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우 “신중한 사람을 위로하고 싶었다”
6년 만에 소설집 『신중한 사람』 펴내 소설을 쓰는 행위는 일기를 쓰는 것과 같다 자연은 내게 벅찬 존재
소설가 이승우가 이번 소설집에서 창조해낸 인물들은 모두 답답하다. 신중해서 답답하고, 신중해서 억울한 일을 당한다. 우리네 삶 속에 ‘신중함’은 필요한 성질이거늘, 지나친 신중함은 때에 따라 과오를 만들기도 한다. 작가는 왜 하나같이 답답한 인물들에 주목했을까.
신중한데 자꾸만 곤경에 빠지는 사람. 이승우 작가가 이번 소설집 『신중한 사람』에서 주목한 인물들이다. 8편의 소설은 읽다 보면 마치 연작으로 쓰여진 것 같다. 작가가 창조해낸 인물들은 현상을 바꿔야 할 때 생기는 시끄러움을 피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고 때로는 비겁해진다. 좀체 감정적으로 일을 저지르는 법이 없다. 현실의 불합리에 고통 받지만 결국은 스스로가 세상의 부조리를 유지시키는 주인공이 된다. 사건보다 현상에 탐닉하는 작가는 이번 소설집을 쓰며, 단문의 폭력성과 마주하게 됐다. 온전하지 않은 문장을 고치려 애를 쓰다, 앞문장을 비틀어 뒷문장을 완성했다. 인물들이 겪고 있는 혼란을 작가 스스로가 먼저 경험했다. 이승우 작가는 “이번 작품이 어떤 독자들에게는 답답하게 여겨질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의사소통에 실패해 불안을 겪는 인물들을 지켜보는 게, 곤혹스러운 일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인물들이 나와 다르지 않다고 느껴질 때, 독자는 비로소 작품에 빠져든다.
이승우 작가는 신중한 사람이지만 꽤 밝은 어조를 가졌다. 진지한 이야기를 한다고 낯빛이 달라지진 않았다. 6년 만에 펴낸 소설집 『신중한 사람』을 앞에 두고 만난 자리. 소설 속 주인공들의 신중한 성격이 작가에게도 묻어있지 않나 자꾸만 살펴보게 됐다. 작품에서 만난 인물들은 생각이 뒤엉킨듯한 모습이었지만 작가는 청명해 보였다. 주체 못할 이상적인 이야기를 꺼내는 법이 없었다. 평범한 진리를 이야기할수록 작가는 비범해 보였다.
세상은 예나 지금이나 힘들고 사람은 여전히 난해하다. 그래서 소설을 쓰지만, 그래서 소설 쓰기가 쉬워지지 않는다. 나는 맷집이 약하고 체력 역시 부실한 편이다. 생각을 너무 많이 하느라 행동하지도 즐기지도 못하는 내 인물들을 보면 언짢고 속이 상한다. 그들에게 미안하다. 나는 그들을 사랑하지만, 사랑하는데도, 그들에게서 세상의 고뇌를 벗겨내지 못했다. 그렇지만 내가 그들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나무라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어쨌든 나는 그들을 내버리고 다른 곳으로 달아나지 않았다, 못했다. 사랑하지 않으면서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어렵지만, 사랑한다고 말하고서 사랑하지 않기는 더 어렵다. 내가 내 인물들을 향해 굳이 사랑을 고백하는, 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이다.
( -『신중한 사람』, 작가의 말 )
소설을 쓰며 위로하고 싶었고 반성도 했다
2008년에 소설집 『오래된 일기』를 펴낸 후, 6년 만이다. 그간 장편 『지상의 노래』, 『한 낮의 시선』을 출간했지만 소설집은 오랜만이다. 실린 작품들을 보니 2010년부터 지난해까지 발표한 작품이다.
이번에는 창작집이 꽤 오래 걸렸다. 다른 때에 비해 단편들이 상대적으로 덜 써졌던 시기가 있었던 것 같다.
