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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대만에서 좋다 말았네

장기하와 얼굴들 「좋다 말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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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뒤돌아보니 좋다 말았던 기억이 한두 개가 아니다. 물론 「좋다 말았네」의 노랫말처럼 연애 문제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춥고 외로운 겨울 날씨에 굳이 연애사를 쿨쩍이긴 싫고, 오늘은 좀 따뜻하게(?) 좋다 말았던 기억 하나를 반추해 본다.

올해 늦여름, 책 원고를 마감한 어느 날 굉장히 싼 타이페이행 특가 항공권을 발견했다. 두뇌의 판단력 파트에서 꺄르륵 소리가 났다. 한 번쯤 대만으로 들이대고 싶었는데 이게 웬 기회냐, 즉시 예약해버렸다. 좌석도 나를 위해 오롯이 한 자리 남아 있었고 어째서인지 내 카드 한도도 딱 남아있었다. 비행기는 바로 다음 날 출발이었다. 나는 휘파람을 불며 짐을 쌌고, 룰루랄라 즉흥적인 여행을 떠났다. 공항 가는 길엔 선선한 가을 날씨가 도래해 있었다. 나는 산뜻한 가을여행 기분으로 개꼬리처럼 신났다. 다만 옆자리에 여자가 앉길 바랐지만 그런 일은 나에게 있을 수가 없다는 듯 어떤 스님이 털썩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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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비행기는 저비용 항공사가 운항하는 노선이었는데 기내식으로 삼각 김밥과 떠먹는 요구르트가 나왔다. 나는 떠먹는 요구르트 뚜껑을 뜯었다. 그런데 내가 마침 뚜껑을 핥기 시작했을 때 옆자리 스님이 공교롭게도 동시에 뚜껑을 핥기 시작해 우리는 서로 눈이 마주쳤다. 뭔가 어색했다. 어쩐지 누구든 먼저 말을 걸어야만 할 것 같았다. 


 “보아하니 스님께선 대만에 가시는 길인 것 같군요.”

 

 “그렇소이다. 난 대만에 살고 있어요.”


 스님은 젊고 잘생겼고 두상이 매끈했으며 내가 유머를 썼다는 걸-대만행 직항이니까 당연히 대만 가겠지-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꽤 진지한 사람이었다. 불가에 귀의하지 않았다면 중학교 도덕 선생님이 되었을 법한 인상이었다. 그는 잠시 눈을 깜빡거리더니 경을 읽는 것처럼 웅혼한 목소리로 내게 질문을 던졌다. 


 “대만엔 어인 일로 가시오?”


 “놀러 가요. 신나는 휴가죠.”


 “지금은 몹시 덥고 습할 텐데요.”


 “그런가요? 땀나게 잘 놀면 좋죠.”


 “허어, 진짜 덥고 습할 거요.”


 뭔가 중생을 가엾게 여겨 법문을 내리는 것 같은 스님의 표정을 보자 갑자기 어지러웠다. 일주일 넘게 밤샘작업을 한 직후였다. 진이 빠져 몸도 마음도 유머감각도 지친 상태이긴 했다. 과연 이런 컨디션으로 더운 나라 여행이 가능할까? 그냥 집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쉬는 게 옳지 않나 싶었다. 하지만 그건 안 웃기잖아. 나는 가급적 많이 안 돌아다니고, 호스텔에서 친구를 만들어서 맥주나 마시면 된다고 수습했다. 더울 때 마시는 시원한 맥주가 그게 또 으아~ 그런 상상을 하며 좋은 기분을 유지했다.

 

 그런데 송산 공항에 내려 공항 청사 바깥으로 몸을 내밀자마자 아주 후끈한 열기가 다짜고짜 나를 꽉 껴안았다. 더위가 어찌나 야무지게 끌어안는지 내가 한류스타라도 된 느낌이었다. 아미타불. 스님의 말은 뻥이 아니었다. 우리나라 폭염의 초강력 업그레이드 버전이었다. 두어 발짝 움직이자 이마에서 땀이 주르륵 흘렀다. 더운데 다리가 떨리긴 처음이었다.

