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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메타나, 체코적인 스타일의 음악을 창조하다
스메타나, 교향시 <나의 조국>
메타나는 유럽 전역을 휘몰아쳤던 1848년 혁명의 열기 속으로 빠져듭니다. 아마도 그는 기질적으로 뜨거운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게다가 스물네 살의 혈기 방장한 청년이었습니다.
체코의 음악가로 누가 떠오르시는지요? 아마 안톤 드보르작(1841~1904)이 제일 먼저 생각날 겁니다. 이어서 베드르지히 스메타나가 떠오르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드보르작보다 17년 연상의 음악가입니다. 국제적 명성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드보르작보다 조금 덜 알려진 사람이지요. 지금도 그렇고 당대에도 그랬습니다. 하지만 ‘체코의 민족음악’이라는 기준에서 보자면 드보르작보다 훨씬 더 강렬하게 민족적인 색채를 보여줬던 음악가입니다.
작곡가였을 뿐 아니라 피아니스트, 지휘자, 비평가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자신에 대해 “순수하게 체코적인 스타일의 음악을 창조한 사람”이라고 자평하기까지 했지요. 물론 음악적 권위가 공고하지 못했던 젊은 시절에는 감히 그런 말을 할 수 없었을 겁니다. 스메타나는 1884년에 세상을 떠났는데요, 자신을 체코 민족음악(국민음악)의 창시자로 스스로 일컬었던 것은 거의 만년에 이르러서입니다. 그리고 이 말은 지금까지도 거부감 없이 인정되고 있는 스메타나 음악의 정체성이기도 합니다.
알려져 있다시피 드보르작은 함부르크 태생의 음악가 브람스에게 인간적으로나 음악적으로 깊이 경도돼 있었지요. 어찌 보면 그것은 당연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황제 프란츠 요제프가 그 유명한 합스부르크 왕가의 왕위를 계승한 것이 1848년, 그의 나이 18세였을 때였습니다. 한데 그가 단지 독일,오스트리아의 황제이기만 했던 것은 아니지요. 오늘날의 헝가리와 체코의 전부, 또 이탈리아와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 폴란드, 러시아의 일부까지도 그의 지배하에 놓여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당시의 체코는 독일,오스트리아와 문화적 유대감 이상의 거의 일체감을 갖고 있었다고 볼 수 있지요. 체코는 크게 두 지역으로, 서쪽의 보헤미아와 동쪽의 모라비아로 나뉘는데요, 이 지역에서는 오랫동안 약 70%의 체코인과 30%의 독일인이 함께 살았습니다. 공식 언어는 당연히 독일어였지요. 황제 요제프가 지배했으니까요. 하지만 일상적 삶에서는 체코어가 끈질기게 이어졌을 겁니다.
베드르지흐 스메타나( 1824년 3월 2일 - 1884년 5월 12일)
이런 시대적 배경 속에서, 체코 출신의 음악가 드보르작은 독일,오스트리아를 바라보면서 음악을 했습니다. 물론 어린 시절에 이미 형성된 토속성이나 민족적 선율 같은 것들은 그의 음악에서도 여전히 느껴지지요. 그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반면에 스메타나는 보다 의식적으로 체코의 민족음악을 건설하려는 목표를 지녔던 음악가라고 해야겠습니다. 물론 그도 거의 평생토록 리스트를 존경했을 뿐 아니라 바그너를 흠모해서 그의 스타일을 자신의 오페라 속으로 가져오기도 합니다. 그 덕분에 한때는 체코의 민족음악을 추구하던 그룹 안에서 “배신자” 소리를 듣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식의 부분적 논란에도 불구하고, 스메타나는 오늘까지도 체코 민족음악(국민음악)의 아버지라는 상징적 권위를 누리고 있습니다.
