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윤하정의 공연 세상
욕하면서 보는 연극 썸걸(즈)
감춰진 사람의 마음을 쭉쭉 끄집어내는 연극
처음에는 키득키득 웃다 살짝 눈물이 나기도 하고, 시간이 지나면 스멀스멀 화가 나다 급기야 욕을 퍼붓게 되는 연극 <썸걸(즈)>, 또는 <썸걸’(즈)>. 재밌는 것은 주인공과 관객이 동성이냐 이성이냐에 따라 반응은 사뭇 다른 것 같다.
모든 연인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힘의 관계가 존재한다. 서로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불행히도 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두 사람이 공평하게 50대 50의 에너지를 쏟고 있지는 않다는 말이다. 어떤 관계는 70대 30, 때로는 80대 20의 불공평한 힘의 구도가 형성된다.
알랭 드 보통이 그랬던가. 사랑에 있어 권력을 가진 사람은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라고. 누군가는 20%만 움직여도 나머지 80%의 노력을 쏟아 붓는 상대방에 의해 관계는 유지된다. 더욱 불행한 것은 대부분 일방적으로 관계를 종료하는 것은 힘을 가진 사람이며, 그 종착역에서 상처받고 나자빠지는 사람은 몇 배의 마음과 노력을 기울인 힘이 약했던 사람이다. 젠장.
결혼 전에 한 번 만나! 결혼을 앞둔 과거의 연인이 나를 호텔 방으로 불러내면 어떨까? 그들은 시간이 지나도 어쩜 이렇게 뻔뻔한지. 이제와, 도대체, 왜, 보자는 것일까? 더 기막힌 것은 만나러 가는 나이다. 굳이 못 만날 것도 없고, 확인할 것도 있다지만 결국은 여전히 사랑 또는 관계의 종속자다. 이 기막힌 설정으로 2007년 국내 초연 이후 객석의 짜증을 증폭시키다 급기야 육두문자를 받아내던 연극 <썸걸즈>가 대학로 동숭아트센터 소극장에서 공연되고 있다. 2014년 무대의 흥미로운 점은 기존 ‘나쁜 남자와 그의 여자들’에 ‘나쁜 여자와 그녀의 남자들’ 버전이 추가됐다는 것이다. 각각 <썸걸(즈)-Some Girl(s)>와 <썸걸’(즈)-Some Girl’(s)>로 무대에 오르고 있다.
나쁜 남자 vs. 나쁜 여자
썸걸(즈)-Some Girl(s) |
썸걸’(즈)-Some Girl’(s) |
그 남자, 그리고 그 여자 만, 실상 사랑을 보챈 뒤 지킬 줄은 모르는 미숙하고 결함 있는 몹쓸 인간들. | |
영민: 잘 나가는 작가다. 그는 과거의 여자들을 호텔 방으로 불러들이는 과정을 ‘정직 프로젝트’라 칭한다. 사과할 일이 있으면 사과하고, 오해하고 있는 부분은 바로잡고 싶다고. 가해자처럼 보이지만 그 또한 어떤 풍파의 희생자였음을 이해받고 싶다고. |
미도: 인기 여배우다. 그녀도 과거의 남자들을 호텔 방으 로 불러들이며 ‘정직 프로젝트’라 말한다. 사과하고, 바로잡고, 당시에는 그녀가 일방적으로 나빴던 것 같지만 사실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그녀 또한 이해받고 싶다고. |
그들의 첫사랑 어! | |
상희: 고등학교 때 만난 영민의 첫사랑. 그 동네를 떠나지 않고 지금껏 살고 있다. 하지만 오늘은 오랜만에 미용실에도 가고 아가씨 때처럼 옷도 챙겨 입었다. 혹 영민이 함께 도망가자고 하면 어쩌나 설렌다. 순해 보이지만 그 안에는 13년의 응어리가 도사리고 있다. 집요하게 캐묻는다. “그때 함께 있었던 여자 누구야?” 그리고 울먹인다. 지금은 평범한 아줌마지만, 그 시절 그에겐 가장 예쁜 모습으로 남아 있고 싶다. |
창훈: 미도의 첫사랑 교회 오빠. 그 동네를 떠나지 않고 지금껏 살고 있다. 하지만 오늘은 오랜만에 정장을 챙겨 입고 미도에게 연주해주곤 했던 하모니카도 챙겨 왔다. 순박해 보이지만 그 안에는 13년의 응어리가 자리하고 있다. “관계를 끝낸 건 우리가 아니라 ‘너’지. 그때 함께 있었던 남자 누구야?” 그리고 눈시울을 적신다. 지금은 평범한 아저씨지만, 그 시절 그녀에겐 가장 멋진 모습 으로 남아 있고 싶다. |
몸으로 했던 사랑 | |
태림: 복잡한 그의 말을 절반은 이해하지 못하는 심플한 여인. 다시 만나서도 마냥 즐겁다. “나는 오빠랑 헤어질 줄 알았어. 상처 받은 것도 없고 풀어야 할 것도 없어.” 하지만 그녀에게도 그의 마음을 얻지 못한 두 번째였던 사랑에 서글픔은 있다. “그래서 그때 항상 나 몰래 어딘가에 전화한 거였구나. 두 번째 그거, 좀 아파.” |
기덕: 복잡한 그녀의 말을 절반은 이해하지 못하는 심플 한 남자. 돈 많은 유학파인 그는 다시 만나서도 마냥 느 끼하다. “우리가 이렇게 될 줄 알았는데. 사과 받을 것 도, 바로 잡을 것도 없어.” 하지만 알지 않아도 될 진 실 앞에 서운함은 있다. “그래서 그랬던 거구나. 그때 네 전화 몰래 봤는데 매번 같은 번호에 전화 했더라. 난 괜찮아.” |
