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미 “거리로 나와 자유를 외친 경험은 소중한 자산”
『청동정원』 최영미 소설가
『서른, 잔치는 끝났다』로 일약 스타 시인이 된 최영미 시인. 그녀가 두 번째 장편 소설을 냈다. 『청동정원』은 많은 사람의 기억에서 아련해져가는 1980년대를 다룬 작품이다.
대한민국 헌법 1조에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는 표현이 등장한다. 민주공화국은 주권이 국민 전체에 있는 국가를 뜻한다. 대한민국은 1948년 세워졌지만, 민주공화국으로 서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1987년 직선제로 개헌하기 전까지 대한민국은 불완전한 민주공화국이었다. 무엇보다 국민은 지도자를 직접 선출할 권한이 없었다. 많은 국민들이 끈질기게 요구한 끝에 대한민국은 직선제로 가는 역사를 열었다.
최영미 작가가 쓴 『청동정원』은 뜨거웠던 시대,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한 장편소설이다. 이 시기에 한국 경제는 고도성장을 달렸고, 아시안게임과 서울올림픽 등 굵직한 행사를 치렀지만 정치적인 자유는 허락되지 않았다. 주로 대학생들이 민주주의를 요구하며 시위에 앞장섰다. 이 시기 많은 대학생에게 익숙한 장소는 강의실보다는 집회 현장이었다.
『청동정원』의 주인공 애린은 1980년대 신입생이 된다. 개인주의 성향이 강했고 문학소녀였던 그녀는 집단주의가 강했던 대학문화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고 겉돈다. 『청동정원』의 매력은 여기에 있다. 애린의 주변부적 성향 덕분에 1980년대는 오히려 더 입체적으로 묘사된다. 만약 애린이 투쟁의 전면에 나선 투사였다면 이런 객관성은 떨어졌을 것이다.
『청동정원』의 또다른 매력은 저자가 시인 최영미라는 점이다. 이미 그녀는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로 매력적인 언어를 보여준 바 있다. 시대적 배경이 어둡긴 하지만 최영미 시인의 아름다운 문장으로 복원된 1980년대는 마냥 암울하지만은 않다. 그 시절에도 사랑이, 낭만이, 웃음이 존재했다.
젊은이 어깨에 시대의 짐이 얹힌 시대, 1980년대
제목인 『청동정원』은 어떤 의미인가요.
지금 우리는 철기시대를 살고 있지요. 소설을 쓰며 저는 1980년대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2014년에 돌아보니, 1980년대가 마치 청동기 시대처럼 아득했어요. 쇠붙이로 무장한 전경들이 교정의 푸른 나무들과 겹쳐지는 풍경이 바로 ‘청동정원’이지요. 물론 은유적인 표현입니다.
1988년 여름, 원고지에 처음 소설을 끼적였어요. 쓰고자 하는 마음이 앞섰습니다. 무엇을 써야 할지는 어렴풋했지만 어떻게 써야 하는지 감을 잡지 못했지요. 그 뒤 틈틈이 메모는 계속했지만 바싹 긴장하고 달려들 엄두가 나지 않았어요. 그러다 시인이 되었고, 소설보다 시와 산문을 주로 썼습니다. 그럼에도 소설 쓰기에 대한 욕망의 불이 꺼지지 않았어요. 50대에 들어서면서 노안이 와서 눈이 점점 나빠지는데, 더 늦기 전에 그때 그 시절의 열망과 좌절을 글로 남겨놔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일 텐데요. 프로필에 적힌 선생님의 이력을 보면 주인공 애린과 상당히 닮아 있습니다. 그래서 자전적 소설로 읽는 사람도 있을 텐데요. 그런데 책에는 전적으로 허구라고 썼습니다.
물론 제 경험이 녹아있긴 합니다. 그렇지만 주인공 애린과 최영미는 동일인물이 아니죠. 사실, 제 이야기를 하더라도 30년 전 이야기를 어떻게 꼼꼼하게 기억하겠어요. 세부적으로는 다 허구에요.
