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김소연의 내향적 삶을 옹호함
난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
오랜만에 더없는 시가 찾아오는 시간을 보낼 것이 틀림없었다
요즘 내 친구 Y는 집으로 가는 길고 긴 밤길에서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그 노래와 골목길을 녹화해서 페이스북에 올린다. 지금 나는 내 방에서 책을 읽거나 글을 쓰고 있고, Y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다.
그러니 불운은 얼마나 가볍고 단단한지. 지금은 내가 나를 우는 시간. 손이 손을 만지고 눈이 눈을 만지고, 가슴과 등이 스스로 안아버리려는 그때. - 유희경의 시 <금요일> 부분, 시집 『오늘 아침 단어』
최근에 몸이 안 좋아 회사를 잠시 쉬고 있는 H가 말했다.
“낮 시간 동안 혼자서 지내는데 외롭더라구.”
나는 반쯤 놀리는 표정이 되어 응대했다.
“설마, 적적한 거겠지…. 그게 얼마나 좋은 건데.”
혼자 있는 시간이 좋다는 건 알지만 혼자 있어 버릇하지 않아 어색했던 듯했다. 혼자 있는 시간을 어색해하는 자기자신에 대해 어색해하는 듯했다. 안 좋은 건강을 걱정하다, 쉬는 김에 관둬버리라고 장난처럼 깔깔 말하며 마주앉아 있다 집에 돌아와, 적적하게 책상머리에 앉아 있자니 H가 혼자 있는 낮 시간을 상상하게 되었다. 무심코 한낮에 문자메시지를 넣어봐야겠다는 생각도 해보았다. H는 실은 시련의 시간을 보내는 중일 테지만, 아주 오랜만에 더없는 시가 찾아오는 시간을 보낼 것이 틀림없었다. 미리 새로 쓸 새롭고 깊은 그의 시가 기대되었다.
한때는 매일매일 친구들과 밤새 어울려 놀았고 새벽이 되어서야 집에 돌아와서는, 혼자만의 한두 시간 동안에 책을 읽었고 시를 썼다. 친구들과 밤새 어울려 놀다 집에 돌아왔던 그때가 무척이나 즐거웠던 것처럼 기억하고는 있지만, 무척이나 골치 아픈 일들과 성가신 말들을 가방 한 가득 담아 집에 돌아왔던 때였음을 나는 모를 리가 없다. 집에 돌아와 혼자 있는 시간에 나는 ‘알도’를 꺼내어 미주알고주알 있었던 일들과 들었던 말들을 복기하며 번뇌를 삭히려고 애를 썼다. 애를 쓰다 쓰다 시를 썼다.
혼자 있는 시간에 외로움하고 같이 있지는 말아야 한다
존 버닝햄의 『알도』 (존 버닝햄 그림 글, 이주령 옮김, 시공사)는 더벅머리 여자애가 두 손을 모으고 서서 이렇게 얘기를 꺼내며 시작된다. “난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 무심하게 그려진 그림과 무심하게 쓰여진 한 줄의 문장이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진행될 때마다 아이의 쓸쓸함이 함께 깊어진다. 안됐다 싶어지다가 어쩌나 싶어지다가 안타까워진다. 그렇게 쓸쓸함은 단지 깊어지기만 할 뿐인데, 어쩐지 쓸쓸함이 단단하게 여물어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만 같다. ‘알도’는 혼자 있는 한 아이가 혼자였을 때에만 만나게 되는 친구다. 혼자 있다는 건 혼자서 쓸쓸하게 지낸다는 뜻이 아니라, 또다 른 누군가와 함께 야릇한 시간을 보내는 거 아니냐고, 토끼처럼 긴 귀를 가진 알도를 통해 존 버닝햄을 보여준다. 혼자 있는 시간이 많은 사람만이 만날 수 있는 숨겨둔 친구가 누구에게나 한 명씩은 있는데, 그 친구를 자주 만나지 못한다면, 그러니까 혼자 있는 시간이 너무 적다면, 당신은 사실상 더 쓸쓸한 사람이 아니겠냐고 말하는 듯하다.