표제작이 「신중한 사람」인데, 다른 작품 속 인물들과도 겹쳐지는 부분이 많다. 마치 연작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우연히 코드에 맞았다. 다른 소설을 쓸 때도 다르지 않지만 이번 작품들을 쓸 때 유독 사람들의 내면의 움직임, 심리적 변화에 관심이 많았다. 바깥에서 일어나는 행동, 사건보다 그것들이 일어난 계기와 동기, 그것에 대응하는 내면의 움직임, 마음에 상태에 대해 많이 생각하면서 들여다보면서 글을 썼다. 연작을 염두에 두고 쓰진 않았는데 인물들이 대개 비슷하다. 너무 머뭇거리고 결정을 잘 못하고, 또 많이 당하고 억울해 하고. 또 그 안에서 자기기만을 통해 현실을 수용하는 인물들이 많이 탄생했다.
‘신중하다’는 단어는 대개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한다. 하지만 소설에서 만나는 ‘신중함’은 인물 스스로를 힘들게 만드는 원인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부정적이다.
여러 함의를 넣고 싶었다. 우리는 신중해야 하는데, 너무 신중하지 않게 살고 있다. 느낌만을 강조한 채 행동이 너무 앞선다. 그런데 반대로 신중하기 때문에 피해를 입고 자기 이익을 챙기지 못하는 일들도 상당히 많다. 신중한 성격 때문에 당하는 불이익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고, 신중함을 내세워서 현실과 적극적인 대응을 하지 않고 스스로를 합리화해 자기의 모순을 받아들이는 이중적인 모습을 말하고 싶었다. 세상의 부조리를 용인하기 위한 수단으로 자기합리화를 이용하는 인물의 내면을 들여다보면서 소설을 썼다. 그런 면에서는 반성적인 글쓰기라고 할 수 있다.
「신중한 사람」의 주인공 Y는 신중함 때문에 계속 곤경에 빠진다. 은퇴 후 전원생활을 꿈꿨지만 아내와 딸의 압력에 못 이겨 해외파견근무를 가게 되고, 3년간의 타국 생활을 끝내고 집에 와 보니 낯선 세입자가 들어와 살고 있었다. 이런 어이없는 상황에도 Y는 타협 아닌 타협을 한다. 작가 스스로도 Y와 닮은 점이 있다고 말했는데.
갈등이 생기면 부딪혀 해결하기보다는 그 자리를 뜨는 스타일이다. 오해가 생겨도 ‘오해를 풀어야 해’라는 생각보다는 ‘언젠가는 풀리겠지’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이런 사람들은 이해해서 받아들이는 게 아니니까, 생각을 많이 하기 마련이고 내면의 움직임이 복잡하다. ‘작가의 말’에 쓴 것처럼 생각이 많으면 그 순간을 즐기지 못한다. 즐긴다는 건, 생각이 없는 상태 아닌가? 생각이 빠져버린 상태여야만 즐길 수 있기 때문에 생각을 내려놓아야 한다. 생각만 계속하는 사람은 순간을 즐길 수 없다.
생각이 많은 사람은 우유부단한 경우가 많고, 우유부단한 사람은 대개 착하다.
신중한 건 좋지만, 우유부단한 성격 때문에 나쁜 일을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개혁을 하지 않으니 나쁜 구조가 계속 공고화된다. 나쁜 구조와 마주할 때, 갈등하더라고 부딪혀야 변화가 가능한데 비겁하게 회피하니까 그 구조는 공고화된다. 신중한 건 좋은 성질이지만, 그것 때문에 나쁜 구조가 공고화되니까 결국 신중함은 나쁜 것이 되어 버리는, 어떻게 보면 역설이다.
“소설 속 인물들을 보면 언짢고 속이 상한다”고 말했다.
그런 인물들에 대한 애정이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억울하게 당하는 사람에 대한 연민이랄까. 그런 사람들을 위로해주고 싶고, 편을 들어주고 싶다. 하지만 그 인물이 나 자신으로 여겨질 때, 반성적인 글도 쓰고 싶었다.
어떻게 보면, 현대적인 인물이라고 볼 수 없는 캐릭터다.
사유에 따라 행동이 나타나니 전근대적인 캐릭터라고 볼 수 있다. 현대적인 인물은 몸이 느끼는 대로 움직이는 감각적인 캐릭터지만, 내 소설 속 주인공들은 자기가 그 일을 왜 하는지에 대한 자기설득이 일어난 후 움직이는 인물이다. 아무것도 안 하거나, 못하거나. 의미 있는 대응을 바로 못한다는 점에서는 다소 답답할 수 있다.
