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들이 발로 그리는 세계지도
사유의 힘이 미문과 만난 책 『지나치게 산문적인 거리』를 편집한 김민정 난다 편집자
출판사 ‘난다’에서 예술가들의 산책길을 기록하는 ‘걸어본다’ 시리즈를 펴냈다. 첫 책은 서울 용산을 산책한 문학비평가 이광호의 에세이 『지나치게 산문적인 거리』다. 친절한 여행 안내서도, 수필도, 소설도 아닌 이 책은 ‘용산이라는 장소의 특정성에 글 쓰는 산책자가 돌아다닌 흔적’이다.
모든 책에는 첫 번째 독자가 있습니다. ‘책의 또 다른 작가’로 불리는 편집자가 바로 그 행운의 주인공입니다. 저자의 좋은 글을 발견하고 엮어 독자에게 소개하는 편집자들을 <채널예스>가 만나봅니다. 저자와의 특별한 인연, 책이 엮이기까지의 후일담이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 ||
매일을 예술로 살아가는 작가들은 어떤 길을 걸으며 사유하고 있을까? 난다의 ‘걸어본다’ 시리즈는 느긋한 마음으로 이곳 저곳을 거닐 줄 아는 예술가들의 산책길을 뒤따르는 과정 속에 저마다의 ‘나’를 찾아보자는 의도로 시작됐다.예술가들에게 산책이란 곧 ‘사유’로 이어진다. 내가 사는 동네에서 넓게는 내가 사는 나라에 이르기까지, 예술가들에게 산책 길은 ‘오감(五感) 열기’를 선사한다.
『지나치게 산문적인 거리』는 ‘걸어본다’ 시리즈의 첫 책으로 문학평론가 이광호가 자신의 터전이기도 한 ‘용산’을 테마로 걷고 보고 쓰면서, 발끝으로 관통해낸 이야기다. 왜 하필 ‘용산’이어야 했냐?는 물음에, 저자는 ‘용산이라는 모더니티의 참혹함과 혼존성에 이끌렸다”고 말한다. 용산의 지도를 오래 들여다본 후, 집필을 시작한 저자는 사소한 통증 없이는 떠올릴 수 없는 용산의 지명들을 만나며, 오래된 회한과 단념을 떠올렸다. 삼각지, 효창공원, 청파동, 용산전자상가, 용산역부터 한남동, 동부이촌동, 국립중앙박물관에 이르기까지, 동네 이야기에서 시작한 저자의 사유는 새로운 프레임으로 용산을 산책하게 한다.
처음으로 장소에 대한 글쓰기를 시도한 이광호 문학평론가는 『지나치게 산문적인 거리』를 두고, 시간에 대한 글쓰기를 시도했던 『사랑의 미래』와 대칭을 이루는 책이라고 말했다. ‘걸어본다’ 시리즈는 근간에 강석경의 경주, 허수경의 뮌스터, 강병융의 류블라나, 황현산의 비금도 등으로 독자들을 만날 계획이다.
『지나치게 산문적인 거리』이광호 저자
이런 글이라면 용산에 대한 재인식이 이뤄지지 않을까?
“이광호 선생님과 ‘이런 책을 써보세요, 저런 책은 어떨까’ 얘기를 처음으로 나눴던 건 작년이었어요. 장난처럼 농담처럼 수다를 떨다 선생님을 쪼기 시작한 건 하반기부터였으니까, 구체적으로 책 얘기를 나눈 시점으로부터 책이 출간된 시점까지 한 열 달 정도 걸린 것 같아요. 이광호 선생님이 집필을 마치고 얼추 정리된 원고를 보내주신 게 올해 3월 중순이었고 책이 출간된 게 6월 초니까, 편집자로 지지고 볶고 한 시간은 한 3개월 정도 들었네요.”
『지나치게 산문적인 거리』를 기획한 김민정 시인(난다 편집자)은 평소 이광호 문학평론가와 오랜 친분이 있었다. 서로 살아가는 속사정, 일상을 공유하는 터라, 각자의 취미도 잘 알고 있었다. 용산에 살고 있는 이광호 평론가가 매일 같이 동네를 걸으며 산책하는 걸 즐긴다는 사실은 김민정 시인에게 ‘책’으로 다가왔다.
