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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열에 대하여

김안 시집 『미제레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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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이 닿으면 시큼거렸던 것은 어금니에 균열이 갔기 때문이라고 했다



격주 월요일, 시인 김소연이 읽은 책 이야기 
 ‘김소연의 내향적 삶을 옹호함’이 연재됩니다. 

 


 

 

음식이 닿으면 시큼거렸던 것은 어금니에 균열이 갔기 때문이라고 했다. 균열이 제법 심하게 가서 두 동강이 나 있는데에도 앞뒤의 치아가 바로 옆에서 버티고 있어서 균열된 상태로도 꽉 아물려 있다고 했다. 균열되어 금이 간 채로 오래오래 사용해온 밥공기가 생각났다. 여행지의 도자기마을을 한참동안 맴돌며 기웃거리며 고르고 골랐던, 손수 처음으로 장만했던 내 밥공기였다. 설거지를 할 때마다 힘을 넣어 벌려보지만 멀쩡했다. 국 같은 걸 담아도 새지 않았다. 금이 간 밥공기는 그만 좀 버리라는 엄마의 애원에도 버릴 수는 없었다.

 

 언제고 쩍하고 갈라지는 날에는 그럴 줄 알았다며 버리게 될 것이었다. 어금니도 몇 번의 치과 방문 끝에 꽁꽁 싸맬 수 있게 치료를 하면 되는 일이었다. 실내가 너무 건조해서 몸통에 균열이 가버린 새 기타도 균열된 채로 소리는 별반 나빠지지 않았다. 나빠졌다고 해도 악기소리에 예민하지 못한 나로써는 차이를 느낄 수 없는 노릇이었다. 수리를 맡긴다면 적은 비용으로도 고칠 수 있다고 했다. 더 이상의 균열을 막기 위해서 기타를 제대로 보관하는 방법을 알아두었다. 어금니, 그릇, 악기. 이 세 가지의 균열과 함께 12월을 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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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명이 곤란한 균열에 대해서는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 할까. 언제부터 시작된 건지 알 수 없다는 점에서 어금니와 닮았고, 힘을 넣어 부숴보려 해도 부숴지지는 않은 채로 멀쩡하다는 점에서 그릇과 닮았고, 차이를 느낄 수 없다는 점에서 악기를 닮았다. 그런데도 균열이 감지가 된다. 그릇처럼 금이 보이는 것도 아니고, 어금니처럼 만져지는 것도 아니다. 다만, 어떤 말과 어떤 글에 현격히 반응하는 것으로써 나의 균열을 알아챈다. “말이라는 편리한 허구(‘구주’)”를 헐값에 사용해온 비애라고 해야 할까. 어째야 하는지를 알고 있지만 어쩌지 못하고 사는 일과 어째야 하는지를 도무지 모르겠는 일을 조금이라도 알겠다고 말하며 사는 일. 어쩌지 못함이 쌓이고 쌓여서 신음을 내뱉듯 문장을 적던 버릇들을 이미 지나쳐서, 할 수 있는 말은 오직 비명만 남아버린 듯한 나날들. 비명을 대신할, 비명과 흡사한, 비명에 가까운, 비명을 통역한, 아무튼 어떤 문장을 적으려 할 때마다 보고 있게 된다. “이젠 아무리 거울을 닦아도 내가 보이질 않네. 난, 보고 있네, 거울이 얼마나 느리게 깨어지고 있는지를, 거울 안에서 유황칠을 지우고 있는 내 손톱의 참담한 부드러움을.(‘검은 목련’)”

 

문학은 악몽과 현실 사이의 온도 차이에 맺힌 결로처럼 존재했다. 악몽보다 현실이 더 지독하다. 악몽의 내부에서 더 지독한 현실을 내다보며 문학은 겨우 지탱한다. 악몽을 기억하여 기록한다는 죄목, 악몽을 현실과 혼동한다는 죄목, “안락한 헛수고”와 “쓸모없는 지옥”(‘홀로코스트’)를 몸으로 모사한다는 죄목을 짊어진 채로 문학은 창문의 테두리를 타고 결로처럼 맺히곤 했다.

