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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어슬렁거리며 혼밥먹기

고독한 미식가와 우연한 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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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시간을 내서 혼밥을 먹고 주변골목길을 기웃거리는 산보를 하는 것, 멀리 시간을 내서 여행을 가거나, 일부러 피트니스를 가지 않더라도 우리의 정신을 건강하게 만드는 일상의 좋은 방법이라 생각한다.

                                      격주 월요일, 하지현 건국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가

추천하는 심리책 이야기, ‘하지현의 마음을 읽는 서가’가 연재됩니다.

 

가끔 ‘이러면 안 되지’하는 죄책감이 목 위까지 차올라 와야 한 번씩 피트니스에서 뜀박질을 하는 것으로 면피를 해왔다. 그러면서도 먹고 마시는 것은 조절을 하지 못하다보니, 체중과 체형이 한계에 다다랐다. 그래서 올 초에 웨어러블 디바이스를 하나 구입했다. 일종의 블루투스로 연동되는 만보계인데, 이거라도 있으면 보통 때에 조금이라도 더 움직이겠지 하는 작지만 나름 절박한 바람이었다.

 

좋은 점은 엉뚱한 상상을 하게 되었다


현재까지는 일단 성공적이었다. 평소에 조금은 강박적인 성격이 있는 터라 하루에 만보를 목표치로 두고 나니 웬만하면 차를 타기보다 걸어 다니고, 점심시간에도 밥 먹고 바로 연구실로 돌아오기보다 조금 멀리 가서 먹고, 식사를 하고 난 다음에는 근처 골목길을 돌아다니는 버릇이 생긴 것이다. 처음에는 당일의 할당량을 채워야겠다는 강박적 목적의식으로 시작한 것이었는데 걷다보니 의외의 재미를 덤으로 얻을 수 있었다.

 

차를 타고 지나가거나 사람들과 식당을 찾아 갈 때에는 그저 무심코 지나쳤던 집 근처 주택가의 골목안쪽의 작은 가게들을 발견할 수 있었고, 근무하는 병원 건너편의 시장안의 재미있는 식당들을 찾아낼 수 있었다. 5천 원에 깔끔한 백반을 주는 식당부터 젊은 사장이 운영하는 고기국수집까지. 전에는 목적지를 향해 빨리 가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는 일부러 가지 않아본 곳을 가보고 싶어지고, 가능하면 큰 길이나 알려진 골목보다는 왠지 낯설고 처음 가보는 곳을 기웃거리면서 걸어보는 버릇이 생긴 것이다.

 

그런 과정에 생긴 좋은 점은 엉뚱한 상상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루는 식사를 하고 동네 골목을 걷고 있는데 두 개의 간판을 발견했다. 위에는 ‘철학관’이라고 써있었고 바로 아래 같은 크기와 모양, 그러나 색깔만 핑크색으로 ‘성인용품’이라고 써있는 것이었다. 사실 그 길은 차로 항상 지나가는 길목이었지만 한 번도 눈여겨 본적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 두 가지가 함께 나란히 같은 건물에 위아래에 있다는 것이 갑자기 너무나 재미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한 쪽은 미래를 궁금해 하면서 동양철학적으로 사주풀이를 해서 과거를 기반으로 자신의 운명을 점치기를 바라는 형이상학적인 곳인데 반해, 다른 한 집은 과거나 미래, 그런 건 상관없이 오직 현실의 쾌락을 배가하기위한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세칭 ‘허리하학’적 물건을 파는 곳이었다. 그러나, 내 눈에는 두 곳 모두 인간의 근본적 욕망과 불안을 충족시켜준다는 점에서는 같은 기능을 하는 곳이다.

 

내가 이런 즐거움이 생겼다고 하니 내 동료 중 한 명은 “혼자 밥을 먹어?”라는 반응이 우선이었다. 가끔 사먹으러 나가지만 그때에는 다른 동료 교수나 전공의와 함께 가지 혼자서는 밥을 먹으러 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에게 세칭 ‘혼밥’은 무척이나 생소한 일이었고, 뭔가 이상하고 사회성 떨어지는 사람들이나 하는 일로 보였나보다. 그러나, 바쁜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아까와 같은 자유연상적 즐거움을 얻기 위해서는 혼밥이 필수다. 일부러 멍 때리면서 길을 헤맬 수 있는 자유로운 시간이 주어지는 사람은 적으니 말이다.

 

고독한미식가

 

고독을 자유로움으로 치환


그런 두려움과 불안을 가진 친구에게 ‘혼밥의 즐거움’을 먼저 갖게 하는 것이 필요했다. 이런 사람에게 권하고 싶은 책은 구스미 마사유키 작/다니구치 지로 그림의 『고독한 미식가』다. 그릇을 수입해서 판매하는 독신 중년 남성 이노가시라 고로는 구매자와 상담을 하기 위해 곳곳을 돌아다닌다. 작은 오퍼상을 하다보니 메어있지 않을 수 있고, 또 여기저기 돌아다니게 되니 사이사이 문득 마음에 드는 곳을 찾아 들어가서 이것저것을 시켜먹으면서 혼자서 음미를 한다. 만일 손님과 같이 갔거나 친구와 갔다면 자신이 고른 음식점이 맛이 없을까봐 실망스러울까봐 걱정을 했겠지만 그럴 두려움도 없고, 또 가이드북을 보거나 인터넷 정보에 의지하지 않고 정말 즉흥적으로 왠지 맛있어 보이는 가게를 즉흥적으로 들어가서 그곳에서도 괜찮아 보이는 음식을 먹으면서 즐긴다. 도쿄와 오사카의 작은 골목의 식당들을 탐험하면서 낯선 거리를 헤매는 과정은 ‘혼밥’이 아니면 절대 얻을 수 없는 경지라는 것을 실감하게 한다.