아마 그 결정적 계기는 1866년에 있었던 오페라 <팔려간 신부>의 초연일 겁니다. 그 해에 체코 국립극장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가설극장(임시극장)에서 공연된 오페라 <팔려간 신부>는 엄청난 성공을 거뒀습니다. 체코어로 체코의 이야기와 정서를 담아낸 이 오페라는 지금까지도 체코 오페라의 정수로 평가받습니다. 그래서 1866년은 스메타나가 민족음악가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다진 해였다고 할 수 있지요. 참, 스메타나는 당시 가설극장의 상임지휘자이기도 했는데요, 30명가량의 단원들로 이뤄진 오케스트라에는 20대 초반의 드보르작도 앉아 있었습니다. 당시의 드보르작은 오케스트라에서 비올라를 연주했지요. 그러니까 스메타나와 드보르작은 한때 날마다 얼굴을 맞대는 사이였습니다.
스메타나는 1824년 체코 보헤미아 북쪽의 리토미슐에서 태어났지요. 아버지는 마을에서 맥주 양조장을 했습니다. 위로 딸을 일곱이나 낳고는 마지막으로 얻은 아들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기억하는 체코의 음악가 스메타나였습니다. 아버지는 생업으로 양조업을 택했지만 지역의 아마추어 바이올리니스트이기도 했지요. 덕분에 스메타나는 아주 어린 나이에 음악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열여섯 살 썼던 일기에 이렇게 기록돼 있습니다. “네 살이 됐을 때 아버지가 리듬을 가르쳐주셨다. 다섯 살에 학교에서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배웠다. 일곱 살 때는 오페라 <포르티치의 벙어리 소녀>의 전주곡을 연주했다.”(*인용문에 등장하는 <포르티치의 벙어리 소녀>는 다니엘 오베르(Daniel Auber, 1782~1871)가 작곡한 프랑스 오페라.)
그렇게 음악에 첫발을 들여놓았던 스메타나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열아홉 살에 프라하로 갑니다. “리스트 같은 연주자, 모차르트 같은 작곡가가 되겠다”는 꿈을 품은 채였지요. 그는 프라하에서 어느 백작의 집 자녀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면서 요제프 프로크슈(Josef Proksch, 1794~1864)에게 음악을 배웠습니다. 맹인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였던 그는 스메타나에게 바흐와 베토벤에서부터 쇼팽과 리스트에 이르기까지, 많은 것을 가르쳤다고 하지요. 그 3년 동안의 수업은 스메타나가 받은 가장 중요한 음악교육이었습니다.
이어서 스메타나는 유럽 전역을 휘몰아쳤던 1848년 혁명의 열기 속으로 빠져듭니다. 아마도 그는 기질적으로 뜨거운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게다가 스물네 살의 혈기 방장한 청년이었습니다. 제가 앞서 연재한 칼럼들에서도 여러 차례 언급한 바 있지만, 1948년에 유럽 곳곳에서 벌어졌던 시민 혁명은 보수 반동적인 빈체제에 대항하는 봉기였지요. 빈체제는 1814~15년 빈회의 이후에 성립된 체제, 철혈재상으로 불린 메테르니히의 이름을 따서 ‘메테르니히 체제’로도 불립니다.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이 일으킨 전쟁에 대한 반대 급부였다고 할 수 있겠지요. 빈체제의 수호자들은 프랑스 혁명 이전의 구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자유주의와 민족주의를 억눌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보수 반동에 대한 반발이 바로 1848년 혁명이었고, 청년 스메타나는 그 혁명의 열기를 한복판에서 겪으면서 ‘보헤미아 민족주의자’로 거듭나게 됩니다. 물론 이후의 행적에서 그가 남기는 약간의 의혹이 있습니다만, 어쨌든 이 무렵부터 스메타나는 자신의 민족적 정체성에 눈을 떴고 그것은 당대의 역사적 흐름이었다고 봐야 하겠습니다.
그런 경향을 대표하는 음악이 앞서 말한 희극 오페라 <팔려간 신부>, 그리고 오늘 듣는 교향시 <나의 조국>입니다. 제목에서부터 민족주의적인 색채가 확연히 느껴지는 <나의 조국>은 모두 6곡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말하자면 ‘교향시 연작’이라고 할 수 있지요. 시인 황지우의 시 ‘활엽수림’에는 ‘스메타나, 몰다우강(江) 쏟아지는 학림(學林)다방, 목(木)계단에 오줌을 갈기거나’라는 표현이 등장하는데요, 바로 그 몰다우강은 이 교향시의 두 번째 곡입니다. 아마도 스메타나가 남긴 모든 음악 가운데 가장 인기 있는 곡이 아닐까 싶습니다.
