 이 덕분에 시는 질병처럼 아주 이상한 방식으로, 영원하게 번성할지도 모르겠다.       

 

  오늘날에도 김소월처럼 혹은 한용운처럼 시를 쓴다는 게 가능할 것인가. 물론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제는 가능한가 아닌가가 아니라, 그것이 시를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에게 재미있고 의미 있을 것인가이다. 


  시를 위해선 무엇보다도 진정성이 필요하겠지만 그러나 그보다는, 그 시대의 정신적 꼴의 어느 한 모서리와 분명하게 대응될 수 있는 진정성의 기교가 더욱 더 필요할 것이다. 진정성의 내용에 알맞는 진정성의 기교를 발견하지 못할 때 그 내용은 오히려 능철스럽고 철면피한 것이 되기 쉬운 것 같다.


  그러나 시에 대해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랴. 무슨 말도 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무슨 할 말도 없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무슨 말을 해도 시는 여하튼 존재한다는 배짱 혹은 체념 혹은 위안에서가 아니라, 그러나 시에 대해 무슨 말을 할 것인가.


  시에 대하여 말하기보다는 시로 하여금 말하게 하는 편이 훨씬 즐겁거니와, 적어도 당분간은 시 곁에서 아늑한 쉼표를 달아 주거나 아니면 시에게 아주 동그란 침묵의 금반지를 끼워 주고 싶다.
  - 최승자 시집, 『즐거운 일기』 표사

 

‘진정성’이라는 단어를 지겨워하는 시대를 살고 있지만, 그래서 진정성이라는 말이 가장 진정성이 떨어지는 것처럼 괴롭게 들리지만, ‘진정성’이라는 말 뒤에 오는 ‘기교’라는 말은 꽝꽝 얼어붙은 냉동된 ‘진정성’이라는 단어의 진정성을, 도끼가 아니라 꼬집기로써 깨운다. 그리고 “무슨 말을 할 것인가”에 대해 최승자는 능청스럽게도 한 단락을 할애한다. “시로 하여금 말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시에 대하여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시로 말하고 싶은 것을 시가 말하게끔 하는 것 아닐까. 시만이 말할 수 있는 것을 시로써 말하게 하는 것 아닐까. 시에 대한 입장이 아니라 삶의 대한 입장만이 시로 하여금 거짓말을 못하도록 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시인에게 나는 동그란 침묵의 금반지를 끼워 주고 싶다. 삶에 대해서만 말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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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소연(시인)

시인. 트위터 @catjuice_ 시집 <극에 달하다>, <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 <눈물이라는 뼈>, <수학자의 아침>과 산문집 <마음사전>, <시옷의 세계> 등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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