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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일상의 소중함을 알게 되는 순간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 당신 인생의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언제였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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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무의식 밑바닥에 인생의 다채로운 조각들이 가라앉아 있음을 또 다시 깨달았다. 그 조각들이 다 반짝이는 보석일리는 없을 것이다. 사금파리처럼 하찮고 시시한 것들이 우리 삶을 구성하는 본질이라는 것. 그건 어쩌면 현재의 내 아무렇지도 않은 소소한 일상이 중요하다는 의미이겠다.

서른세 살이 되었는데 아직도 아기였을 때의 꿈을 꾸는 남자가 있다. 피아노를 치는 남자 폴이다. 그 꿈의 주인공은 폴 자신이 아니다. 젊었던 시절의 부모다. 부모가 그 남자의 인생에서 사라졌던 때이기도 하다. 그때 부모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 물음표는 서른 해가 넘도록 폴의 삶을 지배하는 짙은 그림자다. 폴은 말을 하지 못하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는데 처음부터 그랬던 것인지 어느 순간 언어를 잃게 되었는지는 불확실하다. 말 대신 그가 세상과 소통하는 수단은 음악이다. 폴을 (지나치게) 사랑하는 이모들은 그가 숨겨진 천재라고 믿지만 피아노 앞에 앉은 그가 행복해 보이는 것은 아니다. 행복하지도 불행하지도 않은 표정으로 그는 기계적으로 건반을 누른다. 기계적으로 살아간다.


그런 폴에게 새로운 차원의 문을 열어주는 사람이 마담 프루스트다. 그녀는 한때 가수였으나 어떤 사건으로 삶의 방향을 바꾼 과거가 암시되는 중년여성이다. 그녀는 아파트 안에 비밀스러운 정원을 가꾸고 있다. 그 정원에서 재배된 신비의 약초로 조제한 차를 마시면 마취 상태 혹은 깊은 잠에 빠지고, 꿈속에서 돌아가고 싶은 과거와 만나게 된다.

 

마담프루스트

 

영화를 보는 내내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원더풀 라이프>가 떠올랐다. 이승과 저승의 중간 지대인 림보라는 공간이 무대다. 매주 월요일이 되면 저승으로 갈 사람들 여럿이 림보에 들어온다. 그들 모두는 공통된 질문을 받는다. 당신 인생의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언제였습니까? 그 마지막 순간은 림보 안에서 재연된다. 그러나 선택의 마지막 날까지 그 단 한순간을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은 영원히 림보에 남게 된다. 나는 영화의 중반 이후부터는 우느라고 화면을 제대로 보지 못할 정도였는데, 그건 끝내 인생의 어느 한 장면을 고르지 못하는 그들이 너무도 잘 이해되어서였다.


그런 이들에 비한다면, 꼭 다시 보고 싶은 때를 분명히 알고 있는 폴은 어쩌면 더 행복한 사람인지도 모른다. 혹은 행복해질 잠재성을 품은 사람이거나. 그는 망설임 없이 자신의 부모를 보겠다고 한다. 그리고 많은 것들이 바뀐다.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은 마르셀 프루스트의 방대한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전혀 다른 방식의 작품이지만 애초에 그로부터 영감을 얻었다는 것만은 부인하기 힘들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마르셀이라는 부르주아 출신 일인칭 화자의 내면을 따라가는 여정으로 구성되어 있다. '나'는 예민하고 몽상가적인 인물로 시간의 위대함을 알게 되면서 예술적 자아만이 시간의 파괴력에 대적할 수 있다고 믿게 된다. 소설의 키워드는 무의식과 망각, 그리고 시간이다. 마들렌과 홍차는 소설을 지배하는 중요한 단서이며 그 후 여러 장르의 작품들에서 다양하게 변주되거나 모티브로 사용되기도 했다. 


냄새를 맡으면 기억이 떠오르는 것은 냄새를 기억하는 중추가 자극 받았기 때문인데 이를 '프루스트 효과'라고 한단다. 나는 막 배달된 신문지의 잉크냄새가 가장 좋다는 사람을 보았고, 강아지 입냄새가 가장 좋다는 사람도 보았고, 먹다 남긴 신라면 국물 냄새가 가장 좋다는 사람도 보았다. 결국 무엇이 좋은 냄새이고 안 좋은 냄새인지는 너무도 주관적인 문제이다. 냄새야말로 결국 한 인간의 '본향'을 말해주는 증표 같기도 하다.


마르셀에게도, 폴에게도, 냄새로 촉발되는 기억이란 의도적으로 일깨울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기억은 우리의 무의식 아래 도사리고 있다가, 어느 날 아주 작은 감각의 자극에 의해 아무런 예감도 없이 밀려닥쳐오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그건 고소한 마들렌 굽는 향기일수도, 코가 맹맹해지는 독초 향일수도, 쿰쿰한 생선 비린내일 수도 있다는 얘기다. 실마리는 다만 조그맣고 평범해 보이는 것이다. 그것만이 숨겨진 내면의 지평을 연다. 그 마들렌, 독초, 생선은 빛나는 인생의 아주 작은 한 조각을 의미한다. 십만 피스 중 한 조각을 맞추는 순간, 모든 퍼즐은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마담 프루스트의 정원이 야기한 폴의 변화를 보면서, 결국 우리의 무의식 밑바닥에 인생의 다채로운 조각들이 가라앉아 있음을 또 다시 깨달았다. 그 조각들이 다 반짝이는 보석일리는 없을 것이다. 사금파리처럼 하찮고 시시한 것들이 우리 삶을 구성하는 본질이라는 것. 그건 어쩌면 현재의 내 아무렇지도 않은 소소한 일상이 중요하다는 의미이겠다. 웃음도 말도 없는 남자 폴의 잔잔하지만 치열한 모험담을, 웃음도 말도 없는 이 땅의 더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은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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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정이현(소설가)

1972년 서울 출생으로 단편 「낭만적 사랑과 사회」로 2002년 제1회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문단에 나왔다. 이후 단편 「타인의 고독」으로 제5회 이효석문학상(2004)을, 단편 「삼풍백화점」으로 제51회 현대문학상(2006)을 수상했다. 작품집으로 『낭만적 사랑과 사회』『타인의 고독』(수상작품집) 『삼풍백화점』(수상작품집) 『달콤한 나의 도시』『오늘의 거짓말』『풍선』『작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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