제가 리스트의 교향시 <전주곡>을 설명하면서, 교향시란 간단히 말해 ‘관현악으로 한 편의 시를 쓰는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지요? 리스트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은 음악가인 스메타나도 6곡의 교향시를 썼고 그것을 하나의 연작으로 남겼습니다. 50세였던 1874년부터 6년에 걸쳐 작곡한 대작입니다.
자, 이 무렵이 되면 스메타나는 체코의 국민음악가로서 확고한 명성을 구가했지만 개인적으로는 우울하고 병든 상태였습니다. 사실 그의 개인사는 불행의 연속이었다고 할 수 있지요. 수년간의 구애 끝에 1849년 결혼했던 아내 카테리나 콜라르로바와의 사이에서 딸을 넷 낳았는데 그중 셋이 어려서 죽습니다. 큰 딸 베드리지슈카의 죽음을 슬퍼하며 작곡한 음악이 바로 ‘피아노 3중주 g단조’이지요. 게다가 아내가 1859년에 폐병으로 사망합니다. 그녀의 얼굴은 사진으로 남아 전해지고 있는데 매우 빼어난 미모를 지니고 있습니다. 스메타나는 첫번째 아내가 세상을 떠난 이듬해에 16세 연하의 여인 베티나 페르디난도바와 결혼하지만 두 사람은 그리 살가운 사이가 아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스메타나는 귀까지 멀고 맙니다. 그가 남긴 글에 따르면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프고 귀에서는 윙윙 소리가 났다고 합니다. 아마도 심각한 뇌경색이 아니었을까 짐작됩니다. 현기증이 나고 가끔 말투도 어눌했다고 합니다. 물론 청각장애는 그의 오래된 지병이긴 했지만, 급기야 1874년 10월부터는 완전히 듣지 못하게 됩니다. 이런 상태에 이른 그는 체코 국립극장의 지휘자를 사임하고 카테리나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 중에서 유일하게 세상에 살아 있는 조피를 찾아 갑니다. 프라하에서 북쪽으로 60km쯤 떨어진 야브케니체(Jabkenice)라는 마을이었지요. 조피의 남편, 그러니까 스메타나의 사위인 요제프 슈바르츠가 그 지역의 삼림 관리인이었다고 합니다. 스메타나는 그 숲 속의 작은 단층집에서 거의 은둔하다시피 합니다.
<나의 조국>은 바로 그곳에서 완성된 음악이지요. 1곡 ‘비셰흐라트’(Vysehrad)는 몰다우 강변의 성(城) 비셰흐라트의 위풍당당함과 그 곳에 담긴 역사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프가 연주하는 네 개의 하강음을 모티브로 삼고 있지요. 2곡은 바로 그 유명한 ‘몰다우강’입니다. 체코어로는 블타바(Vltava) 강이라고 하지요. 몰다우강의 시원과 흐름을 묘사하고 있는 음악입니다. 이 강은 두 개의 물줄기가 합쳐져 하나의 강을 이룬다고 하는데, 플룻이 시원이 되는 샘물을, 이어서 클라리넷이 또 하나의 물줄기를 묘사합니다. 이 두 개의 물이 합류해 도도한 흐름을 이룹니다. 숲과 축제의 들판, 전설 속의 요정들이 펼치는 달빛 아래의 춤, 급박하게 요동치는 급류를 지나 1곡에서 묘사했던 바셰흐라트의 성에 마침내 도달하지요. 작은 샘물에서 시작해서 점차 장대하게 굽이치며 흘러가는 강물의 흐름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음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곡 ‘샤르카’(Sarka)는 체코의 전설 속에 등장하는 여전사 샤르카, 남자들에게 잔혹한 복수를 펼치는 그녀의 이야기를 음악으로 풀어놓고 있습니다. 4곡 ‘보헤미아의 숲과 초원에서’는 아름다운 보헤미아의 풍광을 묘사하는 음악이지요. 5곡 ‘타보르’(Tabor)는 15세기 초반 후스 교도들의 종교적 저항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보헤미아의 종교개혁가 후스는 체코인들의 영웅이고, 민족주의 운동 시기였던 19세기 중반에도 정신적으로 큰 영향을 미친 인물입니다. 곡의 제목인 보헤미아 남쪽의 ‘타보르’는 후스 교도들의 본거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6곡은 ‘블라니크’(Blanik)인데, 이것도 역시 지명입니다. 후스 교도의 영웅들이 잠들어 있는 곳이지요. 역사의 영웅들이 부활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교향시 연작 <나의 조국>은 풍경과 역사가 어울린 전형적인 민족주의 서사를 펼쳐놓고 있습니다.
