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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눈의 시간

첫눈은 잠들 때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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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해의 많은 연인들처럼 올해도 연인들은 겨울 문턱 즈음에는 ‘첫눈’을 기다리며, 첫눈 내릴 때 만날 장소를 약속해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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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가 함돈균의 에세이 <시간의 철학>이 매주 화요일 연재됩니다.

시간과 날짜에 대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 다르게 생각해보면 좋을 것들을 철학적으로 풀어봅니다.

 

 

“첫눈 내릴 때 거기에서 만나!” ‘첫눈’이라는 말은 있어도 ‘첫비’라는 말은 없다. 여느 해의 많은 연인들처럼 올해도 연인들은 겨울 문턱 즈음에는 ‘첫눈’을 기다리며, 첫눈 내릴 때 만날 장소를 약속해 놓는다. 처음 우연히 마주쳤던 길거리, 처음 연애를 시작할 때 만났던 그 카페, 싸움을 하고서 화해를 할 때 거닐었던 어떤 동네의 오래된 계단 앞. 도심 한 가운데 큰 서점 입구일 수도 있다. 조금 무모한 연인들은 아예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움직이던 도시를 떠나 그들이 보았던 가장 아름다운 설경이 펼쳐지던 숲이나 풍경 소리가 설경과 하나가 되는 산사의 일주문 앞을 약속하기도 한다. 실제로 첫 눈이 내리자 각자가 있던 자리에서 하던 일을 즉시 멈추고, 먼 곳의 약속된 숲으로 떠나는 연인들의 얘기를 주위에서 들은 적이 있다.


왜 사람들은 비가 아니라 눈을 기다리는가. 왜 ‘첫비’라는 말은 없는데, ‘첫눈’이라는 말은 있는가. 첫눈은 최초의 약속이다. 모든 최초의 약속은 깨끗하다. 그러므로 그 약속을 떠올리는 것은 일상이라는 이름의 관성을 중단시킨다. ‘첫눈’은 최초의 다정한 기억들로 우리를 불러들인다. 그것은 사소한 것들에 관한 얘기들, 작은 것들로 이뤄진 이미지들이다. 한 연인이 맞을 그들만의 크리스마스 파티, 작은 손을 호호 불며 까먹던 군고구마와 사랑스러운 입술에서 나오는 하얀 입김, 선물로 건네던 빨간 벙어리장갑, 놀이터로 소리를 지르며 뛰어나오는 아이와  강아지. 하얀 색 도화지 같은 길 위에 함께 찍힌 오른발 왼발과 그로 인해 평소에는 몰랐던 신발 바닥의 무늬. 


하지만 첫눈을 약속했던 연인들이, 또는 친구들이 동시에 함께 첫눈을 보는 일은 가능한가. 첫눈은 우리가 모를 때 내리는 경우가 많다. 아침 뉴스를 보고서야 어제 새벽 모두가 잠든 사이에 흰 눈이 내렸다는 사실을 안다. 첫눈은 대개 흩날린다. 첫눈은 몇 분 사이에 사라진다. 지난 새벽 잠들지 않았던 누가 그것을 보았다고 한다면 그것은 축복이다. ‘처음’을 보았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바로 사라지는 환영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대기 중에 흩날리다가 땅에 내려오는 순간 바로 녹아버리는 이 시간은 세상의 시간 중에 가장 연한 시간이다. 보았지만 흔적이 남지 않으므로 그것은 물질로 소유할 수 없는 비밀, 찰나에서 탄생되는 순진한 비밀의 시간이다. 첫눈의 설렘에는 그래서 어떤 덧없음의 실루엣이 어른거린다. 

 

 
눈을 뜨면 사라지죠

아주 늦은 밤 하얀 눈이 왔었죠
소복이 쌓이니 내 맘도 설렜죠
나는 그날 밤 단 한숨도 못 잤죠
잠들면 안돼요
눈을 뜨면 사라지죠

어느 날 갑자기 그 많던 냇물이 말라갔죠
내 어린 마음도 그 시냇물처럼 그렇게 말랐겠죠

너의 모든 걸 두 눈에 담고 있었죠
소소한 하루가 넉넉했던 날
그러던 어느 날 세상이 뒤집혔죠 다들 꼭 잡아요
잠깐 사이에 사라지죠
- 서태지, <소격동> 中

 

하얀 눈이 보여주는 찰나의 이미지는 설렘과 동시에 망각의 안타까움을 동반한다. 그런 점에서 모든 눈은 ‘첫눈’이다. “눈을 뜨면 사라지”기 때문이다. 하얀 눈은 공중에서 날려 땅으로 떨어지지만 공간적 경험이라기보다는, 순간적으로 출현했으나 다시 존재하지는 않는 덧없음의 체험, 붙잡을 수는 없는 것에 대한 시간 체험이다. “나는 그날 밤 단 한숨도 못 잤”다는 이 가사에는 이런 시간 체험의 복합성이 스며 있다. 하얀 눈에 대해 유난히 연인들이 애틋함을 가지는 것은 왜인가. 어쩌면 그들의 무의식이 사랑의 설렘에 내재한 아이러니한 복합성을 감지하고 있기 때문은 아닌가. 서태지의 <소격동>은 이 복합성을 “잠들면 안돼요” “너의 모든 걸 두 눈에 담고 있었죠”라고 말한다.