 

 이번 여름, 에어컨도 없는 한국의 내 자취방이자 작업실에서 무더위 때문에 어지간히 고생했다. 원고를 쓰는 시간보다 선풍기를 껴안고 자빠지거나 찬물 샤워를 하는 시간이 더 많았다. 힘을 내려 해도 매미들의 샤우팅 떼창 때문에 좀처럼 집중하기 어려웠다. 마감 날짜를 얼마 안 남긴 시점에서 더위가 조금 수그러들지 않았다면 절대 원고를 끝낼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이성을 유지하기도 힘들었을 거다.

 

 그런데 그 더위에서 겨우 해방되자마자 찜통인 나라에 제 발로 찾아온 것이었다. 군대에서 전역했는데 다시 입영 영장을 받는 것과 마찬가지인 행위를 해버린 셈이었다. 맞은 데 또 맞는 것처럼 아팠다. 특가 항공권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지, 날씨가 어떨 건지는 전혀 생각도 못한 바보는 긴팔 차림으로 온몸에 딱 달라붙는 더위를 느끼며 눈물인지 땀인지 뭔가 주체할 수 없는 것을 흘려대야만 했다.

 

 여행가방을 끌고 지하철역에서 숙소를 찾아가는 동안 청바지와 팬티가 몸에 찰싹 달라붙어 걷기도 힘들었다. 스마트폰 GPS도 더위를 먹었는지 자꾸 내 위치를 뻥쳐 길을 헤맸다. 바보구나. 바보 맞네. 어이 바보. 나는 반복적으로 스스로를 힐난했다. 나중엔 탈수 상태라 그럴 기운도 없었다.

 

 어렵게 찾아간 싸구려 호스텔은 바깥보다 더 더웠다. 에어컨은 먹통이었다.  


 “헉헉, 살려줘요. 에어컨이 켜지질 않아요.”


 “낮에는 냉방 안 됨. 다들 관광 나가니까. 에너지 절약.” 

 

 리셉션 직원이 부채질을 하며 단호박을 잘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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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이 빠져 휴양 왔으면 호텔이라도 예약할 걸 왜 호스텔을 선택했는지 나는 또 스스로를 욕했다. 이국의 낯선 도시에 놀러왔다는 들뜬 마음은 땀에 섞여 배출되고 하나도 남지 않았다. 찬물에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지만 아이고 아무 의미가 없었다. 도미토리도 찜통, 밖에 나가도 찜통인 진퇴양난의 상황. 나는 할 수 없이 길에서 아무 버스에나 올랐다. 다행히 버스 안은 시원했다. 어디로 가는지는 몰라도.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좋다 말아버린’ 표정으로 허탈해 했다. 여행하는 동안 느닷없이 허리가 아팠지, 두통에 시달렸지, 맥주마저 맛없어 망연자실했지, 밤엔 에어컨이 너무 세 떨면서 억울했지, 유명한 망고빙수 가게를 안다던 중국인 룸메이트는 방향치였지…. 정말 잘 놀 줄 알았는데 아 좋다 말았다. 


 그래도 지금 방이 몹시 추운데, 더워서 바보 됐던 기억을 떠올리니 조금은 훈훈하다. 지나고 보면 힘들었던 것도 다 추억이 되니 좋다 말았어도 결국 좋다.

 

 오늘의 선곡인 장기하와 얼굴들의 음악을 들으며 원고를 쓰고 있자니 문득 그 대만 여행을 떠나던 순간처럼 신이 난다. 나같은 산울림 마니아에게 그들만의 특이한 사운드를 재해석해 들려주는 듯한 아스라한 추억의 맛은 매콤하다. 옛날 록 마니아인 ‘양평이형’의 싸이키델릭한 기타 톤과, 베이스의 달리는 리프, 해먼드 오르간소리의 조화로움은 한국 록이 한창 뜨거웠던 시절을 현재형으로 만든다. 거기엔 가슴으로 직통하는 후끈한 매력이 있다. 더구나 장기하만의 특별한 창법과 신선한 노랫말까지, 어우 매력적인 요소가 정말 많은 음악들이 고마워 땀이 다 나네.

 

그러고 보니 장기하와 얼굴들의 음악은 뭐 언제 들어도 ‘좋다 말았던’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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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박상 (소설가)

소설가. 장편소설 『15번 진짜 안 와』, 『말이 되냐』,『예테보리 쌍쌍바』와 소설집 『이원식 씨의 타격폼』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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