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로 나라를 지킨 조선의 청년 ‘전형필’
스물네 살의 상속자, 문화재 지키기에 뛰어들다
일제 강점기 문화재의 유출을 막기 위해 모든 것을 바쳤던 식민지 조선의 청년, 간송 전형필. 그는 스물넷의 젊은 나이에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았으나 ‘문화로 나라를 지킨다’는 신념 하나로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던졌다. 그의 뜨거운 이야기가 『간송 전형필』에서 펼쳐진다.
《훈민정음》과 혜원 신윤복의 <월하정인>, 그리고 고려시대의 상감청자를 대표하는 ‘청자 상감 운학문 매병’.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우리의 문화유산이다. 하지만 이 모든 문화재가 단 한 사람에 의해 지켜졌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일제 강점기, 우리 문화재가 겪어야 했던 수난은 민족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일본을 비롯한 세계 각국의 침략으로 오갈 곳 없이 떠돌아야 하는 위기에 놓였던 것이다. 그때 조선의 한 청년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걸고 ‘문화로 나라를 지키겠노라’ 다짐했다. 그 뜻을 이루기 위해 고국의 문화재가 있는 곳이라면 어느 곳이든 찾아갔고,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반드시 되찾아왔다. 그가 바로 ‘간송 전형필’이다.
간송 전형필은 스물네 살의 나이에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았다. 무반 집안에서 태어나 거상으로 성장한 아버지 덕분이었다. 젊은 나이에 물려받은 많은 재산 앞에서 전형필은 ‘무엇을 위해 쓸 것인가’ 고심했다. 그리고 ‘문화보국(文化保國, 문화로 나라를 지킨다)’에 투신하기로 결심한다. 그의 곁에는 탁월한 심미안을 가진 스승과 친구들이 있었고, 그들은 전형필과 의기투합해 흩어져 있는 문화재들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역사 소설가이자 전형필의 사촌인 월탄 박종화, 그의 추천으로 진학한 휘문 고등보통학교에서 사제의 연을 맺은 서양화가 고희동, 기미독립선언서를 작성한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인 위창 오세창 등이 함께했다. 그들은 조선과 일본의 곳곳을 직접 찾아다니며 이미 해외로 반출된, 혹은 반출될 위기에 놓인 문화유산들을 되가져왔다. 1938년에는 그 모두를 모아 ‘빛나는 보배를 모아두는 집’이라는 뜻으로 ‘보화각’이라 이름붙인 공간을 마련했다. 바로 현재의 ‘간송미술관’이다.
한국의 대표적인 문화유산을 제자리로 돌려놓는 데 가장 많은 공헌을 하고도 스스로 자신을 내세운 적 없던 간송 전형필. 그가 세상을 떠난 지 50여 년이 흐른 지금, 그 뜨거운 가슴과 서늘한 기상에 대한 이야기가 비로소 우리 곁에 찾아왔다. 이충렬 작가의 책 『간송 전형필』이 출간된 것이다. 1994년 단편소설 「가깝고도 먼 길」로 등단한 이충렬 작가는 지금까지 <한겨레 신문> <국민일보> <경향신문> 등을 통해 단편소설과 르포, 칼럼 등을 꾸준히 발표해 왔다. 그 시간 동안 사실과 허구를 넘나들며 쌓아온 내공은 『간송 전형필』에서도 빛을 발한다.
단순히 전형필의 삶을 정리하여 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소설가 특유의 상상력을 더해 생생하게 재현해낸 것이다. 약 2년간의 자료 조사를 마친 후에야 줄거리를 구상할 수 있었고, 이후 1년의 시간을 더 공들인 끝에 『간송 전형필』의 이야기를 완성할 수 있었다. 전형필이 수집한 많은 작품들 중 문화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들을 가려내어 수록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전작 『그림으로 읽는 한국 근대의 풍경』 『그림 애호가로 가는 길』에서 보여주었던 예술적 안목은 이번 작품에서도 이어졌다.