고유명사의 한두 글자만 바꿔서 진실과 허구를 기묘하게 뒤섞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이름을 살짝 비튼 이유가 있나요.
명예훼손 걸리면 안 되니까요. 출판사 다닌 것도, 출판사 다니면서 시 써서 등단한 것도 사실이에요. 억울한 건 추석 전에 관둬서 상여금을 못 탔다는 점이죠. (웃음) 이렇게 이름을 바꾸고 나니, 자유로워서 묘사를 더 마음껏 할 수 있어요. 자유롭게 쓸 수 있다는 점에서 소설이 좋죠.
최근에 S대를 방문해 도서관의 카페에서 차를 마신 적이 있다. 내 앞에 앉아 빵 봉지를 뜯는 남학생은 한참 어려 보였다. 1학년인지 2학년인지 가늠되지도 않았다. 저렇게 어린 애들이 뭘 안다고 민주주의를 외치고 혁명을 논했는지. 젊디젊은 우리의 어깨가 왜 '독재타도'와 '직선제 개헌'이라는 무거운 시대의 짊을 짊어졌는지...... 군부의 총칼에 맞서 돌멩이를 들고 싸우던, 겁 없는 젊음이 역사를 바꾸었다. (160쪽)
1980년대 이후의 이야기도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1980년대를 그린 소설입니다. 1980년대를 기억하는 선생님의 심정이 S대 카페에서 빵 봉지를 뜯는 대학생을 보던 장면에서 느껴졌는데요. 선생님이 바라보는 1980년대는 어떤 시기였나요.
기껏해야 22세 정도 되는 앳된 젊은이의 어깨에 시대의 짐이 얹혀졌잖아요. 지금 우리는 선거를 통해 대통령 뽑는 게 당연하지만 그 당시에는 선거 자체가 없었어요. 체육관 선거만 있었죠. 어른들이 잘못한 건데, 그들은 생업에 종사하느라 해결 못하니 젊은이들이 나섰죠. 당시 젊은 세대들은 운동하느라 청춘의 절반이 날라갔어요.
지금 젊은 세대가 보기에 쉽게 공감이 가지는 않는데요. ‘왜 그렇게까지 열심히 했을까?’ 하는 의문도 들 것 같아요. 만약 그때 대학생의 저항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지금도 군부가 독재했겠죠. 그들이 순순히 권력을 내려놓았겠어요? 지금도 기억이 선명한데, 6월 항쟁 때 100만 인파가 보름간 매일 시위했어요. 서울 도심을 점거하다시피 하니 노태우가 6.29 선언해서 직선제 하겠다고 했잖아요. 그때 그렇게 못 했다면 지금도 우리는 아프리카나 동남아처럼 군부가 20~30년씩 통치했을 겁니다.
1980년대 대학생의 삶
소설이 1980년대를 다루니, 오늘은 1980년대 이야기를 많이 할 것 같습니다. 애린의 어린 시절 이야기가 나와요. 그때는 지금처럼 사교육이 흔하지 않았고, 경쟁도 그리 치열하지 않을 것 같은데, 아니더라고요. 애린은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정말 치열하게 공부했던데요.
1981년부터 일시적으로 본고사가 없어지긴 했지만, 당시에는 본고사가 있었어요. 예비고사 점수로 학교를 지원합니다. 본고사에는 논술 식으로 3~5문제를 푸는데, 압박이 엄청나요. 애린이도 수학 5문제 중 이해할 수 있는 게 한 문제밖에 없을 정도로 문제도 엄청나게 어려워요. 그러니까 열심히 안 하면 대학에 못 갔죠. 불쌍하죠. 고등학교를 입시벌레처럼 살았으면, 대학 가면 좀 여유롭게 살아야 하잖아요. 기타 치고, 놀러가는 낭만을 기대했는데, 대학은 전쟁터였습니다. 배경으로 나오는 S대 학생은 대부분 애린이처럼 공부했어요. 새벽 4시에 일어나고, 깨어 있는 시간에는 정말 미친 듯이 공부했죠.
