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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이미지가 도착하는 시간

‘붉은 꽃’이 어떻게 ‘붉은 피’가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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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의식’도 ‘불안’과 연접한 기분이라는 점에서 죄의식이 상실되는 시간이야말로 인간의 본래적인 것으로의 귀환이 불가능하게 되는 마지막 분기점이 아닐까.

문학평론가 함돈균의 에세이 <시간의 철학>이 매주 화요일 연재됩니다.

시간과 날짜에 대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 다르게 생각해보면 좋을 것들을 철학적으로 풀어봅니다.


죄는 탕감될 수 있는가


한 소읍에 심각한 사건이 발생했다. 사람이 죽었고, 사람을 사실상 죽음으로 내몬 장본인들이 누구인지 책임 소재도 명확하다. 하지만 사건에 가담한 아이들의 아빠들은 모여서 상의한다. 어떻게 하면 ‘사건’을 ‘사고’로 축소시키고, 있던 일을 없던 일로 망각시킬 것인가. 어떻게 지은 죄의 책임을 회피할 것인가. 이들은 오늘날 세상에서 행해지는 가장 상식적이고 손쉬우며 효과적인 방법론을 택한다. 한 아빠가 말한다. “결국 돈(보상금)이네,”

오늘날 세상의 해결책은 이렇듯 간단하다. 아무도 대신할 수 없는 타인의 죽음은 돈과 맞바꿔지며, 죄는 ‘보상’이라는 합리적이고 법률적인 테두리 안에서 탕감된다. 이 탕감의 메커니즘은 꽤 효율적이며 힘이 세다. 잠깐이나마 발생했던 죄의식조차 ‘비용’의 지불로 인해 사라져버린다. 죄의식이 사라진 정신의 메커니즘은 사건을 아니 사고를 일어나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하게 되며, 개인과 공동 공간의 삶은 이런 식으로 ‘정상화’된다. 


하이데거는 ‘불안’을 ‘진실을 고지하는 실존의 기분으로서 인간을 본래적인 것으로 되돌아가게 하는 본질적 기분’으로 사유한 바 있다. 불안의 역설은 돌이킬 수 없는 안이한 정신에게는 아예 불안도 발생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죄의식’도 ‘불안’과 연접한 기분이라는 점에서 죄의식이 상실되는 시간이야말로 인간의 본래적인 것으로의 귀환이 불가능하게 되는 마지막 분기점이 아닐까.


영화를 본 관객은 알겠지만, 꽤나 익숙한 듯 느껴지는 이 얘기는 이창동의 영화 <시>의 한 장면이다. 아빠들의 저 능숙하고 신속하며 합리적인 대응은 개인사뿐만 아니라, 지금 이 시각에도 공동체에서 벌어지는 여러 사회적?정치적 사건들을 처리하는 정치인들과 기업인들의 관행들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이 영화에는 동일한 사건에 연루되었으며, 동일한 해결 현장에 참여하고 있지만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 양식을 지닌 한 사람이 나온다. ‘미자 씨’(윤정희 역)는 이 사건의 연루자인 손주의 할머니다. 


손주는 이 사건 처리 현장에 있는 아빠들의 아들들처럼 한 여자 아이를 성폭행하는 데에 가담했고, 그 여자 아이는 자살했다. 그래서 미자 씨도 아빠들의 회의에 소집 받은 것이다. 그런데 이 심각한 회의 자리에서 미자 씨는 회의 도중 뜬금없이 갑자기 바깥으로 나간다. 화면은 아빠들과 미자 씨를 나눈 큰 창을 통해서 창 안의 아빠와 창 바깥의 미자 씨가 서로 다른 ‘시간’을 살고 있음을 암시한다. 이 ‘다른 시간’이란 무엇일까.


[내일]함돈규-시간철학.jpg



사과를 잘 보기


영화 <시>에서 미자 씨는 시 쓰기를 배우고 싶어 하는 일반인으로 등장한다. 한 번도 시를 써본 적이 없는 미자 씨는 마을 문화센터에서 시 쓰기 강좌를 수강하고, 여기에서 강사로 등장한 김용탁 시인(김용택 역)으로부터 시를 쓰기 위해 ‘사과 잘 보는 방법’에 대한 강의를 듣는다. 사과를 어떻게 보는 것이 잘 보는 것인가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듣지 못한 미자 씨에게 그 날 이후 ‘사과 잘 보기’는 절박한 화두가 된다. 미자 씨가 성폭행 사건에 이은 여학생의 자살과 관련하여 남학생의 아빠들에게 회의 호출을 받은 것은 이 강의를 들은 바로 직후다.


이 회의에서 아빠들의 얘기를 듣다가 갑자기 바깥으로 나간 미자 씨는 화단에 놓인 꽃을 유심히 바라본다. 화단에는 붉은 꽃이 피어 있다. 미자 씨는 불현듯 메모장을 꺼내서 시 쓰기를 마음먹은 후 최초의 시구를 얻는다. 그는 메모장에 ‘피 같이 붉은 꽃’이라고 적는다. <시>라는 영화에 비추어보아, 그리고 미자 씨가 시 쓰기를 배우기 시작했다는 차원에서 ‘피 같이 붉은 꽃’은 이 영화에서 ‘시’의 본질을 암시하고 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피 같이 붉은 꽃’은 시의 ‘이미지’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중요한 통찰을 담고 있다. 이 시구는 현실의 시간과 시의 시간, 일상인의 시간과 시인의 시간은 어떻게 다른가 하는 물음을 제기한다.  