혼자 있는 시간에 외로움하고 같이 있지는 말아야 한다. 혼자 있는 시간을 방문해줄 단 하나의 위대한 친구가 문 바깥에서 서성이다 그냥 돌아갈 테니까. 그렇게 된다면 정말로 외로운 사람이 되는 거니까. 『까마귀 소년』 (야시마 타로 글 그림, 윤구병 옮김, 비룡소)은 너무 작아 ‘땅꼬마’라고 놀림 받은, “늘 뒤처지고 꼴찌라서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외톨이의 다른 면을 보여준다. 어디에서 본 듯한 아이, 나도 한번쯤은 놀려봤을 것만 같은 한 아이가 친구들과 어울려 놀지 못하는 모든 시간들에 무얼 하며 지냈는지를 이 그림책은 보여준다. 학예회에서 땅꼬마는, 시시각각으로 달라지는 까마귀소리를 진짜 까마귀처럼 정확하게 흉내 내어 큰 박수를 받는다. 그리고 그 까마귀소리를 어떻게 해서 배우게 되었는지를 아이들에게 말해준다. 얼마나 혼자 있었으면, 얼마나 오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기만 했으면, 까마귀의 언어를 온전하게 터득할 수 있었을까.
바바라 쿠니는 평생 동안 은둔생활을 하다시피 한, 시인 에밀리 디킨슨을 그림책에 데려왔다. 민음 세계시인선의 <한줄기 빛이 비스듬히>에서의 시인 연보는 내가 읽은 작가 연보 중에 단연 최고다. 출생, 입학과 졸업. 그리고 시를 발표하고 시집을 출판한 것에 관해 몇 줄. 그 밖의 내용은 에밀리 디킨슨이 집을 나서서 어딘가를 방문한 몇 번. 안과치료를 위해 보스톤에 방문한 것까지 적혀 있는데도 연보의 양은 두 페이지가 안 된다. 그런 에밀리를 단 한 번 만나본 기억이 있는 이웃집 아이의 관점에서 그림책 『에밀리』 (마이클 베다드 글, 바바라 쿠니 그림, 김명수 옮김, 비룡소)는 시작된다. 아이에게 백합 알뿌리를 선물 받고서 에밀리는 아이를 위한 시 한 편을 써서 아이에게 건네주었다. 에밀리 디킨슨은 거의 매일매일 시를 썼다 한다. 살아서 시집을 출간한 것도 아니었고, 결혼을 했거나 자식을 세상에 둔 것도 아닌 채로, 오직 매일매일 숨을 쉬듯 시를 썼고 그리고 완전하게 소멸했다. 그림책 『에밀리』에서는 에밀리가 흰 옷을 입은 천사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모든 것을 다 알아채어 비애를 어린 자식처럼 등에 업은 천사의 모습. 이 세상에서 가장 순정한 그래서 가장 슬픈, 가장 슬퍼서 가장 맑은 시편들을 남긴 에밀리 디킨슨. 그녀의 은둔이 어떤 좌절이었을 수도 있고 어떤 질병이었을 수도 있으리라는 짐작 따위는 거추장스러운 것이 될 정도로, 그녀의 시는 어느 누구의 시보다 순도가 높다. 마치 이 세상 것이 아닌 듯하게.
요즘 내 친구 Y는 집으로 가는 길고 긴 밤길에서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그 노래와 골목길을 녹화해서 페이스북에 올린다. 지금 나는 내 방에서 책을 읽거나 글을 쓰고 있고, Y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다. 언젠가 그렇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나의 골목들이 지금 내 책상 너머에서 펼쳐진다. 어떨 때는 내 발자국소리마저 무서워서, 어떨 때는 가장 낯익은 귀가길이 낯이 익기 때문에 도리어 무서워서, 언제고 혼자여야만 하는 마지막 골목길이 얄궂어, 어떨 땐 단지 그 길의 고요가 불편해서, 적적해서, 그렇게 콧노래를 불러 감정을 내몰았던 때가 떠오른다. 그런 때가 있었지. “난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라는 말이 “난 혼자 있는 시간이 싫어”라는 말로 곧장 해석되던 때. 그때를 기억나게 해주는 Y의 콧노래는 언젠가 많은 이들이 흥얼거리는 새로운 노래가 되리란 걸 안다. 내가 그때 감정을 내몰던 방법을 익혀 집에 돌아와 시를 썼던 것처럼. “난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라는 말이 결국엔 무슨 자랑처럼 하는 말일 수밖에 없다는 걸, H도 Y도 잘 알고 있다는 걸 나는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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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태그: 김소연, 오늘 아침 단어, 알도, 까마귀 소년, 에밀리
시인. 트위터 @catjuice_ 시집 <극에 달하다>, <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 <눈물이라는 뼈>, <수학자의 아침>과 산문집 <마음사전>, <시옷의 세계> 등을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