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재미진 e연재 이야기
고려 초기 왕족의 사랑을 상상력으로 채우다
『빛나거나 미치거나』 e연재 리뷰
『빛나거나 미치거나』의 묘미는 삼각관계와 닿을 듯 말 듯한 애틋한 로맨스가 아니다. 밸런스다, 모든 것의 밸런스.
9세기 말 통일신라 말기. 아니 후삼국시대라 부르는 것이 더욱 마땅하다 여겨질 정도로 민심은 나뉘고 한반도는 혼란스러웠다. 각지에서는 농민봉기가 발생했다. 중앙 정부의 힘이 약해지자 지방 호족들의 세력은 조정으로부터 독립적으로 부와 세를 불린다. 이 중 송악(개성) 지방의 호족이었던 왕건은 신하들의 추대를 받아 임금이 된다. 『빛나거나 미치거나』는 조선-구한말을 배경으로 하면서 일거 붐을 조성했던 로맨스 소설들보다 조금 더 시선을 과거로 가져간다. 고려 건국 초기의 왕실에 만화경을 가져다 댄다.
세를 과시하는 각 지방의 호족들을 발 아래에 두고 황제로 군림하기 위해서 태조 왕건은 무려 스물아홉 번의 혼인을 치른다. 물론 온 세상 여인들을 다 내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 한 결혼은 아닐 터, 스스로의 정치적 군사적 기반을 공고히 다지며 경제적 풍요까지도 노린 선택이었다. 부인이 많아 자식도 많다. 줄잡아 열 명도 넘을 황자가 체육계, 학자계 등 계열별로 준비되어 있었다. 먼저 태어난 형을 모조리 죽이지 않는 이상 결코 왕위를 물려받을 일이 없는 황자들이 대부분이었다. 그 중에도 유독 왕건의 눈에 들어차는, 황제의 위엄과 담대함(그리고 주인공으로 손색없는 미모까지)을 갖춘 황자는 다름 아닌 넷째, ‘왕소’였다.
왕소는 왕위에 관심이 없었다. 황궁에서의 삶은 숨이 턱턱 막혔다. 어차피 왕위를 이을 수 없다면 바라는 대로 기방에서 여인을 품고, 이 지방 저 지방을 돌며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왕권에 위협이 아님을 보이는 게 낫다는 걸 몸소 터득한 똑똑한 자였다. 그런 왕소가 이국에서 수면향을 맡고 납치가 된다. 눈을 떴을 때 그는 결혼을 해야 할 상황이었다. 여인을 보쌈 해서 내 것으로 취하는 상것들의 이야기는 들어봤지만 남자를 납치해 혼인을 올리다니. 기이하고도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잠시 장단을 맞춰볼까 싶었던 왕소의 앞에 ‘혼인’ 대상이 나타난다.
청해상단의 ‘실질적’ 수장인 열아홉 소녀 신율. 출생의 비밀을 가슴에 품고 거상의 집안에 양녀로 몸을 의탁해 자라나 어느덧 집안의 기둥이 된 강단 있는 소녀였다. 하룻밤 눈속임만 된다면 언제 쓰레기통에 처넣어도 상관없는 결혼식이나 신율은 남자를 눈여겨보고, 왕소는 “경국지색은 아닌” 어린애에겐 그다지 관심이 없다. 둘은 선선히 헤어지지만 여기서 인연이 끝날 거라 생각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겠지?!
의형제가 된 왕소와 신율, 그리고 야심을 품은 자 왕욱
오 년 후, 그와 그녀는 다시 만나지만 서로의 정체를 파악하는 데는 조금 시간이 걸린다. 새로운 장애물도 나타난다. 연적이 없으면 곤란하다. 마음에 품었던 단 한 명의 여인이 형인 왕소만을 바라보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고, 그럼에도 정치적인 목적으로 아버지인 왕건의 후궁으로 들어가는 것을 또 한 번 바라보고만 있어야 했던 회한에 사무친 사내가 있었다. 어미의 피를 물려받아 누구보다도 뛰어난 미모를 가졌고, 총명한 두뇌를 지녔으며 무엇보다도 만인지상의 자리에 올라 다시는 사랑하는 여인을, 그 무엇도 빼앗기지 않겠다는 야심을 품은 자. 여섯 째 황자인 ‘왕욱’.
