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그림책으로 마음 선물하기
수영장에 가고 싶을 때
몸이 자유롭게 물위를 떠다니듯 헤엄치는 즐거움
수영장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물살을 가르며 앞으로 나아가던 그 느낌을 온 몸이 기억해낸다. 출렁거리는 물결, 특유의 물 냄새까지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중력의 지배를 받는 땅과 달리 물속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아, 수영장에 가고 싶게 더운 날이다. 이렇게 무더운 날은 차가운 물속에 풍덩하고 들어가면 그만인데 싶어 입맛을 다신다. 무더운 날이 아니라도 가끔 수영장에 가고 싶을 때가 있다. 영화 <카모메 식당>에서 헬싱키에 식당을 차린 시치에가 수영장에 다니는 걸 봤을 때도, 사라 폴리 감독이 만든 <우리도 사랑일까>의 여주인공인 미쉘 윌리엄스가 수영하는 장면이 나왔을 때도 수영하고 싶었다.
수영장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건, 마치 동해안을 향해 차를 달려가다가 처음 푸르른 바다와 맞닥뜨렸을 때 탄성을 지르는 느낌, 바닷가에 도착해 모래사장을 겅중겅중 뛰어 바다 속으로 뛰어든 느낌, 뭐 그런 갈증에 가깝다.
수영장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물살을 가르며 앞으로 나아가던 그 느낌을 온 몸이 기억해낸다. 출렁거리는 물결, 특유의 물 냄새까지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중력의 지배를 받는 땅과 달리 물속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힘만 빼면 온 몸이 두둥 하고 물위에 뜬다. 안온하고 평화로운 물에 몸을 맡기면 엄마 뱃속에 있었던 때의 안락함을 느낄 수 있다.
스무 살에 처음 실내 수영장에 가본 후 몇 년에 한번 씩 동네 수영장에 다녔고 영법을 하나씩 배웠다. 강습과정이란 뻔해서 자유영 다음에 배영을 그리고 평영을 배우고 나면 접영을 가르쳐준다. 진득하지 않아 수영장에 들락거린 지는 오래지만 아직도 접영을 반쪽만 배웠다. 왜 이렇게 수영이 늘지 않나 생각해보니 나는 물을 좋아하는데 또 겁을 낸다. 수영하다 힘이 부치면 몸이 가라앉는데 이러다 빠져 죽는 건 아닐까 두려워한다. 동네 수영장 얕은 물을 무서워하는 겁쟁이다.
이지현의 『수영장』이라는 그림책을 펼쳤을 때 혹 이 소년도 나처럼 물을 좋아하면서도 불안해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한 소년이 넓고 네모진 수영장 앞에 서있다. 펼침 면의 한쪽 끝에 소년을 바짝 붙인데다 넓은 수영장에 비해 소년이 아주 작게 그려져 있다. 등을 조금 숙이고 있는 것이 뭔가 주저주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어디까지나 내가 그렇게 느꼈다는 것이고, 소년의 진짜 마음이 어땠는지는 독자마다 다르게 느끼리라.)
그러는 사이 한 무더기의 사람들이 커다란 보트와 고무튜브를 들고 우~ 하고 몰려왔다. 금세 수영장은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사람들로 가득 찬, 목욕탕이 되어버렸다. 이러면 들어갈 맛이 안 나는 법이다. 그만 집에 가버릴까 소년은 고민하지 않았을까. 여기까지 왔으니 그냥 갈 수는 없었던 듯 수영장에 걸터앉아 물에 발을 담그고 사람들을 쳐다보더니 뭔가 결심을 한다. 다이빙이닷!
이제부터 그림책은 다른 세상을 보여준다. 지금까지 보여준 단색의 세계가 아닌 컬러의 세상, 비좁은 수영장이 아니라 넓고 광활한 바다 속 환상의 공간으로 무대가 바뀐다.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수영장은 온갖 아우성에 귀가 따가울 지경이지만 물속으로 들어가자 고요한 정적이 흐른다. 기분 좋은 조용함이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소녀가 나타나 소년을 이끌어 바다 속을 하나하나 보여준다. 그러다 두 사람은 보고 만다. 흰 고래를!