 

원작자는 이 이야기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아마도 그에게는 먹는다는 행위 자체가 위안이었을 것이다. 그것도 혼자서,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누구에게도 신경 쓰지 않고, 무언가 결핍된 상태에 있는 자신의 육체적?정신적 허기를 메워갈 때, 그는 언제나 자유를 느꼈을 것이다. 음식을 먹을 때, 고독하게 혼자 무언가를 먹을 때, 나는 이노가시라 고로가 자유로웠다고 믿는다. 그는 그 순간 자유로웠다. 마음대로 행동하고, 시간이나 사회 규범에 얽매이지 않고 행복하게 허기를 채움으로써, 현대의 원시인으로 변하여 왜곡되었던 자신을 치유한 것은 아닐까.”

 

고독을 외로움으로 보지 않고 자유로움으로 치환한 것이다. 혼자 먹는다고 불쌍하고 외로운 사람이 아니라 자유로운 상태에 행복하게 허기를 메꿀 때의 치유의 의식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이 만화는 책으로는 한 권만 발행되었지만 일본에서 유명 탤런트 마츠시게 유타카를 주연으로 하여 드라마로 만들어졌는데, 올해 시즌4가 방영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그만큼 사람들의 대중적 욕망을 반영하고 있다는 의미가 아닐까?

 

이제 혼밥이 익숙해졌다면 목적 없이 정처 없이 걷는 산보를 해보도록 하자. 우리말로는 산책이고 일본식 말로는 ‘산보’라고 쓰게 되는 여유로운 걷기. 역시 같은 쿠스미 마사유키와 타니구치 지로 콤비가 <통판생활>이라는 잡지에 연 4회씩 2년간 딱 8회만 연재하기로 약속하고 만든 ‘우연한 산보’가 소개하고 싶은 책이다. 저자는 이 작품을 구상하면서 세 가지 원칙을 세웠다.

 

1) 관광가이드나 인터넷으로 미리 조사하지 않는다.
2) 처음에는 지도를 보고 가지만 가다가 재미있어 보이는 곳이 보이면 옆길로 샌다.
3) 시간제한을 두지 않고 느긋하게 계획 없이 걷는다.

 

이런 세 가지 원칙을 세우고 취재를 한 내용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만들었던 것이다. 만화 중에 주인공이 키치조지의 옛날 식당골목에서 산보를 하다가 카레를 먹는 장면이 나온다. 이곳이 자꾸 몰락해가는 것을 걱정하는 주인에게 다른 젊은 손님이 하모니카 요코초 가이드북같은 걸 만들어서 배포하자고 제안한다. 그러나 주인공은 반대를 하면서.

“이런 골목길 같은 곳은 가이드북 같은 것에 의지하지 않고 그냥 걷는 게 재미있는 거 아닌가요? 목적 같은 것 없이 자기 마음대로 느긋하게 걷는데서 오는 기분이거든요. 그리고 산책은 관광과 다르죠. 걷다보면 반드시 재미있는 가게나 물건이 나오는 자기 스스로 재미를 발견할 수 있는 골목이거든요. 조금 불안한 정도가 재미있는 거 아닌가요?”

라는 의견을 낸다.

 

나는 바로 이 부분이 원작자가 생각한 ‘진정한 산보’의 핵심을 담고 있다고 보았다. 멍 때리면서 우연을 기대하면서 슥 지나칠 때는 보지 못했던 너무나 익숙한 골목을 낯설게 경험하기는 일상의 바쁜 리듬 속에서는 만들어내기 어려운 새로운 아이디어, 발상과 시각의 대전환, 그런 거창한 것까지는 아니라 해도 뇌의 회전률을 낮춰 쉴 수 있게 해주는 기능을 할 것이라 믿는다. 이건 내가 올해 들어 실제로 경험하고 있는 일들이기에 조금은 힘을 줘서 말을 할 수 있는 것 같다. 잠시 시간을 내서 혼밥을 먹고 주변골목길을 기웃거리는 산보를 하는 것, 멀리 시간을 내서 여행을 가거나, 일부러 피트니스를 가지 않더라도 우리의 정신을 건강하게 만드는 일상의 좋은 방법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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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미식가구스미 마사유키 원저/다니구치 지로 글,그림/박정임 역 | 이숲
주인공인 독신주의자 이노가시라 고로는 도쿄와 오사카의 소박하고 오래된 18곳 식당을 혼자 돌아다니며 일본 고유의 음식 맛을 즐긴다. 대부분 음식만화와는 달리, 기상천외한 레시피나 작위적인 줄거리 전개가 절제된 이 작품에서 작가는 진정한 미식이란 삶이 녹아 있는 단순하고 깊은맛을 즐기는 데 있음을 은근히 역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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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하지현(정신과 전문의)

어릴 때부터 무엇이든 읽는 것을 좋아했다. 덕분에 지금은 독서가인지 애장가인지 정체성이 모호해져버린 정신과 의사. 건국대 의대에서 치료하고, 가르치고, 글을 쓰며 지내고 있다. 쓴 책으로는 '심야치유식당', '도시심리학', '소통과 공감'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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