이번 소설집에서 특히 애틋한 인물이 있었나?
모든 인물이 애틋하다. 「오래된 편지」에 나오는 인물은 자기중심적으로 세상을 받아들이면서 자기 편리에 따라 살아가고, 「딥 오리진」의 주인공은 망상을 통해 자기 내면의 콤플렉스를 극복하는데, 이 두 인물을 제외한 다른 인물들은 타인으로부터 정신없이 휘둘러지고 그것들을 쏟아낼 줄 몰라서 속병이 난다. 「신중한 사람」 주인공 Y는 의사로부터 “환자 분이 병에 적응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심각한 상태인데 적응을 해서 아무렇지 않게 된 거다. 증상으로 나타나지 않은 거다. 얼토당토않은 세상인데도 그걸 용납이 가능한 상태로 적응모드가 형성된 거다. 이런 사람들은 약하고 적극적이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욕망이 없는 건 아니다. 자기를 과시하지 못하는 성격 이면에는 자기합리화와 비겁함, 우유부단함이 있다. 이런 인물들에 대한 애정이 이 소설을 쓰게 만들었는데, 이 두 가지 이면을 독자들이 읽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딥 오리진」의 주인공인 작가는 “모든 사람이 자기 책을 읽고 있다는 터무니없는 착각에 빠진 적이 있다”고 고백한다. 작가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빠져볼 만한 착각 아닌가?
나 역시 첫 소설집이 나왔을 때, 그 기분을 잊을 수 없다. 내 이름을 달고 나온 첫 책이었는데, 책방에 가서 그 책을 봤을 때의 기분이 아직도 생생하다. 책이 쌓여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하나 놓여져 있을 뿐이었는데, 뭐랄까 굉장히 충만한 느낌이었다(웃음). 세상의 모든 독자들이 자신의 책을 읽을 것이라는 착각은 책 3권쯤 쓰면 없어진다는 옛날 이야기가 있는데(웃음). 나는 지금까지 화려한 작가 생활을 한 적도, 내 작품이 베스트셀러가 되어 문학의 중심에 서본 적도 없지만, 30여 년 동안 소설을 써왔다는 어떤 문학적 자의식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들이 관찰된다. 이건 비단, 글 쓰는 작가의 욕망에만 관련된 이야기가 아니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욕망과 실현 가능성 사이에 부딪히는 문제와 갈등이 있다. 이걸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중요한데, 질투심으로 표현되기도, 극단적인 망상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질투의 힘」이라는 시도 있고 영화도 있지 않은가. 인간의 본성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딥 오리진」은 동명의 커피전문점(Deep Origin)에서 벌어진 일로 시작된다. 작가가 주인공인 작품을 읽다 보면, 자연스레 주인공에 저자를 대입시키게 된다. 카페에서 글을 쓰는 작가들이 많아지고 있는데, 저자 역시 카페에서 글을 즐겨 쓰나?
2009년에 1년 정도 런던에 있을 때, 카페나 펍에서 글을 많이 썼다. 주로 많이 걸어 다녔으니까 카페를 많이 가게 됐다. 여러 카페, 펍에서 책도 읽고 글도 쓰다가 한국에 왔는데, 1년 사이에 한국이 확 변했더라. 우선 카페가 엄청나게 늘었다. 2009년에 런던에 갈 때만해도 이렇게 카페가 많지 않았다. 지금은 동네를 걷고 있으면 모조리 커피전문점이다. 아이패드, 태블릿 같은 휴대용 기기가 빠르게 보급되면서 카페가 일종의 휴대 사무실이 됐다. 이제는 오히려 방에서 글을 쓰면 답답한 느낌이 든다. 집이라는 공간 안에는 식구들이 있고, 아주 작은 소리도 나하고 관련된 소리인데, 카페는 어떤 소음도 나와 관계가 없으니까 시끄러워도 괜찮다. 나를 간섭하는 게 별로 없으니까, 편한 공간이 됐다. ‘딥 오리진’은 실제 우리 학교 동네에 있는 카페다. 원래 제목을 소설의 첫 문장인 ‘그녀는 그가 한 달 열흘 만에 나타났다고 말했다’로 지었는데, 너무 긴 감이 있어서 소설에 등장하는 카페 이름으로 바꿨다. 요즘 이 카페를 자주 못 갔는데, 제목을 빌려 썼으니 책을 한 권 가져다 줘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다(웃음).