좁은 수영장에서 물놀이를 한건지, 악다구니를 한 건지 모를 한나절에 지친 사람들이 잔뜩 피곤한 얼굴을 하고 수영장에서 나갈 때, 소년과 소녀도 물 밖으로 나온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만 같다. 소년이 만난 바다 속 세상은 모두 꿈인 걸까?
일러스트레이션학교 HILLS를 졸업한 이지현 작가의 첫 작품인『수영장』은 색연필의 터치가 그대로 느껴지는 푸른색이 가득한 그림책이다. 바닷물의 색도 다 다른 법이다. 비취빛 바다도 있고, 검푸른 바다도 있다. 흑해나 홍해처럼 바다 속 물질이나 플랭크톤의 영향으로 검게 혹은 붉게 보이는 바다도 있다. 하지만 이지현이 표현한 물빛은 겁먹지 않아도 좋을, 투명하게 맑아 속까지 한 눈에 들여다보이는 연한 푸른빛이다. 글자 없는 그림책인데도 이 푸른 물빛과 소년과 소녀와 고래가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작가는 2013년 볼로냐 국제어린이도서전에 ‘수영장’의 가더미를 들고 갔다가 국내에 책이 출간되기도 전에 스페인 출판사와 판권 계약을 했다. 영국에서 북아트를 공부하고 졸업 작품으로 만든 <Alice in Wonderland>를 2002년 볼로냐 국제어린이도서전에 들고 갔다고 편집자의 눈에 띄어 이탈리아 Corraini에서 첫 책을 출간한 이수지의 신화를 후배들이 이렇게 이어받고 있다. 책은 2014년 스페인에서 <La Piscina>(수영장이라는 뜻)으로 출간되었다.
나는 썩 수영을 잘하지는 못하지만 종종 멋지게 물을 가르며 수영하는 꿈을 꾼다. 중력에서 놓여나 새털같이 가벼워진 몸이 자유롭게 물위를 떠다니듯 헤엄치는 즐거움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들은 중력이니 자유니 하는 생각으로부터도 벗어나 그저 본능적으로 물을 좋아한다. 수영장에 가면 하루 종일 물을 떠나지 않고 놀고 놀고 또 놀지 않던가. 여름이 가기 전에 아이들과 수영장에 가야 할 사람들 혹은 이미 수영장에서 신나게 놀고 온 아이와 부모가 수영장을 떠올리며 읽으면 좋을 책이다.
※함께 선물하면 좋은 책
이수지 저 | 비룡소 | 원제 : Wave
바다에 놀러간 소녀와 파도의 이야기가 글자 없이 그림만으로 펼쳐집니다. 국내외에서 활발히 활동하며,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작가 이수지의 신작으로, 아이들의 시선과 심리를 섬세하게 표현해내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파도를 겁내던 어린 소녀가 파도와 부딪히면서 점차 마음을 열고 파도와 장난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게 되는데, 간단한 이야기이지만 생생한 그림으로 아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합니다.
[추천 기사]
- 누군가에게 꽃을 주고 싶을 때
- 시골에서 방학을 보낼 아이에게
- 불을 켜지 않으면 밤잠을 이루지 못할 때
-책을 좋아하는 당신에게 주는 선물
독일문학을 공부했고 웅진출판과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에서 일했다. 현재는 책과 출판에 관해 글을 쓰고 방송을 하는 출판칼럼니스트로 일하고 있다. [황정민의 FM대행진]에서 ‘한미화의 서점가는 길’을 진행하고 있으며, [한겨레신문]에 어린이책 이야기를 연재하고 있다.
그동안 『우리 시대 스테디셀러의 계보』 『베스트셀러 이렇게 만들어졌다 1-2』 등의 출판시평과 『잡스 사용법』, 『책 읽기는 게임이야』, 『그림책, 한국의 작가들』(공저) 등의 책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