간절한 것들은 현실 공간에서 지속되기 어려운 눈의 이미지처럼 아토포스atopos(비존재 공간)적이다. 그래서 그것은 아른거리며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실루엣의 형상을 하고 있다. 이 아슬한 이미지는 존재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을 교차시키며, 찰나적인 것으로 드러난 것의 망각의 문제를 안타까움을 넘어 공포의 체험으로 바꾸기도 한다. 예컨대 사랑의 첫 약속만으로 황량한 세상을 천국처럼 살기도 하는 어떤 연인들에게 이 약속의 망각이야말로 그들의 현실을 지옥으로 만들게 하는 것일 수 있지 않겠는가. “잠깐 사이에 사라지”는 약속의 망각이 어찌 두렵지 않으랴. “어느 날 세상이 뒤집”힌 경험은 이 가사에서 모종의 정치적 폭력에 대한 암시로도 충분히 읽힐 수 있지만, 소복하게 쌓이던 흰 눈을 보던 연인들의 시간이 녹아 없어지는 망각에 대한 공포로 읽는다고 해도 별 무리가 없다. 

 
하지만 존재하는 것들의 목숨은 생각보다 끈질기다. 세상의 공간에서 사라져도 존재했던 것들은 살아남는다. 어떻게? 기억 속에서 말이다. 흰 눈의 시간에서 문제되는 덧없음은 궁극적으로는 흰 눈이 내렸던 시간을 망각하는 일과 관련된다. 공간을 점유하는 모든 물리적 실체들도 존재의 무한한 시간성에서 보면 실은 흰 눈처럼 찰나적이다. 무한한 존재의 관점에서 보면 한 인간의 생, 만인들의 역사의 시간조차 “잠깐 사이에 사라지”는 것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하는 것, 존재했던 것들은 계속 살아있을 수 있다. ‘잠들지 않는 시간’ 속에서, ‘두 눈에 담고 있는 시간’ 속에서 유한한 존재가 지속되는 기적이 일어난다. 진정으로 사라지는 일은 공간 속에서의 소거가 아니라 망각, 시간이 더 이상 지속되지 않는 일이다. 그래서 시인 김수영은 서태지의 생각에 동의하면서 이를 다른 방식으로 얘기했다.

 

눈은 살아있다

눈은 살아 있다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마당 위에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 위에 대고 기침을 하자
눈더러 보라고 마음 놓고 마음 놓고
기침을 하자

눈은 살아 있다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과 육체를 위하여
눈은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있다
- 김수영, <눈> 부분

 

“눈은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있다”는 말은 새벽이 지나도록 (단순히) 눈이 녹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다. 새벽에 흩날리던 이 눈 역시 볕이 쬐이면 녹아버릴 찰나적 운명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것은 모든 존재의 운명이다. “눈이 살아있다”는 사실은 시각적(공간적) 경험이 아니라 시간의 경험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존재의 가장 깨끗한 시간을 기억하는 동안 눈은 시인의 마음에 녹지 않고 ‘살아 있으며’, 그것은 새벽을 관통하여 시인의 영혼을 죽지 않게 만든다. 눈이 내리던 설렘의 시간을 망각하지 않을 때, 눈도 살아있고, 눈을 보던 시인도 살아 있다. 사물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이 연결되는 공동시간의 신비가 열린다. 모든 존재에게 삶과 죽음은  생물학적 층위를 넘어서는 기억의 시간성 문제가 개입되어 있다. 서태지가 소격동에 내린 한밤의 눈을 기억했듯이, 눈 위에 대고 하는 ‘젊은 시인의 기침’은 시로 깨끗한 기억을 지속시키고, 이를 통해 죽음을 이기는 문학적 순간에 대한 이미지다.


그러나 비타협적 리얼리스트인 김수영은 이 기억의 문제를 매끄러운 방식으로 낭만화하지 않는다. 그는 왜 하필 ‘기침’이라는 탈낭만적 이미지로 눈의 시간과 만나려 하는가. 자식을 잡아먹는 시간의 신 크로노스처럼 시간의 죽음인 망각이야말로 우주적 엔트로피의 ‘순리’이다. 바꿔 말해 존재를 살아 있게 하는 기억은 능동적으로 의지해야만 지속되는 ‘시간적 운동’이다. 서태지가 저 가사에서 ‘잊지 않기 위해 애를 쓴다’고 할 때 그도 이 어려움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김수영의 시에서 ‘기침’은 이 기억의 지속에도 투쟁이 필요하며, 이 투쟁 역시 모든 생생한 살아있음이 감당해야 하는 고통스러운 노력에서 예외일 수 없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의 약속도, 인간의 역사도 “눈 덮인 무덤들 속에서 마침내 그의 것을 찾아”(한강, 소년이 온다』)내어 그 정수를 망각하지 않는 의지적 행위이다. ‘아직’ 공간성을 확보하지 못했거나 ‘이미’ 공간성을 상실한 존재가 죽음을 이기는 기적은 이럴 경우에나 비로소 가능하다. 여기에서 얄팍한 현실의 시간은 과거와 닿고 미래에 열린 다른 차원의 시간의 두께를 확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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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함돈균(문학평론가)

문학평론가이며,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 한국문학 속에 나타난 전위적 감각과 윤리를 탐구하는 연구·비평·강의에 매진하고 있다. 인문정신의 사회적 확산과 시민적 공공성을 확보하기 위해 ‘실천적 인문공동체 시민행성’을 기획하여 공동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매일경제신문에 문명의 무의식과 시대정신을 사색하는 <사물의 철학>이라는 인문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문학평론집으로 《예외들》, 《얼굴 없는 노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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