이번 소설집 작품 중에 런던에서 쓴 작품이 있나?
「칼」과 「이미, 어디」를 런던에서 썼다. 한국을 떠나 있어서 그런지, 굉장히 자유롭게 글을 썼던 것 같다.
「이미, 어디」는 유독 앞 문장을 조금씩 비틀어 반복하는 문장들이 많다. 비슷한 문장의 반복이 오히려 앞 문장을 곱씹어 읽게 만든다.
내면적인 이유를 꼽자면, 내가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에 관심이 많았다는 증거일 거다. 문장을 하나 쓰면, 이게 충분하게 느껴지지가 않았다. 불완전한 느낌이고, 하나의 문장으로 이 사람의 심리를 드러내는 게 미흡하다고 여겨졌다. 그래서 문장을 더 쓰게 됐다. 그 단계에서 문장을 비틀거나 비슷한 표현을 쓰게 됐는데, 뉘앙스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상태를 드러내는 부분이 많았고, 불완전한 문장에 대한 욕심이기도 했다. 단문이 굉장히 폭력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문은 단언하고 규정하는 거니까. 한 문장을 써 놓고 그 문장을 이해하려고 하는데, 다음 문장이 앞 문장을 부정하게 되고. ‘이게 뭐야?’ 하다가 ‘이거야 말로 진실이 아닌가?’ 싶었다. 아무 말을 하지 않아서 불명료한 게 아니라, 인간 내면에 처음부터 존재했던 복잡함. 자신도 알지 못한 상태에서 일어나고 있는 혼란, 그런 것들을 표현하고자 했다.
유머로 느껴지기도 했다. 이승우 작가의 평소 문장과는 달리 느슨한 구조로 쓰여졌다는 생각도 들고.
원래 이야기 구조가 튼튼하게 맞지 않는 걸 무척 싫어하는데, 한국을 벗어나 쓴 작품이라서 그런지, 편안하고 여유로운 상태에서 쓴 느낌이다. 나를 규정하는 것들이 없는 공간이었으니까, 표현이나 구조적인 면에서 강박적이지 않고 자유롭게 간 부분이 있다. 「이미, 어디」는 이미 떠나왔지만 어디에도 오지 않은, 애매모호한 정체성을 가졌다. 선명하지 않고 흐릿한데, 그렇지만 아무 것도 안 하는 것은 아닌, 보이긴 하는데 뭘 하는지 모르겠는. 약간 말장난처럼 느껴진 부분이 있겠지만 나는 진지하고 재밌게 썼다.
소설 쓰는 행위는 일기 쓰는 일과 같다
작가 이승우의 이야기도 궁금하다. 고등학생 때 이청준의 단편 「나무 위에서 잠자기」를 읽고, 어떤 전율을 느껴 문학에 매료됐다고 들었다. 그런데 대학에서는 신학을 전공했다.
가족사적인 복잡한 부분이 있어서 그랬겠지만, 어린 시절의 나는 세상에 대해 굉장히 위축되어 있었고 자폐적인 면이 많았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됐을 때 모든 걸 무아 시키는 종교적인 체험을 하게 됐는데, 그 때 만난 종교가 나에겐 도피처가 됐다. 완전히 그 쪽으로 몰두하게 됐고, 식구 가운데 기독교인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치열한 싸움을 해야 했다. 힘든 싸움을 하면서 결단을 내렸지만, 신학교에 적응을 잘하지 못했다. 교회의 리더에게 요구하는 굉장히 밝고 사교적인 면이 나에겐 없었으니까. 새로운 사람들하고 관계 맺는 일이 어려웠다. 그렇지만 공부를 계속 했는데, 교회라는 공동체 안에서는 내가 쓸모 있는 사람이 못 되니까 지속하기가 힘들었다. 대학에 다닐 때 소극장 운동이 활발했는데, 연극을 열심히 봤고 문학을 놓지 않으면서 작가가 됐다. 중고등학생 때까지 문예반을 줄곧 했고, 신학을 하면서 약간 주춤했다가 휴학하면서 다시 이청준을 만났다. 그의 작품들을 읽으며 등단했다.