“워낙 산책을 좋아하시더라고요. 이참에 용산 얘기를 좀 해보면 어떻겠느냐?고 물었죠(웃음). 용산이 어디에 위치한 곳인지 알기는 하지만, 사실 내가 용산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하면 별로 정보가 없더라고요. 왜, 외국 여행 나가면 온갖 책자 사서 공부하고 뒷골목 빵집까지 다 뒤지고 오잖아요. 그런데 우리나라 지역 곳곳은 그렇게 다녀볼 작정들을 안 했던 것 같아요. 특히 저부터도 말이죠.”
이광호 저자는 종종 용산을 산책하며 동네 풍경 사진을 트위터에 올렸는데, 사진에 따라붙는 글이 김민정 시인에게는 남다르게 다가왔다. 이성과 감성이 묘하게 줄을 타는 저자의 글을 보며, 김민정 시인은 ‘이런 글이라면 용산에 대한 재인식이 이뤄지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리고 기대 반, 간절함 반으로 시작된 기획이 『지나치게 산문적인 거리』를 탄생시켰다.
“이광호 선생님은 워낙 꼼꼼하고 성실하세요. 편집에 어려움이 있었다면, 제 덜렁거림과 게으름에 있었던 것 같아요. 선생님은 기획이 공유된 이후에 언제까지 얼마만큼 쓰겠다는 약속을 실제로 다 키지셨어요. 저 역시도 실수하는 걸 싫어하는 편이라서, 선생님과의 첫 만남 때 다짐 같은 걸 했던 것도 같아요. 편집자로 실망스러운 모습은 보이지 말자, 하고요(웃음).”
『지나치게 산문적인 거리』를 준비하며, 이광호 저자와 김민정 시인은 ‘용산’을 새롭게 마주했다. 재벌가들이 밀집한 지역인 한남동은 새 주택을 찾아보기 힘들었지만, 이태원이나 한강진역 근처의 명소들은 순식간에 휙휙 사라지거나 하루가 멀게 새롭게 지어지는 건물들을 만날 수 있었다. 또 막상 정보를 듣고 가본 곳에는 건물의 흔적이 사라져, 당혹스럽기도 했다.
“변화가 느리기도, 또 빠르기도 한 곳이 용산이라는 동네의 ‘오늘’이라는 걸 실감했어요. 편집을 하며 어려웠던 점은 용산의 지도를 표지로 넣는 작업이었어요. 몇 번을 걸어도 갈 때마다 새로운 길로 여겨지는 탓에 막막한 심정이 되기도 했죠.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길은 알겠는데, 그 길과 길들이 이어지는 동선을 잘 표현하기 힘들더라고요. 다행히 지도를 맡은 화가 후배가 오래 살던 동네가 용산이기도 해서, 제 부연 설명 없이 알아서 잘 그려낸 것 같아요. 길은 왜 길 위에 섰을 때 내가 어디 서 있는 건지 현재를 짚어내기가 쉽지는 않잖아요.”
용산 에세이에서 시작된 기획은 김민정 시인 특유의 옆길 새기(?) 덕분에, 다른 지역으로까지 확대됐다. ‘예술가들이 발로 그리는 세계지도’라는 콘셉트로 ‘걸어간다’ 시리즈가 탄생하게 됐으니, 『지나치게 산문적인 거리』는 편집자에게 큰 수확을 가져다 준 책이다.
사유의 힘과 미문이 만난 책
김민정 시인은 이광호 저자의 원고를 받았을 때, 문득 벤야민과 보들레르가 떠올랐다. ‘우리에게도 이런 글과 글쟁이를 선보일 수 있는 기회가 왔구나’하고 신이 났고 흥분했고 호들갑을 떨었다. 물론 책을 실물로 다져갈수록 두려운 마음도 있었다. 편집자로서, 책이 애초의 의도대로 잘 가고 있는가에 대한 긴장감도 느꼈기 때문이다.