선생이 수집한 문화유산은 광복 후 그 가치를 인정받아, 12점이 국보로, 10점이 보물로, 4점이 서울시 지정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나머지 수집품들도 문화사적으로 매우 중요하다는 학계의 평가를 받았다. 그래서 많은 이가 간송을 ‘민족 문화유산의 수호신’이라 부르고, 간송의 수집품을 거론하지 않고는 제대로 된 미술사 연구 논물을 쓸 수 없다고 말한다. ( 『간송 전형필』 4쪽)
불쏘시개가 될 뻔 했던 정선의 그림
이충렬 작가는 지난 30일, ‘간송문화전’ 전시회가 진행 중인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독자들과 만났다. ‘간송문화전’은 민족 문화재를 보호하기 위한 전형필의 행적을 재조명함으로써 우리 문화재의 우수성을 알리고 국민들의 문화적 자긍심을 일깨우기 위해 마련되었다. 시공을 초월해 뜨거운 울림을 전해주는 그 공간에서, 작가는 독자들과 함께 전형필이 지켜낸 문화유산을 함께 둘러보았다.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전형필의 숨은 노력과 식지 않는 열정을 하나하나 짚어주었다.
“어린 시절 간송 선생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은 월탄 박종화 선생입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역사 소설가이기도 한 월탄 박종화 선생은 간송 선생의 외사촌 형입니다. 월탄 선생은 민족사학인 휘문 중고등학교를 다녔는데, 간송 선생에게도 입학을 추천했죠. 간송 선생은 휘문 고등보통학교에 다니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인 고희동 선생을 만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고희동 선생의 소개로 위창 오세창 선생과 인연을 맺게 되었고요. 오세창 선생은 당대의 대 수집가이자 탁월한 감식안을 가지고 있던 분이었어요. 오세창 선생 집을 방문한 만해 한용운 선생은 ‘그곳에 있는 걸 다 보려면 하루 10시간씩 한 달은 봐야할 정도’라고 말씀하기도 하셨어요. 오세창 선생의 아버지는 추사 김정희 선생의 제자였습니다. 그래서 오세창 선생은 아버지로부터 추사 김정희의 수장품을 전해 받았고, 나중에는 그것이 간송 선생에게 전해졌던 겁니다.”
전형필이 ‘문화보국’ 운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그가 본격적으로 문화재 수집에 뛰어들었던 시기의 일화들로 이어졌다. 겸재 정선의 제자였던 현재 심사정이 중국의 <촉잔도>를 참고해서 그린 동명의 그림, 국보 68호인 ‘청자 상감 운학문 매병’ 등이 이 시기에 되찾은 작품들이다. 심사정의 <촉잔도>는 그 길이가 8m에 달하는 작품으로, 완벽하게 펼쳐진 상태로 공개되는 것은 ‘간송문화전’이 최초다. 전형필에게 전해질 당시 <촉잔도>는 보전 상태가 양호하지 못했지만 그는 작품이 가진 ‘미술사적 가치’를 높이 평가해 큰 금액을 주고 구입한 뒤 복원했다. 무려 기와집을 11채나 살 수 있는 금액을 지불했다고 한다.
고려청자의 대표적 작품이자 현전하는 고려청자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색과 무늬를 가지고 있는 ‘청자 상감 운학문 매병’. 이 작품을 얻는 대가는 더욱 컸다. 기와집 20채에 달하는 값을 치러야 했던 것. 그러나 전형필에게 ‘청자 상감 운학문 매병’의 가치는 기와집 20채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큰 것이었다. 우리 문화재를 되찾아 후손들에게 전달하는 일에 값을 매길 수는 없는 까닭이었다. 값을 두 배로 쳐 줄 테니 ‘청자 상감 운학문 매병’을 자신에게 넘기라고 말했던 일본인 수장가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할 수 있었던 것도, 그와 같은 신념 때문이었다. 또 한 가지 빼 놓을 수 없는 일화는 겸재 정선의 《해악전신첩》과 관련된 것이다.