많은 부분에서 자유가 허용되지 않았던 어두운 시절이었습니다. 당시 대학생은 어디서 위안을 얻었나요.
연애를 해야 하는 건데, 애린이는 연애를 하면 안 되는 줄 알았고. (웃음) 위안은 주로 술이었어요. 당시는 취미를 묻는 것조차 부르주아로 여겨졌으니까요. 요즘 학생들은 1980년대 분위기를 잘 모를 텐데, 이 책을 좀 읽어봤으면 좋겠어요. 이애린은 그 당시에는 드문 개인주의자였는데, 지금 대학생은 대부분 개인주의자라고 하더라고요.
요즘 대학생에 비해 1980년대는 왜 그렇게 치열했을까요.
요즘은 시대가 달라졌죠. 명백히 보이는 적도 없고요. 우리 때는 교문에서부터 중무장한 전투경찰이 진을 쳤어요. 1980년 5월부터는 전경과 학교를 같이 다녔죠. 늘 닭장차가 수십 대 서 있고, 학교 안에도 사복경찰이 많았어요. 대학생처럼 스포츠머리 하고, 조다쉬 청바지 입었지만, 티가 나죠. 1980년 5월에 5.17이 터지기 전에 미리 각 대학 학생회를 덮치고 기숙사 점령한 걸 보면, 군부 정권이 광주 사람들의 데모가 심해서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하는 건 거짓말이에요. 극본은 짜여져 있었죠.
왜 학생이 전면에 나설 수밖에 없었느냐 하면, 대학생은 적어도 학생 시절에는 취업으로부터 자유롭잖아요. 공부를 많이 하니 사회 문제를 자각하고요. 무엇보다 조직된 집단이죠. 당시에 가장 잘 조직된 집단은 군부와 학생이었습니다. 군부는 조직 그 자체고, 대학생도 저절로 만들어지는 집단이잖아요. 군부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집단이 대학생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짧은 시간에 가장 많이 동원할 수 있는 조직은 대학생이죠. 회사원, 고등학생이 나서겠어요?
소설에 R, 그러니까 혁명이 자주 등장합니다. 그 시절 정말로 혁명을 믿었나요.
사회주의가 아니라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으로 운동한 사람이 많았다고 지적하는 서평을 읽었는데요. 옳은 지적이에요. 하지만 당시 많은 사람이 혁명을 믿었어요. 전두환 집권이 말기로 갈수록 탄압이 더 심해졌거든요. 녹화사업도 있었고요. 학생들은 탄압이 심해지니까 더 혁명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죠. 그리고 원래 젊은이는 점진적인 변화보다는 빠른 변화, 혁명에 경도되잖아요.
1980년대는 우리의 소중한 자산
2002년 월드컵과 1987년 6월을 병렬적으로 회상하는 장면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젊은 세대가 이해 못할 수도 있는 대목인데요. 6월항쟁 이후로, 서울 한복판에 가장 많은 군중이 모인 게 2002년 월드컵입니다. 1987년 때도 광화문 도심에서 집회가 있었죠. 100만 넘는 사람이 매일 거리로 나갔어요. 해방구였죠. 모르는 사람과 어깨 걸고 구호 외치고 음식도 함께 먹고, 상인들도 나중에 동참해서 음식 갖다 줬어요. 평생 잊혀지지 않는 기억이에요. 2002년 월드컵도 겉으로는 비슷해요. 구호가 ‘대한민국’, ‘필승 코리아’로 달라졌지만요. 귀만 막고 봤다면, 시각적으로는 똑같아요. 대한민국에는 군부독재를 시민이 이겨낸 자신감이 있어요. 옆 나라 일본만 봐도, 일본은 자민당이 반영구 집권하고 있잖아요. 영국도 마찬가지로 지금도 왕이 존재하고요. 우리는 4.19부터 지난한 혁명의 역사였죠.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자유를 외친 경험은 소중한 자산입니다.
