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그림책으로 마음 선물하기
집 앞에 작은 공원이 있다. 부엌에 있는 손바닥 만한 창문으로 공원이 내려다보인다. 사진 찍는 사람들이 엄지와 집게손가락을 사용해 네모난 프레임을 만들듯, 그 창으로 세상을 바라 볼 때가 있다. 특히 좋아하는 풍경은 해가 질 무렵 공원에 가로등이 하나 둘 켜지는 순간 그리고 자고 나면 달라지는 자연의 새로움이다. 요즘처럼 계절이 가고 올 때면 밤새 무슨 일이 벌어졌나 싶게 하룻밤 사이에 공원의 풍경이 달라진다. 밤새 공원의 나무들이 찬란하게 아름다운 빛깔로 물든 걸 보면 깜짝 놀라 중얼거린다. “이건 기적이야, 간밤에 누군가 다녀가셨어.”
지금보다 더 젊었을 적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고만고만한 일상이 지겨워 구토가 올라올 것 같을 때가 있었다. 그 시절에는 좀처럼 일상의 기적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찾아오고, 나뭇잎이 색색으로 물드는 기적 같은 자연의 변화를 알아차릴 수 없었다. 그랬다면 삶을 그토록 지겨워하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다. 크리스 반 알스버그의 『나그네의 선물』은 이 기적을 오묘한 상상력으로 보여주는 책이다.
아빠의 차에 부딪힌 후 기억을 잃은 한 나그네가 캐티네 집에 머물게 된다. 시간이 흐르면 기억이 되살아날 수 있다고 의사는 말했지만 나그네는 단추를 잠그는 것도 낯설어하고, 따뜻한 스프를 먹는 법도 모르는 것 같다. 추수를 하는 아빠의 농사일을 거들며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힘들어하지도 않는다. 호기심에 찬 눈으로 줄곧 나그네를 바라보는 캐티의 시선처럼 독자 역시 뭔가 이상한데 꼭 집어 말할 수는 없는 그런 이상한 기분을 지울 수 없다.
그러는 사이 한 주, 두 주 시간이 흐르고 계절이 바뀌는데 캐티네 농장 근처는 뭔가 다르다. 마을 저 너머 산은 단풍으로 울긋불긋 아름다운데, 캐티네 농장 근처는 초록이 무성하다. 기러기도 남쪽으로 길을 떠나는 데 캐티네 농장은 아직 햇살이 뜨겁다. 그리고 고민하던 나그네 역시 이제야 뭔가를 알았다는 듯 길을 떠난다. 그러자 날이 추워지고 캐티네 농장의 나무들도 하룻밤 사이에 밝은 빨강과 주황빛으로 물든다.
책을 덮고 나면 누구나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앞 장부터 다시 찬찬히 책장을 넘기며 나그네는 대체 누구일까 생각하게 된다. 대체 누구 길래, 그가 있으면 찬바람이 불고, 토끼가 그에게 따라오라는 듯 고개 짓을 할까. 당신은 그가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크리스 반 알스버그는 기묘한 환상의 세계를 그림책 속에 담아내는 작가다. 그의 그림책 중에 『북극으로 가는 기차』(The Polar Express), 『주만지』는 동명의 영화로 만들어졌을 만큼 그 환상성을 대중적으로 인정받았다. 알스버그 특유의 환상은 그가 뿌려 놓는 몇 가지 마법으로 직조된다. 데뷔작이자 칼데콧 영예 상 수상작인 『압둘 가사지의 정원』처럼 흑백의 모노톤이건 혹은 『나그네의 선물』처럼 원색을 사용하건 그는 언제나 극사실적 기법으로 대상을 표현한다. 여기에 원근법과 뚜렷한 명암 처리까지 더해져 그림은 현실보다 더 현실적으로 보일 만큼 입체감과 깊이감이 살아있다.
그의 그림은 기괴하거나 모호하기는커녕 사실적이다. 하지만 그의 그림책을 읽고 나면 뭔가 모르게 일상이 달라 보이는 마법이 일어난다. 때로는 좀 오싹하고, 익숙한 이곳이 낯설게 느껴진다. 너무도 사실적이기에 어쩌면 이곳에서 벌어진 일이 정말인지도 모른다. 바로 이런 이유로 그가 펼쳐낸 이야기가 환상에 불과하며 거짓이라고 독자 역시 딱 잘라 말할 수 없다.
이것으로 부족하다 싶은지 알스버그는 즐겨 마법의 공간에서 가져온 무언가를 독자에게 내민다. 『압둘 가사지의 정원』에서는 모자, 『북극으로 가는 기차』에서는 산타 할아버지에게 선물로 받은 썰매에 달린 은방울을 말이다. 분명 잃어버린 줄 알았는데 현실로 돌아왔을 때 버젓이 주인공 앞에 나타난 그것들을 보고 있으면 “이래도 믿지 못하겠니?” 하고 속삭이는 알스버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하지만 이 책 『나그네의 선물』은 기묘한 세계가 아니라 계절이 변할 때 느껴지는 기적 같은 낯설음을 이야기한다. 마치 나그네가 왔다 가듯, 우리 일상에서 계절이 오고 감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게 바로 선물이다. 자, 알스버그의 그림책 속에서 뿐 아니라 우리가 사는 지금 이곳에서도 나그네가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우리 모두 나그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자. “다음 가을에 다시 만나요.”
데미안 라이스가 8년 만에 신보를 냈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목소리를 지닌 이 남자의 노래를 들으며 이 계절 우리를 찾아온 나그네를 떠나보내자.
나그네의 선물 크리스 반 알스버그 저/김경연 역 | 풀빛
어느 날 베일리씨는 트럭을 몰고 가다 그만 어떤 남자를 치고 말았습니다. 베일리씨는 꼼짝도 하지 않는 남자를 집으로 데리고 와서 진찰을 해 보았습니다. 의사는 그 나그네가 기억을 잃어버렸다고 말했습니다. 그날부터 나그네는 베일리씨 가족과 함께 생활했습니다. 나그네는 기억을 잃어, 모든 게 처음인 것처럼 보였지만, 점차 자기의 정체성을 찾아갔고, 점점 수줍음도 덜해졌습니다. 그리고 처음 가족에게 왔던 것처럼, 다시 떠나갔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은 나그네가 떠난 후로 갑자기 날이 추워졌고, 나뭇잎들은 밝은 빨강과 주황빛으로 변했습니다.
[추천 기사]
- 다시 시를 쓰기 시작한 어른에게
-동생 때문에 속상한 아이에게
- 사랑하는 엄마 아빠에게
- 먼 곳으로 떠나는 친구에게
관련태그: 나그네의 선물, 그림책으로 마음 선물하기
독일문학을 공부했고 웅진출판과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에서 일했다. 현재는 책과 출판에 관해 글을 쓰고 방송을 하는 출판칼럼니스트로 일하고 있다. [황정민의 FM대행진]에서 ‘한미화의 서점가는 길’을 진행하고 있으며, [한겨레신문]에 어린이책 이야기를 연재하고 있다.
그동안 『우리 시대 스테디셀러의 계보』 『베스트셀러 이렇게 만들어졌다 1-2』 등의 출판시평과 『잡스 사용법』, 『책 읽기는 게임이야』, 『그림책, 한국의 작가들』(공저) 등의 책을 썼다.
16,200원(10% + 5%)
9,000원(10% + 5%)
8,550원(10% + 5%)
9,000원(10% +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