아버지의 후궁으로 들어간 그의 사랑 ‘다녕’과 꼭 닮은, 하지만 상단의 수장답게 배포 넘치고 총명하고 씩씩해 여느 여인들과 사뭇 다른 신율에 빠져드는 왕욱은 이내 자신이 찾아낸 보석 같은 존재가 또다시 다른 곳에 마음이 향해 있다는 걸 안다. 얄궂게도 상대는 이번에도 왕소. 상황은 반복되지만 다녕을 놓쳐야만 했던 그 때의 왕욱이 아니다. 아버지 왕건을 황제의 자리로 옹립했지만,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해 왕건을 대신해 만인지상의 자리에 자신과 결이 맞는 자를 새로 추대하고자 수를 쓰는 숙부와 결탁해 왕위찬탈을 구상하는 동시에 신율에게는 신율이 가장 바라는 것들을 무리하지 않고 얻도록 해준다. 잃어버린 핏줄을 찾아주거나, 보통 여자들은 관심도 없을 만한 서책을 구해 신율에게 바친다거나.
그러나 마음만큼은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남자 복식을 한 신율에게 의형제를 맺자며 우악스럽게 팔에 목을 끼우고, 기방에 신율을 데려가 밤이 새도록 술을 마시던 왕소에게 신율은 말할 수 없이 이끌리고, 남자인 줄 알면서도 가슴이 두근거리던 왕소는 그가 실은 그녀였다는 사실에 겨우 눌러 담았던 사내의 연심을 한껏 발산한다. 그토록 독립적이고 몇 수 앞을 내다볼 정도의 혜안을 가진 신율이 사랑하는 사내 앞에서는 의존적인 성질을 숨기지 않고, 여자에게 무심한 듯 표정 없던 왕소 역시 소유욕을 거침없이 드러낼까? 모두에게 똑같지만 너에게는 솔직해지길 허락받은 것처럼. 둘의 마음은 이제 막 통하였지만 아주 오래 전부터 이어진 실낱같은 인연은 줄곧 지금의 만남을 암시하고 있었다.
애틋한 러브라인을 뛰어 넘는 흥미진진한 ‘밸런스’에 주목하자
지금까지 세 남녀의 러브라인에 대한 장광설을 늘어놓았지만, 정작 『빛나거나 미치거나』의 묘미는 삼각관계와 닿을 듯 말 듯한 애틋한 로맨스가 아니다. 밸런스다, 모든 것의 밸런스. 시시각각 다가오는 왕위쟁탈전의 후끈한 공기 속에 등장인물 모두가 저마다 다른 생각 하나쯤은 하며 사람을 대하고, 이쪽의 로맨스가 상대에겐 두고 볼 수 없는 죄악이 된다. 입신양명에 눈이 멀어 인간을 경시하는가 하면 노예시장에 나온 모녀를 사들여 그들에게 새 삶을 주는 인간도 있다. 무거운 출생의 비밀은 아무렇지 않듯 밝혀지며 공공연한 환부가 곪아 썩어 들어가도 종이 한 장 덮어 모른 척 외면해버린다. 공평하게 어둠을 품고 있고, 공평히 머리 위로 빛이 쏟아진다. 그 빛에 미쳐버리거나, 빛이 후광이 되거나 는 어떤 길을 걷느냐에 따라 갈라진다. 아직 갈 길이 꽤 남은 듯 보이는 작품이나 이제껏 뿌려진 떡밥들이 어떻게 갈무리가 되는지 흥미진진하게 지켜볼 가치가 있다.
스물다섯 살 이전에는 한 번도 글을 써서 먹고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해 본 적이 없지만, 어쩌다보니 지금까지 생존에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수 있는 음악, 소설, 만화, 스포츠 등에 관한 글을 쓰며 생존해왔다. 한 가지를 파고들어 지식과 애정을 갖는 걸 좋아하므로 무언가의 애호가라는 말이 적합하나, 지인들은 그냥 오타쿠라 칭한다. 「스쿱」, 「브뤼트」 등을 거쳐 현재 ‘만화 없는 만화 웹진’ 「ACOMICS」 에디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