소설가의 꿈은 뒤늦게 갖게 된 건가?
신학교에 다닐 때만해도 작가가 되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자신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뭔가 글과 관련된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고등학생 때는 시를 더 많이 썼기 때문에 소설가는 생각도 못했다. 군대를 가려고 신체검사를 받았는데, 폐결핵이 있어서 1년 동안 요양을 하다가 소설을 쓰게 됐고, 그게 등단작이 됐다.
수도원을 배경으로 한 『지상의 노래』를 비롯해 '교황저격사건'을 모티브로 한 첫 장편소설 『에리직톤의 초상』 등 신성과 세속, 신과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작품화했다. 신학을 공부한 경험이 소설가가 되기까지,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것 같다.
어쩔 수 없이 그러지 않았을까. 지금은 넓어졌을지 모르지만, 문학 초기에는 협소한 세계 속의 경험밖에 없었으니까. 문학적으로 많은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신학 공부를 안 했으면 어쩌면 소설가가 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글을 썼더라도 다른 소설을 썼을 거고. 내 문학을 만든 중요한 요인 중 하나가 신학생 때 읽었던 책들이다.
『생의 이면』을 쓰기 전까지는 “고향은 도망가고 싶은 곳,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곳”이라고 말했다. 대개 작가들은 고향에서 보고 경험한 것들을 자신의 문학세계에 많이 반영하는데.
요즘은 장흥을 자주 간다. 화해라는 말은 이상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고향과 화해한 것 같다. 예전에는 도망가고 싶은 곳이었지만 요즘은 고향 생각을 많이 한다. 어쩔 수 없이 고향의 어떤 부분들이 내 소설에 들어오는 것 같다. 산천을 쓰든, 바다 이야기를 하든, 뭘 쓰든 고향에서 봤던 이미지, 모티프가 들어온다. 한승원 작가가 장흥에 집을 짓고 사는데, 50대 후반에 왔다고 하더라. 나는 몇 년 남았으니까 좀 기다려 봐야지 생각하고 있다(웃음).
도시를 떠나고 싶다는 생각은 없나?
나는 도시가 좋다. 뜻밖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난 시골 사람이지만 자연이 힘들 때가 있다. 잠깐 있는 건 괜찮지만 자연은 내게 감당하기 힘들고 벅찬 존재다. 도시는 그래 봤자 사람이 만든 거니까 만만하지 않나? 도시의 골목을 걸어 다니는 걸 좋아하는데, 자연은 좀 힘들다.
여행을 즐기진 않나?
그렇게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어디를 가면 열심히 보지만, 어디를 막 가고 싶다는 생각은 안 한다. 어릴 때부터 어디에 가만히 앉아서 뒹굴 거리고 걸어 다니면서 생각하는 걸 좋아했다. 여행을 가서 경이로운 풍경이나 유적에 반하는 게 아니라, 사람들과 음식, 풍물들이 더 인상 깊게 여겨진다. 여행에 대한 갈망은 없는 편인 것 같다.
14년간 대학에서 문예창작을 가르치고 있다. 요즘은 문청이 점점 적어지고 있지 않나? 요즘 학생들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나?
반짝 반짝하고 맑고 감각적인 친구들이 많은데, 치열함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있다. 문학에 대해 갈급한 아이들도 있지만 대체로 한가하다. 문학에 임할 때는 필사적인 게 있어야 한다. 그래서 수업 시간에도 정신적인 교육을 많이 한다. 마음의 문제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뭔가 필사적으로 문학에 몰두하는 게 필요한데, 요즘 아이들은 관심 가져야 할 것도 많고, 스스로를 의미 있게 만드는 것도 많으니까. 아쉬운 마음이 든다.
이제 학생들을 보면, 작가의 기질이 있는지 없는지가 쉽게 파악될 것 같다.
