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량해전 vs 명랑해적 : <명량>, <해적 : 바다로 간 산적>
여름 한국 영화 빅4로 불리는 <군도>, <명량>, <해적>, <해무>
지금 한국이라는 이상한 나라를 버텨내야 하는 우리 국민들에게 이순신이 보여주는 리더십은 일종의 이상향이다.
서울에만 500개에 가까운 상영관이 있다는데 솔직히 베스킨 라빈스 아이스크림 숫자보다 골라 볼 영화가 적다는 사실은 실망스러운 일이다. 여름 한국 영화 빅4로 불리는 <군도>, <명량>, <해적>이 거대 배급사를 등에 업고 1주일 간격으로 개봉했고 곧 <해무>가 개봉할 예정이라 사정은 더 심각해질 예정이다. 쇼박스가 배급을 맡은 <군도>는 1,300여개의 상영관을, CJ에서 배급을 맡은 <명량>은 자회사인 CGV를 중심으로 1,500개가 넘는 유래 없는 독과점으로 전국 극장을 초토화시켰다. 롯데에서 배급을 맡은 <해적> 역시 롯데시네마를 중심으로 900개의 상영관을 확보한 상태다. 다양성 영화들 중 일부는 그나마 예술영화전용관에서 선전하고 있지만, 문제는 규모가 작은 상업영화들이다. 주말을 시점으로 <명량>은 천만 관객의 영화가 되었다. 기쁜 소식이지만, 9월 추석 대목을 앞둔 대작들 틈에서 계속 밀려나는 작은 영화들도 있다는 사실은 잊지 말자.
영웅 권하는 시대, <명량>
<명량>은 신드롬이 되었다. 최단기간 1,000만 관객 기록을 갱신했다. 1,500개의 상영관을 선점한 것도 유래 없는 일이고, 개봉일 기준 최다 관객동원 기록도 세웠다. 그러다 보니 주변사람 모두 <명량>을 보았다고 말한다. 주말이면 SNS를 통해 보게 되는 지인들의 인증 샷도 대부분 <명량>이다. 지금 이 시대에 <명량>을 관람하는 것이 하나의 이벤트가 된 셈이다. 과연 <명량>이라는 영화가 천만 관객을 감동시키고 즐겁게 만드는 영화인가 하는 의문은 말끔하게 도려내지지 않는다. 만듦새의 아쉬움, 몇몇 단조로운 캐릭터, 무겁고 지루한 중반부의 이야기 등 단점도 두드러지지만, <명량>이 힘을 준 부분과 그 어법은 명확하다.
위정자들이 득세하는 세상, 백성을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내거는 영웅의 모습이 신파라 할지라도, 그 속에는 지친 사람들의 마음을 울컥, 움직이게 만드는 힘이 있다. 200억의 제작비를 들여 생생하게 살려낸 해상 전투신, 죽을 각오로 연기하는 최민식을 비롯한 배우들의 호연, 점점 더 골 깊어지는 반일감정 등 <명량>의 흥행 요인은 많지만, 가장 큰 흥행 요인은 ‘리더’가 없는 2014년 한국이라는 현실이다.
지금 한국이라는 이상한 나라를 버텨내야 하는 우리 국민들에게 이순신이 보여주는 리더십은 일종의 이상향이다. 잘 알려진 대로 <명량>은 조선 중기 정유재란 당시 이순신이 아주 작은 수의 조선 수군을 이끌고 왜군의 침입에 맞서 대승을 거두었던 명량해전을 배경으로 한다. 역사 속 이순신은 암울한 상황 속에서 빼어난 리더십과 전략으로 기적을 이끌어낸 사람이다. 이상적인 지도자를 잃은, 혹은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다고 생각하는 우리 국민들에게 이순신이야 말로 꿈꿔보고 싶은 기적인 셈이다. 이런 갈망이 폭발적인 흥행과 이어져 사회현상이 되었다. 게다가 이순신이라는 영웅이 ‘백성이 곧 충(忠)이요 천행(天幸)’이라는 메시지를 전하며 죽음도 불사하며 싸우는 모습에 울컥 감동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는 지금 대한민국의 정치인들처럼 민중을 이용하기 위해 앞서지 않는다. 그는 민중을 위해 앞서 싸운다.