미래를 팔아 현실을 파괴했던 사랑 | |
미숙: 그의 지도교수면서 모 출판사 대표의 아내. 그와의 관계가 발각된 뒤 홀로 현실을 겪어야 했던 그녀에게는 아직도 그에 대한 분노가 남아 있다. “너는 책을 낼 줄이 필요했던 것뿐이야.” 그리고 그의 어린 약혼녀에 대한 복수로 그를 탐하기로 한다. “너도 똑같이 당해봐야 해. 옷 벗어.” 하지만 옷까지 벗어던지고 그를 몰아세우던 그녀는 침대 맡에서 예전처럼 그가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모습을 보고 눈물을 떨군다. |
도균: 사진과 교수였던 노총각. 그녀와의 관계가 발각된 뒤 국립대 교수라는 자리까지 반납해야 했다. 담담한 척 하지만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은 물론 함께 할 미래 까지 파괴했던 그녀에게 아직도 분노하고 있다. “사진 한 장만 찍자. 내가 원하는 건 너의 뒷모습이야. 그리고 그때처럼 우리의 미래를 얘기해 봐.” 함께 할 미래를 들려주는 그녀의 모습에 카메라 필름을 내려 놓고 방을 떠난다. |
그들이 진짜 사랑했던, 그러나 역시 비겁했던 | |
소진: 그에게 정말 특별한 그녀. 그는 의사가 될 그녀에 비해 너무나 불확실한 자신의 미래가 겁이 나 도망쳤다. 한껏 쿨 했던 소진도 끝내는 마음 속 앙금을 쏟아낸다. “시간이 지나면 좋은 기억은 좋은 대로, 나쁜 기억도 나쁜 대로 묻고 사는 거야. 다시 나타나 이러는 거 사람 두 번 죽이는 거야.” 그리고 폭로되는 그의 또 다른 실체에 미련의 불씨마저 씻어낸다. “이제는 너를 확실히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
태근: 같은 극단 단원이었던 그녀에게는 정말 특별한 그. 하지만 그녀는 연봉 2백만 원의 대학로 연극배우인 그와 미래를 함께 할 자신은 없어서 도망쳤다. 한껏 쿨 했던 태근도 끝내는 침을 튀겨가며 그녀를 몰아세운다. “도대 체 이러는 의도가 뭔데? 사과? 바로잡아? 결국 너 좋자고 이러는 거잖아.” 그러다 폭로된 그녀의 또 다른 실체에 남아 있던 애틋함마저 식는다. “이제는 너를 확실히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
처음에는 키득키득 웃다 살짝 눈물이 나기도 하고, 시간이 지나면 스멀스멀 화가 나다 급기야 욕을 퍼붓게 되는 연극 <썸걸(즈)>, 또는 <썸걸’(즈)>. 재밌는 것은 주인공과 관객이 동성이냐 이성이냐에 따라 반응은 사뭇 다른 것 같다. 그러니까 여자 관객이 미도를 만날 때는 영민을 볼 때 보다는 리액션의 수위가 낮거나 허용까지 가능한 수준이다. 아마도 우리 모두에게 누군가의 뻔뻔함과 그럼에도 미련하게 예속 됐던 경험, 또는 누군가에게 이기적으로 굴었거나 비겁하게 도망쳤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그 누군가에게 화가 나고, 또는 그 누군가를 보며 눈물을 흘릴 것이다.
그런데 두 편을 모두 재밌게만 본 기자는 어떤 상황일까? 분명히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 작품을 보고 난 뒤 무척 기분이 나빴던 기억이 있는데, 이번에는 영민이건 미도건 그냥 재밌었다. 연출이 이석준 씨로 바뀌어서인가, 사랑도 이기적인 관계놀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돼서 일까, 아니면 연애세포가 아예 죽은 것일까... 스스로 달라진 리액션에 당황스럽긴 하지만, 아무튼 탄탄한 대본에 배우들의 짱짱한 연기력이 뒷받침되는, 그러면서 감춰진 사람의 마음을 쭉쭉 끄집어내는 연극은 참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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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보느라 영화 볼 시간이 없다.."는 공연 칼럼니스트, 문화전문기자. 저서로는 <지금 당신의 무대는 어디입니까?>,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공연을 보러 떠나는 유럽> ,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축제를 즐기러 떠나는 유럽>,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예술이 좋아 떠나는 유럽> 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