민주화 투쟁을 그리는 한편 부동산과 중산층 형성 과정도 조금은 묘사를 했습니다.
중산층에게 약간의 떡고물을 넘겨주면서 정권 유지를 했죠. 부동산도 띄웠고요. 그 결과, 후유증도 커요. 전부 아파트잖아요. 이런 나라가 어디 있나요. 다 빚더미고요. 멀리 보자면, 전두환 정권의 유산이에요.
자전적인 소설이기도 해서, 다 쓰고 나서 다시 읽으면 기분이 오묘하겠습니다. 원고를 다 쓰면 바로 편집자에게 넘기고 다시는 안 보는 편인가요, 아니면 여러 번 반복해서 보시나요.
넘기기 전에 10번은 봤죠. 제가 문장에 관해서는 완벽주의에요. 문장을 외울 정도로 여러 번 보거든요. 그래서 이 소설은 보기가 징그러워요. 너무 많이 봐서요. 좀 시간이 지나서 읽으려고 해요.
오랫동안 고민해서 쓴 작품입니다. 그래서 이 작품 전후로 문장이 바뀔 것도 같은데요.
바뀔 것 같아요. 이 작품만이 아니라 시집이나 소설을 낼 때마다 제가 조금씩 바뀌었어요. 낙천적이고 긍정적으로 변해온 듯합니다.
어두운 1980년대였지만 즐거운 추억도 있지 않나요.
1980년대라고 살벌했던 것만 아니에요. 1981년 가을에 교내시위 중에 애린이 잡혀가죠. 열흘 구류 받아 유치장에 있는데, 간수도 심심하니까 노래를 시켜요. 남학생 다 시키고 우리 차례가 와서 유행가도 아니고, 민중가요도 아닌 ‘백치 아다다’를 불렀어요. 그리고 다음 날 일어나 보니 건너편 남자방에서 미팅하자는 말이 건너 와요. 우리는 2학년이었고, 그들은 1학년이었거든요. 전화번호 알려 달라고 해서 “여기가 어딘데 미팅이냐”고 야단쳤는데, 후회해요. 가르쳐 줄 걸. (웃음) 이 소설 읽고 그 남자가 나타나면 좋겠어요.
애린이 제주도 가서 클래식 카페에서 일하잖아요. 여성성을 회복하고 서울로 가야겠다고 결심합니다. 그런데 비행기 삯이 없으니 주인이 오기 전에 카운터에서 돈을 꺼내 공항으로 가요. 그 동안 일한 월급이라 생각하면서요. 이건 사실이거든요. 다방 이름이 제주의 수눌음 다방이었어요. 미안했다고 말하려고 나중에 갔더니, 그 자리에 다방이 없어요. 그때 한달간 DJ를 했던 경험은 지금 즐거운 추억으로 남아 있죠. 그때 주인 분이 책을 보신다면 역시 알려주시면 좋겠네요.
식당에서 혼자 먹을 수 있는 메뉴가 많아졌으면
어느덧 등단한 지 20년이 지났습니다. 선생님께 글쓰기는 어떤 의미인가요.
우선 밥벌이, 직업입니다. 두 번째는 나를 표현하는 도구죠. 글로 더 많은 사람과 더 큰 세상과 만날 수 있어요. 인간은 혼자입니다. 그럼에도 제 글을 읽고 공감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덜 외로워요.
시인 최영미와 소설가 최영미는 다른 자아인가요, 아니면 동일한가요.