스메타나는 귀가 안 들리던 시기에 이처럼 장대한 민족적 서사시를 썼습니다. 아울러 기억할 것이 또 있습니다. 같은 시기에 썼던 현악 4중주 <나의 생애로부터>는 순전히 개인적인 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일생을 돌아보는, 슬픔과 회상의 자서전과도 같은 음악입니다. 이 곡도 꼭 들어보시길 권합니다. 스메타나는 1884년에 정신착란을 일으켜 같은 해 4월에 프라하의 한 병원에 입원했고 5월 12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보편적으로 가장 많이 선택받는 음반이다. 바이올리니스트 얀 쿠벨릭의 아들인 라파엘 쿠벨릭(1914~1996)은 서구적 세련미를 체코의 음악에 융합했다는 평을 듣는다. 체코 필하모닉의 지휘자였던 그는 1948년 서방에 진출해 자국의 음악을 널리 알렸다. 말러의 음악에서도 빼어난 녹음들을 남기고 있다. 보헤미아적 토속성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체코의 옛 명장인 바츨라프 탈리히, 카를 안체를 등의 이름이 먼저 떠오를 수도 있겠다. 이에 비한다면 쿠벨릭은 보다 깔끔하고 아름다운 음색, 정교한 연주를 들려준다. 1990년 ‘프라하의 봄’ 축제에서 체코 필하모닉을 지휘한 실황(Sup)은 음반보다는 영상으로 접하는 것이 좋겠다.
▶바츨라프노이만, 체코필하모닉오케스트라/1975년/Sup
쿠벨릭에 비하자면 좀더 흙냄새가 나는 연주라고 할 수 있다. 이 녹음은 드보르작의 교향곡 8번, 9번과 더불어 프라하 출신의 지휘자 바츨라프 노이만(1920~1995)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로 남아 있다. 바츨라프 탈리히의 제자인 그는 1948년부터, 그러니까 쿠벨릭이 서방으로 망명한 이후부터 체코 필하모닉의 상임지휘자로 지휘봉을 들었다. <나의 조국>에서 그의 지휘는 섬세함보다는 역동성 쪽에 방점을 찍고 있다. 약간의 논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와 체코 필하모닉의 연주는 시원하게 가슴이 뚫리는 느낌을 전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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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태그: 스메타나, 나의조국, 라파엘 쿠벨릭, 바츨라프 노이만, 문학수, 드보르작
1961년 강원도 묵호에서 태어났다. 까까머리 중학생 시절에 소위 ‘클래식’이라고 부르는 서양음악을 처음 접했다. 청년시절에는 음악을 멀리 한 적도 있다. 서양음악의 쳇바퀴가 어딘지 모르게 답답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서구 부르주아 예술에 탐닉한다는 주변의 빈정거림도 한몫을 했다.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부터 음악에 대한 불필요한 부담을 다소나마 털어버렸고, 클래식은 물론이고 재즈에도 한동안 빠졌다. 하지만 몸도 마음도 중년으로 접어들면서 재즈에 대한 애호는 점차 사라졌다. 특히 좋아하는 장르는 대편성의 관현악이거나 피아노 독주다. 약간 극과 극의 취향이다. 경향신문에서 문화부장을 두차례 지냈고, 지금은 다시 취재 현장으로 돌아와 음악담당 선임기자로 일하고 있다.
2013년 2월 철학적 클래식 읽기의 세계로 초대하는 <아다지오 소스테누토>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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