미자 씨의 시구는 ‘붉은 꽃’을 ‘피 같이’라는 어구로 꾸미고 있다. 우리가 시를 장르적 관점 속에서 ‘(언어) 예술’이라는 기능론으로 이해하면 그 말은 틀리지 않을 것이다. ‘꾸밈’은 ‘붉은 꽃’이라는 ‘원관념’을 가장 잘 설명하는 대상을 찾다가 시인이 ‘선택’하는 ‘보조관념’이 된다. 시에 대한 이러한 생각은 시를 쓰는 일에 대해 전혀 근거가 없다고는 할 수 없는 두 가지 통념에 기초해 있다. 시를 쓰는 주체가 시인이라는 생각이 하나이며, 이미지는 여러 가능한 것 중에 선택된 우연한 ‘옵션’이라는 생각이 또 다른 하나다.  


그러나 미자 씨에게 ‘피 같이 붉은 꽃’은 본인이 ‘스스로’ 쓴 것도 아니며, ‘피 같이’이라는 수식은 선택 가능한 여러 임의적 이미지 중 하나가 아니라 ‘필연적인’ 것이다. 무슨 말인가. 우리가 던져야 하는 가장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미자 씨는 꽃에 대한 수많은 비유들 중에서 왜 하필  ‘피 같이’라는 이미지를 ‘선택’했을까. 하지만 물음이 잘못되었다. 사실 여기에서 선택의 주체는 미자 씨가 아니라, 이미지 자체이기 때문이다. 미자 씨가 이미지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이미지가 미자 씨를 통해 이 시각 그 메모의 형식으로 ‘도착’한 것이다. 



피의 시간, 꽃의 시간


이 시구는 아빠들이 사는 시간과 미자 씨(시인)가 사는 시간의 차이를 드러낸다. 죄의 본질을 묻기 전에 죄로부터의 회피를, 책임을 묻기 전에 책임의 탕감을 꾀하는 아빠들의 ‘세상 시간’은 실용성의 측면에서 합리적이고 도구적인 이성의 층위에 있다. 그와 달리 미자 씨는 죄의 현실, 죄의 현장, 죄로 인해 죽음에 이른 여학생의 시간을 살고 있다. 그것은 실용적 삶 이전에 윤리의 차원을 질문하는 시간이다. ‘피의 시간’을 사는 이에게 ‘붉은 꽃’은 피의 현실 그 이외의 것일 수 없다.


 ‘피 같이 붉은 꽃’은 수식이 아니며, ‘객관’ 형식을 취하는 외부적 시각으로 대상에 감정을 시인이 임의로 이입한 것도 아니다. 그 자신이 ‘붉은 꽃’이며 그 몸은 ‘피’를 흘린다. 피와 붉은 꽃, 시의 시간과 피를 흘리는 꽃의 시간, 시인으로서 미자 씨의 시간과 죽은 여학생의 시간은 분리되지 못한다. 이런 점에서 시 쓰기 강좌에서 만난 강사의 ‘사과 잘 보기’의 진정한 의미는 ‘사과 되어보기’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의 결정적인 시구, 의미심장한 이미지는 이런 식으로 필연적으로 시인에게 도착하는 타자의 편지와 비슷하다. 시인은 시구를, 이미지를 선택할 수 없다. 시는, 시의 이미지는 그러므로 시인보다 크다. 내가 항거할 수 없고, 나도 몰랐던 편지가 도착하는 시간이 시의 시간이다. 전적으로 내 안에서 비롯되었다고는 할 수 없는 바깥의 무엇이 내 안에서 이미지로 발생한다는 데에 시의 신비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래서 미자 씨는 자기가 쓴 이미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스스로 알지 못한다.


자기에게 도착한 ‘피 같이 붉은 꽃’이라는 이미지가 죽은 여학생의 임재라는 것을 끝내 알지 못한다. 이미 여학생의 시간을 살고 있는 몸에게 그것은 객관적으로 관찰되거나 분석될 수 있는 외적 현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장 엄밀하고 깊숙한 의미의 차원에서 시의 시간은 ‘내 시간’이기 전에 타자가 내 몸으로 침투하는 시간이다. 시의 이미지는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게로’ 도착한다. ‘나’를 넘어선다는 점에서, 내가 지닌 것 이상이라는 점에서, 무엇이 도착할지 알 수 없다는 점에서, 시의 시간은 크고 깊고 낯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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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함돈균(문학평론가)

문학평론가이며,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 한국문학 속에 나타난 전위적 감각과 윤리를 탐구하는 연구·비평·강의에 매진하고 있다. 인문정신의 사회적 확산과 시민적 공공성을 확보하기 위해 ‘실천적 인문공동체 시민행성’을 기획하여 공동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매일경제신문에 문명의 무의식과 시대정신을 사색하는 <사물의 철학>이라는 인문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문학평론집으로 《예외들》, 《얼굴 없는 노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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