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김수영의 공연 티켓
실제 유괴사건 바탕으로 한 심리극 - 뮤지컬 <쓰릴미>
막이 내려도 삶은 계속된다
2007년 초연 때부터 팬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던 뮤지컬 <쓰릴 미>가 올가을 다시 찾아왔다. 올해로 8주년이다. 웬만한 남자 뮤지컬 스타들은 한 번씩 거쳐 간 투톱 조연은 올해도 매력적인 이름들로 채워졌다.
2007년 초연 때부터 팬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던 뮤지컬 <쓰릴 미>가 올가을 다시 찾아왔다. 올해로 8주년이다. 웬만한 남자 뮤지컬 스타들은 한 번씩 거쳐 간 투톱 조연은 올해도 매력적인 이름들로 채워졌다. <쓰릴 미>는 두 사람과 피아노 한 대가 무대를 채우는 공연이다. ‘그’를 사랑하다못해 집착하는 ‘나', 나의 이런 집착을 이용해, 자신의 범죄에 동참시키려는 ‘그'의 대결을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1924년 시카고에서 벌어진 실제 유괴사건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막이 오르면, 어둠 속에서 ‘나’가 등장한다. 37년 동안 교도소에 수용되어 있는 ‘나'는 또다시 심문을 받는다. 그날의 진실에 관하여. 스무 살 밖에 되지 않은 청년들이 왜 무고한 아이를 죽였는지를. 그 끔찍한 살인사건의 동기를 찾는 데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과연 그날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왜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소극장 무대. 두 명의 배우의 존재감과 배경의 어둠만으로도 꽉 찬 무대에 현란한 피아노 소리가 쏟아진다.
나와 그는 고등학교 동기생. 둘 다 천재라고 꼽힐 만한 수재들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 둘의 권력 관계에 있다. ‘나’가 ‘그’를 무모할 정도로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은 언제나 약자일 수밖에 없다. ‘나'는 달아나는 ‘그'에게 끊임없이 수모를 당하고, 혼자 괴로워한다. 대학을 졸업하고 점점 더 멀어지는 듯한 그와의 관계를 견딜 수 없어 한다.
수려한 외모, 부족할 것 없는 집안, 게다가 똑똑하기까지 한 ‘그’는 모두가 원하는 남자다. 하지만 ‘그'는 어떤 것에도 쉽게 만족하지 못한다. 그저 일렁이는 불을 보면서 영혼의 갈증을 달래는 정도. 그는 본격적으로 자신의 허전함을 달래기 위해 ‘위대한 짓'을 하기 시작한다.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위대한 짓. 그것은 완전 범죄다. 처음에는 불장난. 도둑질 정도에 그쳤던 범죄는 점점 수위를 높여간다. 그리고 문제에 사건이 터지기 직전, 그는 결심했다는 듯이 이렇게 선언한다. 살인, 살인을 하자고. 그것만큼 위대한 일이 없다며 말이다.
더 강렬한 것을 원하는 욕망
<쓰릴 미>는 치밀한 심리극으로 두 남자 배우의 훌륭한 연기 호흡을 즐길 수 있는 작품으로 정평이 나 있다. 빈 공간에서 두 명의 배우가 눈빛과 목소리, 몸짓만으로 무대를 채워야 하기 때문에 배우의 역량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무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맨 처음에 이 작품을 접했을 때, 나는 배우들의 맛깔스러운 연기는 둘째치고, 재미로 살인한다는 이 이야기의 소재에 그야말로 전율했다. 불쾌했다. 왜 이런 소재의 이야기를 하는 거지? 그리고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 어두운 극이 이토록 사랑받는 거지? 이해할 수 없었다.
두 번째 봤을 때는 확실히 달랐다. 아이를 유괴해 살인한다는 소재는 여전히 불쾌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그것은 정말로 소재일 뿐이었다. 그 소재는 꼭 아이를 유괴하는 일뿐만이 아니라 뉴스에서 나오는 이해할 수 없는 온갖 불쾌한 사건을 대치해도 다를 바 없었다. 그러니까 예전에 나는 달을 본 게 아니라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본 기분이랄까?
이번 무대에서는 두 남자의 욕망이 느껴졌다. 채울 수 없는 욕망. 그리고 자신이 정말로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른, 어린아이들의 무모한 욕망. 그 앞에서 그 둘이 어떻게 전율하고, 어떻게 무너져 내리는지 좀 더 강렬하게 다가왔다. 그것은 단순히 남자를 사랑하는 남자만의 특수한 것도 아니었고, 살인하면서 쾌감을 느끼는 사이코패스의 것도 아니었다. 우리가 누구나 품고 있고, 사이좋게 지내지 못하는 욕망. 그것이었다. 그렇게 감정이입을 하고 나니, 뮤지컬 <쓰릴 미>가 내 오감에 한결 쫀득하게 달라붙었다.