완전 다른 자아입니다. 저는 시를 쓸 때 소설을 못 써요. 소설 쓸 때는 시를 못 쓰고요. 심지어 소설 쓸 때 에세이도 못 씁니다. 동시에 두 가지를 못 해요. 동시에 두 남자를 못 만나고요. (웃음) 시는 쓰고 싶어 쓰는 게 아니라 언어가 와요. 올 때 붙잡고 시상을 전개하죠. 저는 시를 못 만들어요. 만드는 건 소설입니다. 소설은 육체 노동 플러스 정신 노동이에요. 세상에서 힘든 일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제가 수영을 좋아하는데, 소설 쓸 때는 수영도 안 했어요. 혹시 수영하다 다치면 소설 쓰는 데 지장이 있으니까요. 그 정도로 집중했죠. 소설 끝내고 나서 제일 하고 싶은 게 수영이었어요.
그렇게 소설을 끝내고 잠시 휴식 시간인데요. 뭘 제일 하고 싶어요?
바닷가에서 수영해 보고 싶어요. 실내 수영만 했지 바닷가에서 한 적이 없거든요. 지금은 추우니, 내년 여름에 원피스 수영복 입고 바닷가에서 파도타기도 해 보고 싶네요.
젊은 시절 선생님의 꿈이 궁금합니다.
보통 부모님이 꿈을 심어주죠. 아버지는 제가 외교관이 되길 바랐죠. 그게 제 꿈은 아니잖아요. 꿈이 무엇인지 20대는 생각 못하고 살았어요. 저만 아니라 대부분 대학생은 군부독재 끝장내는 게 꿈이었고요. 작가가 되겠다는 결심은 없었지만 책을 좋아했어요. 무의식 깊숙이, 글쓰기 욕망이 있었나 봐요. 그게 30대에 표출됐죠.
지금 꿈꾸는 세상은?
아직도 한국사회가 야만스러운 구석이 많죠. 여성으로 혼자 살기가 힘들어요. 제 꿈은 소박합니다. 혼자 식당 가서 먹을 수 있는 메뉴가 다양해지면 좋겠어요. 춘천 살 때 일화인데요. 샤브샤브 집이 새로 생겨서 갔어요. 문전박대 당했잖아요. 샤브샤브가 2인분 메뉴라는 이유였죠. 한국에는 이미 독신 인구가 많은데, 식당에 혼자 가면 눈치를 줘요. 천박한 자본주의죠. 유럽에 여행가서 혼자라고 식당에 못 가 본적이 없어요. 그런데 한국은 너무 당연하게, 자리가 있어도 혼자 가면 자리가 없다고 말해요. 2인, 3인 손님 받겠다는 거죠. 이런 것부터 고쳤으면 좋겠어요. 당장 눈앞에 이익을 생각하면 그럴 수 있어도 길게 보면, 문전박대 당한 손님은 그 집에 다시 안 가요. 그 손님이 단체 손님을 데려 가면 다른 집으로 가겠죠. 한국은 당장 눈 앞만 보는 자본주의에요. 많은 한국인이 경제적 동물이죠.
청동정원청동정원 저 | 최영미
그의 두 번째 장편소설 『청동정원』은 2013년 여름부터 1년 간 계간 《문학의오늘》에 연재한 글을 단행본으로 묶은 것이다.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뜨거웠던 80년대, 폭압적 정권에 맞서 앞장서지도, 뒤로 숨을 용기도 없었던 ‘경계인의 초상’을 그려냈다. 제목으로 쓰인 ‘청동정원’은 쇠붙이로 무장한 전경들이 교정의 푸른 나무들과 겹쳐지는 풍경을 묘사한 표현으로, 쇠와 살이 부딪치던 시대의 분위기를 은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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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에 이미 우리는 5월의 냄새를 맡았다…… 싱그러우며 황폐했던 젊은 날, 우리 모두의 이야기 시인 최영미가 26년 만에 완성한 청춘소설 《청동정원》 출간 “쇠와 살이 부딪치던 청동시대를 통과하며 어디에 있었든, 자신의 방으로 돌아오면 우리는 모두 개인이었습니다. 이애린의 이야기이지만, 그녀의 영혼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