“사유의 힘이 미문과 만나 어떻게 책 안에 뿌리가 될 수 있고 또 가지처럼 뻗어나갈 수 있는지 묘한 경험을 했던 것 같아요. 어느 동네에 어떤 가게가 있고, 어느 동네에 어떤 건물이 있고 뭐 그런 정보나 사실에 입각한 진술도 있지만 그 가게를 바라보고 그 건물을 쳐다볼 때 머리와 심장과 발이 하는 생각과 두근거림과 나아감이라는 게 실은 전적으로 ‘나’를 들여다보는 과정이거든요. 달리 표현하자면 산책이 곧 애도의 과정이라 볼 수 있는 거지요.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애도의 방식에 입각한 글쓰기가 쉽지만은 않은데요, 그렇게 본다면 어느 정도 그 언저리까지는 가보려고 하지 않았나. 한창 세월호 사건 나고 이런저런 슬픔으로 온 나라가 어찌할 바를 몰랐을 때, 저는 이 책을 읽었으니까요. 읽으면서 견디게도 되었으니까요.”
김민정 시인이 『지나치게 산문적인 거리』에서 가장 인상 깊게 읽은 글은 프롤로그 ‘모든 장소는 시간의 이름이다’에서 발견한 문장이다. 문학평론가 이광호의 깊은 사유와 미문은 독자들로 하여금 새로운 감수성을 선물한다.
멀리서 보면 장소는 무심하고 자명하며, 가까이서 보면 장소는 비밀스럽고 남루하다. 생의 매 순간 우울과 설렘 속에 자리잡은 특별한 장소가 있을 것이다. 평범한 장소가 문득 지울 수 없는 뉘앙스로 마음에 새겨질 수 있다. 익숙한 풍경이 낯선 시선 속에서 특별한 장소로 전환되는 그런 순간. 하지만 그 순간이 얼마나 지속될 수 있으며, 그 순간에 대한 기억은 어떻게 보존될 수 있을까? 무감한 시간들을 견딜 수 있는 고유한 장소가 남아 있을까? (『지나치게 산문적인 거리』 10~11쪽)
『지나치게 산문적인 거리』는 어떤 독자들이 읽으면 좋을까. 김민정 시인은 “내가 왜 살고 있는지, 살아야 하는지 답 없는 답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선물로 주고 싶다”고 말했다.
“책은 절대로 정답을 바로 알려주지 않지만 연기처럼 뿜어내고 있는 희망과 절망의 말들 속에서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갖고 어떻게 살아가는 사람인가 한번 되짚어주기에는 충분할 것 같아요. 처음부터 읽을 필요도 없고 내키는 대로 아무 페이지나 넘겨서 머물면 되니까 다 읽어내야 한다는 부담도 없을 거예요. 안 읽히면 내버려두고 읽히면 품에 안고 자연처럼 자유처럼 자극처럼 스스로 움직이게 만드는 그런 책이 이 책이었으면 해요.”
때로는 저자로 독자들을 만나기도 하지만, 김민정 시인은 편집자로서 좋은 책을 펴낼 때 큰 뿌듯함을 갖는다. 출판시장의 불황을 논하기 전에 ‘정말 귀하게 여겨질 책을 만들고 있는가’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김민정 시인은 다양한 개성의 책들이 마구 쏟아지는 세상을 꿈꾼다.
“편집자로 요즘 많이 힘든 게 사실입니다. 미움도 만나봐야 생기는 감정일 텐데 외면은 정말이지 손 시린 외로움이거든요. 저는 책을 배울 때 다른 편집자가 절대로 만들지 않을 만한 책만 해야지, 그래야 내 것이 될 테니까 하는 작정으로 작심한 적 여러 날이었던 것 같습니다. 돈보다도 그 고집 여전하지만, 그래도 읽혀야 책이 되고 그렇게 읽힌 책이 목소리가 된다는 것을 압니다. 책을 읽는다는 건, 자기만의 목소리로 세상을 향해 말할 수 있는 준비과정일 테지요. 함성도 좋지만 저는 화음 불가의 개별적인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리는, 그렇게 여러 개성이 담긴 책들이 독자들에게 사랑 받기를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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