하지만, 여기에 <명량>의 역설이 있다. 영웅을 필요로 하는 시대는 난세라는 말이다. 또한 한 사람의 영웅이 세상을 구하리란 막연한 믿음은 그저 짧은 위안에 지나지 않는다. 와중에 진중권 교수가 SNS를 통해 <명량>을 졸작이라 혹평했고, 박대통령과 김실장은 <명량>을 관람한 후 국민들이 이순신 장군처럼 힘을 내길 바란다고 했다. 각각의 입장에서 받아들이는 메시지에 입장차가 있는 모양새다. 오독하기에 <명량>의 메시지는 충분히 직설적이고 단선적인데 말이다.
명랑한 해적들, <해적 : 바다로 간 산적>
한국영화 빅4는 장르와 소재에 따라 다시 사극 빅3, 바다 빅3로 나뉜다. 사극이면서 바다가 나오는 작품은 <명량>과 <해적>이니, 두 작품은 일종의 직접적인 라이벌인 셈이다. <군도>의 서사는 경쾌했지만, 유쾌하지 않았고 <명량>의 메시지는 진중하지만 너무 무거웠다. 4편의 영화 중 무게감으로는 제일 떨어진다는 평가를 얻었던 <해적>이 제일 불리해 보이는 게임이었지만, 역설적으로 무겁지 않은 것이 <해적>의 가장 큰 장점이다. <해적>은 ‘명랑함’이라는 가벼움을 그 장점이자 특기로 내세운다. 개연성이 좀 없어도, 이야기의 결이 거칠어도 상관없다. 깃털처럼 가볍게 날듯이 즐기자는 것이 <해적>의 목표이다. <해적>은 생각하면서 보기 시작하면 쉽게 지치게 되는 영화다. 그냥 코미디로 봉합된 이야기조차도 재밌지 않냐는 넉살을 기분 좋게 받아들일 수 있다면 가족 단위의 관객들이 골고루 만족할만한 역할 정도는 할 수 있다.
조선 건국 보름 전 고래의 습격을 받아 국새가 사라진 사건을 배경으로 한 <해적>은 해적과 산적, 그리고 개국세력이 모여 벌이는 코미디에 집중한다. 미술, 분장, 음악, 의상 등 시대적 고증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해적>은 130억을 투자한 만큼, CG에도 공을 들였는데, 국새를 삼킨 귀신고래가 등장하는 장면은 그 세밀한 완성도 때문에 기대 이상이라는 평가를 얻었다. 드라마 <상어> 이후 다시 만난 손예진과 김남길 커플은 무거웠던 전작에 비해 노는 듯이 즐거워 보인다. 특히 진중했던 이미지에서 벗어나 깨방정을 떨어대는 김남길은 신선해 보인다.
<해적>이 고마워해야 할 인물은 철봉 역할의 유해진이다. 최초 해적이었으나 뱃멀미 때문에 산적으로 전향했다는 캐릭터도 재미있는데, 유해진은 빼어난 연기력으로 사소한 몸짓으로도 웃음을 선사한다. 쉴 새 없이 이어지는 수다와 오버 액션에도 밉지 않으니 감초 연기의 진수라 할만하다. 하지만 구멍 난 이야기를 메워주는 배우의 개인기도 후반부가 될수록 조금 피곤해진다는 것은 단점이다.
유해진 이외에 <해적>에는 오달수, 박철민, 김태우, 이경영, 신정근 등 빼어난 조연들이 등장하지만 이야기의 개연성이 없다보니 캐릭터의 존재감도 희미해진다. 이석훈 감독의 영화들은 왠지 어디선가 본 듯한 기시감을 준다. 독창적 코미디 영화로 인정받았던 <방과 후 옥상>은 <세 시의 결투>를 표절했다는 의심을 받은 적 있다. <해적>은 팩션 사극의 모양새는 하고 있지만, 그 형식이 참신하지 않아 <캐리비안의 해적>과 비교되는 숙명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 같다. 하긴, <해적>은 <캐리비안의 해적>으로 대표되는 코믹 어드벤처 장르영화의 노선과 그 가이드를 따르는 것을 처음부터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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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여행이 끝난 후 길이 시작되는 것 같다. 새롭게 시작된 길에서 또 다른 가능성을 보느라, 아주 멀리 돌아왔고 그 여행의 끝에선 또 다른 길을 발견한다. 그래서 영화, 음악, 공연, 문화예술계를 얼쩡거리는 자칭 culture bohemian.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후 씨네서울 기자, 국립오페라단 공연기획팀장을 거쳐 현재는 서울문화재단에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