단편적으로 보자면 ‘나'는 한없이 약한 사람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사랑을 얻지 못하는 일만큼 고통스러운 일이 있을까? 초라해지는 줄 알면서도 매달리게 되는 일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잘 알고 있다. ‘그’ 역시 잘 알고 있다. ‘그'는 보란 듯이 ‘나’의 약점을 찌르고 괴롭힌다. ‘나’는 한없이 구차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좀 더 들여다보면 ‘그'가 더욱 처량하게 다가온다.
적어도 ‘나'는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다. 또 그 목적을 위해 행할 줄도 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진짜 원하는 게 뭔지 아직 모른다. 불장난하면서 위로를 얻고, 범죄를 통해 희열을 얻기도 하지만 그게 ‘그'의 전부가 아니다. 그는 사실 정의로운 ‘변호사'가 되는 게 꿈이기 때문이다. 엄청난 갈증이 나는데, 도대체 무엇으로 채워야 할지 못할 때의 갑갑함. 그는 좀체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고, ‘나'에게 더욱 위선적인 모습으로 다가간다.
그랬기에 계획한 일이 흐트러졌을 때, 그는 결정적인 순간에 용기를 내지 못한다. ‘나'가 안경을 떨어뜨려 경찰의 포위망에 걸려들었을 때, ‘그'는 자신에 관해선 입도 뻥긋 말라며 회피하려고 했다. 그 선택이 모든 것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그'는 니체를 읽는 남자 아닌가. 니체는 늘 용기를 최고의 덕목으로 치는 철학자다. 밤마다 니체를 읽고, 천재적인 두뇌를 가졌는데도 불구하고, 결국 ‘나 자신을 아는 일'은 ‘내 욕망을 정확히 아는 일'에는 ‘그'는 어린아이일 뿐이었다. 자신이 모든 것을 통제하고 이룰 수 있다고 착각하는 어린아이.
막이 내려도 삶은 계속된다
극 중 섬세하고 부드러운 나인 '네이슨'에는 뮤지컬배우 정동화와 신성민, 전성우, 정욱진이 캐스팅됐다. 본인을 초인이라 여기는 그 '리처드'는 뮤지컬배우 에녹과 송원근, 이재균이 나눠 맡는다. 2008년부터 조연출로 국내외 연출자들과 함께 ‘쓰릴 미'를 만들어온 박지혜 연출의 첫 작품이기도 하다.
극에서 반주를 맡은 한 대의 피아노는 배우 한 명분의 역할을 톡톡히 한다. 강렬하고 리드미컬한 음계로 극의 분위기를 순식간에 반전시키기도 하고, 배우들의 심리가 치열하게 부딪힐 때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역할을 한다. 귀에 감기는 음악의 반주를 넣기도 하고, 낯선 소리로 주변을 환기하게 한다. <쓰릴 미>는 10월 26일까지 대학로 유니플렉스 2관에서 공연된다.
덧붙여 <쓰릴 미>는 개인적으로도 기억에 남을 작품이 될 듯하다. 2012년 뮤지컬 <돈키호테>로 시작했던 [김수영의 공연티켓]의 마지막 작품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2년 동안 좋은 공연들 덕분에 내 삶에 잊지 못할 순간들을 참 많이도 남겼다. 그리고 그 순간에 대한 생각들을 누군가에게 들려줄 수 있어서 즐거웠다. 수많은 공연을 보면서 나는 최소한 내가 원하는 것, 내 욕망은 분명히 자각할 수 있었다. 쉬지 않고 공연을 보는 일, 그리고 더더욱 좋은 관객이 되는 일도 내 삶을 이끌어가는 중요한 욕망 중 하나다.
공연이 끝나도 삶의 무대는 계속된다. 매일 밤 공연은 반복되지만 우리는 매일매일 새로운 무대에 선다. 물론 그 새로움을 실감하지 못하는 익숙한 무대긴 할 테지만. 어쨌든 매일 다른 조연, 다른 스텝들과 우리는 시작도 끝도 명확하지 않은 공연을 쉬지 않고 치른다. 많은 순간 공연의 어떤 장면들의 내 하루의 공연을 꾸려나가는 데 큰 힘이 되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계속 공연을 보고, 계속 이야기하게 될 것이다.
* 지금까지 김수영의 공연 티켓을 애독해 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추천 기사]
- 당신은 거부할 수 있는가 - 뮤지컬 <더 데빌>
- 고장난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한 마디 -연극 <이기동 체육관>
- 뮤지컬 <더 데빌>의 차지연
- 거침 없이 솔직하게! 연극 <나의 PS파트너>
summer2277@naver.com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해는 중요한 거 하나만 생각하자,고 마음먹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