 

애도할 수 있을까
오늘 밤은 머리 위로 펼쳐진 속죄의 목록들이 무척이나 아름답구나
존재하지 않는 짐승과
사라져버린 사물과
죽은 영웅의 세계가 창백하게 얼어붙어 있구나
- ‘미제레레’ 부분

 

이제 시인은 이미 결로가 가득한 방안에 있지 않다. 감옥과도 같은 방안에서, 결로에 목을 축이며 균열에 대고 중얼대던 시절은 이미 다 지나가고 시인은 지금 바깥에 있다. 악몽보다 더 지독하게 추운 바깥에서 “왜 저 공중의 쓰기들이 물이 되어 내 귀에서 뚝뚝 떨어지고 있는(‘메멘토 모리’)”지를 묻다가, “바라보는 모든 곳마다 텅 비어 가네. 말을 할수록 내가 사라지는 것 같네.(‘자백의 기술’)”라고 자백하는 중이다. “말을 포기할 때 / 노래가 시작되(‘지빠귀를 시작할 것’)”는 때를 기다리는 중이다. 묻는 일과 자백하는 일과 기다리는 일, 이 세 가지 일을 하며 혹한의 세월을 지나고 있다. 썼던 문장이 내 귀로 되돌아오는 것에 대하여 묻고 있고, 했던 말이 나를 지우고 있다는 것을 자백하고 있고, 말을 포기할 때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니까, 말의 무력함과 말의 무용함과 말의 허구성과 말의 폭력성에 대하여 대항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말을 버리기 위하여 안간힘을 다해 발명을 하고 있는 것이다.

 

어제의 당신이 내일의 당신이지는 않을 것이다. 수많은 왕들의 목을 자르고, 수많은 신도들을 불태웠어도, 새로운 시대는 늘 익숙한 맹신과 내세로밖에 스스로를 지키지 못한다. 지금이 아닌 모든 어제들은 죄악이고, 지금이 아닌 모든 내일은 궁형. 당신이 지금 여기에 있다는 것은, 지금의 당신은 나의 가장 강한 선이자 윤리. 거대한 자목련들이 들쥐들을 잡아먹듯, 나는 당신의 손을 잡고 나의 윤리, 나의 선에게 이 늙은 입을 건넨다. 갈까, 우리 저 더러운 말의 세계로; 천장과 바닥 사이에 숨어 있는 어제의 책들, 어제의 약속들, 어제의 깃발과 외침들로, 죽은 쥐의 꼬리를 들고 빙빙 돌리다가 벽을 향해 내던지는, 천사들의 이름만 같은 아이들의 순진무구함처럼 어제의 대기와 어제 흘린 피는 악의 없이 망각된다. 새로운 시대는 망각의 사업에 힘쓰고 창문 밖의 공포가 진실과 정의들을 재생산하고, 침묵이 소비된다. 그러니, 우리 갈까, 저 더럽고도 시끄러운 말의 세계로. 아무렇게나 해봐. 부끄럼도 두려움도 없구나, 지금만은, 당신은, 당신이라는 허상은. 하지만 허상은, 숭고한 어제의 허상들은 몸 없이도 진저리 치고. 
   - '국가의 탄생’ 전문 

            

이제 다시 거처를 옮기게 될 것이다. 더럽고 시끄러운 말의 세계로 가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더럽고 시끄러운 말의 세계는 또 얼마나 참담할까. 말에 관하여 가장 귀족이었던 자들이 기거하기에 그런 말들은 또 얼마나 모멸스러울까. 균열이 무늬가 된 불구의 방. 찬바람이 들어올 것은 문제가 아니다. 새어나가는 것들과 얼어붙고 말 것들, 그것들과 동거하는 새로운 윤리는 너무 늦게 발견될 것이다.  

 

우리의 배가 침몰하고 있는데
여전히 우리의 머리 위에서는 별들이 춤추고 있네
다리 뻗을 공간도 없는 방에서 우리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가라앉고 있는 우리의 배에서 이제 막 태어난 아이들의 악몽을 보고 있지
그런데 마지막까지 문을 열어놓고 나간 건 누굴까,
찬바람이 들어오잖아,
우리의 머리 위로 내려온 불안한 천국이 새어나가고 있어
일어나 봐, 문을 닫자
그런데 불구로 가득 부풀어 오르는 등
평생을 고아나 불구의 마음으로 살 수는 없는데


이제 우리는 영영 가족이 되어야만 하지
- ‘불가촉천민’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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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제레레김안 저 | 문예중앙
자폐적인 독백이며, 절망”이자 “신적 황홀로 가득한 언어들”(박상수 시인, 문학평론가)로 고유한 서정성을 펼쳐온 김안 시인의 두 번째 시집 『미제레레』(문예중앙시선 034)가 출간됐다. 이 국가, 이 도시의 시민인 시인은 자신이 복무하고 있는 쓰기와, 그에 요구되는 온갖 윤리들에 정면으로 부딪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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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소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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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제레레

<김안> 저7,200원(10% +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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