대개 3,4학년 때가 돼서 보이는 아이들이 많다. 어느 순간 반짝하면서 어느 지점을 돌파하는 아이들이 있다. 고등학교 때부터 소설을 많이 써보고 준비된 상태에서 대학에 오는 아이들이 있는데, 불완전한 채로 틀만 만들어진 건 좋지 않다. 반대로 이과를 전공하다가 전과를 했는데, 처음에는 엉망이었다가 어느 순간 방향을 제대로 찾는 아이들이 있다. 굉장히 반가운 경우다. 미리 틀을 만들어 놓은 경우가 오히려 좋지 않다.
‘22살의 천재’라는 찬사를 들으며 등단해 33년간 작품 활동을 해오고 있다. 2006년에 펴낸 창작론 『당신은 이미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에서 “작가는 여러 권의 책을 통해 한 편의 자서전을 쓴다”고 밝혔는데, 앞으로는 어떤 색깔의 자서전을 쓰고 싶나?
어떤 작품을 쓰겠다는 계획 같은 건 없다. 조금씩은 변하겠지만 변화에 대한 큰 갈망은 없다. 변한다고 하더라도 크게 변하진 않을 것 같다. 문학적으로 탄력성이 있는 친구들이 있는데, 나는 변화에 대한 필요를 느껴서 의도적으로 변하고 싶지는 않다. 시대와 딱 떨어지는 작품을 쓰지 못한다 하더라도, 일부러 그 시대에 맞게 쓰고 싶은 마음은 없다. 소수의 독자라도 소통할 수 있으면 그걸로 충분하다. “한 편의 소설은 그 때까지 그 작가의 삶의 총체”라는 말이 있다. 작가에게 작품은 삶의 총체다. 등단 전까지는 일기를 꾸준히 썼지만 지금은 일기를 쓰지 않는다. 나에게 소설을 쓰는 행위는 일기를 쓰는 것과 같다. 소설은 다 허구지만 내 일기와 다르지 않다. 일기를 통해 얻어내는 효용을 소설을 통해 얻고 있고, 내가 사는 이 시점에 내가 하는 생각, 나의 가치관을 소설로 표현할 수 있기 때문에 소설가로 사는 게 좋다. 따로 자서전을 쓰지 않아도 되니까 좋지 않나?(웃음). 그 순간,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을 하자는 주의다. 결과가 늘 그렇지는 않지만, 마음은 늘 그렇다.
독자들이 『신중한 사람』을 어떻게 만나면 좋을까?
찬찬히 읽고 찬찬히 만났으면 좋겠다. 스토리가 긴박하게 전개되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답답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인물이 그냥 걸어가는데, 왜 걸어가는지, 어떻게 걸어가는지에 대해 관심을 갖고 읽으면 흥미로울 수 있지 않을까? 가령 1분을 촘촘하게 잘라서 생각하면 굉장히 긴 시간이 될 수 있다. 반대로 1,2시간 단위로 생각하면 1분은 너무 작다. 한 사람의 일생도 한 문장으로 압축할 수 있는데, 시간의 단위를 키우지 말고 시간의 단위를 바꿔서 생각해보면 어떨까, 싶다. 1분도 일생처럼 느낄 수도 있다. 주문이 너무 까다로울지 모르겠지만(웃음). 생각의 흐름을 따라 읽는 사람이라면 재밌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신중한 사람 이승우 저 | 문학과지성사
이번 소설집에서는 죄의식에 대한 깊은 탐구와 더불어 인간 심리의 미로, 욕망의 어두운 지대를 겨냥하고 있다. 물론 그 미로의 맞은편에 자리한 편집증적 망상과 자기기만을 강요하는 막무가내의 부조리한 현실도 지적한다. 이는 『생의 이면』(1993)에서 보여주었던 인류의 원죄 의식이나 『에리직톤의 초상』(1981)이 제기하는 ‘현실 사회에서의 죄의 실체’에 대한 문제적 의문, 「일식에 대하여」에서 인식하는 ‘고귀한 삶이 불가능한 곳’으로서의 현대 사회에 대한 인식 등과도 맞닿는다. 이번 소설집에는 그간 작가가 보여준 문제의식과 세계관이 결집되어 있다고도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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