“『간송 전형필』에서도 소개했지만 《해악전신첩》은 불쏘시개로 쓰일 뻔 했던 작품입니다. 당시에 거간 장형수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용인에 살고 있던 친일파 송병준의 집에 갔다가 《해악전신첩》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집 머슴이 불쏘시개로 쓰려던 화첩이었죠. 송병준은 장작 값 20원을 치른 뒤 《해악전신첩》을 얻었어요. 그리고 간송 선생에게 전해줬죠. 간송 선생은 화첩 속에서 겸재의 그림과 글씨를 본 후 값을 후하게 쳐줬습니다. 그 뒤부터는 장형수가 문화재를 손에 넣을 때마다 간송 선생한테 갖다 바쳤다고 해요(웃음). 《해악전신첩》에는 스물한 점의 그림이 실려 있는데, 겸재가 72세 때 금강산 진경을 그린 것들입니다. 상당히 원숙한 경지에 들어갔을 때의 작품이기 때문에 그림뿐만 아니라 글씨도 상당히 훌륭하죠.”
《훈민정음》 해례본,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다
1930년대 우리 미술품들이 해외로 반출되는 데 주요 통로 역할을 한 곳은 ‘경성 미술구락부’였다. 지금의 미술품 경매소와도 같은 ‘경성 미술구락부’는 당시로서는 유일하게 조선의 미술품을 합법적으로 가져갈 수 있는 경로이기도 했다. 이곳에서 경매에 부쳐진 작품을 되찾기 위해는 일본 사람들과의 치열한 경쟁이 불가피했다. 그럼에도 전형필은 단원 김홍도와 오원 장승업의 그림을 비롯한 수많은 문화재들을 지켜냈다. 그 중에서도 ‘청화백자 양각진사철채 난국초충문병’은 긴 이름만큼이나 다양한 기법이 사용된 작품. 현재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이 도자기는 조선백자 중 유일하게 돋을새김으로 제작된 것으로, 들국화 난초 곤충 등 무늬마다 다른 색을 입혀 놓았다. 이와 같은 작품은 우리나라에서 ‘청화백자 양각진사철채 난국초충문병’ 만이 유일하다. 그 가치가 큰 만큼 입찰 경쟁을 피할 수 없었는데, 일본인 대수장가와 경쟁한 끝에 기와집 16채의 가격으로 낙찰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에서 거래되는 문화재의 가격은 이국땅에서의 그것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바다 건너 떠나보낸 작품들을 되찾기 위해서는 더 많은 대가를 치러야했다. 일본에 머물던 영국인 국제변호사로부터 고려청자 22점을 사기 위해 치른 금액은 기와집 400채의 가격에 준하는 것이었고, 역시 일본에서 찾아온 혜원 신윤복의 <혜원전신첩>은 기와집 20채에 해당하는 값을 치르고서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하지만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조금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했던 전형필의 안목은 틀리지 않았다. 그의 손에 들어온 고려청자 22점 중 4점은 국보로, 또 다른 3점은 보물로 지정되었기 때문이다. 신윤복의 그림 30점으로 구성된 풍속화첩 <혜원전신첩>은 모두가 국보 135호로 지정됐다.
간송 전형필은 결코 흔들리지 않는 신념으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문화재를 지켜냈다. 그 안에는 갖은 시련 속에서도 묵묵히 믿는 바를 행하는 용기와 투지가 숨어있다. 그래서 우리는 전형필이 지켜낸 문화유산 앞에서 숙연해진다. 《훈민정음》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훈민정음》을 지켜내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훈민정음》의 사용례를 밝힌 해례본은 그가 있었기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국보 중의 국보라고 할 수 있죠. 유네스코 세계 기록문화 유산이기도 하고요. 해례본은 연산군 때 다 불태워 없어져서 몇 권 밖에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간송 선생이 지켜냈던 것입니다. 한글 학자들 역시 해례본의 존재를 알고는 있었습니다. 세종실록에 나와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10여 년 동안 찾아도 손에 넣지 못했어요. 그런데 간송 선생은 발견하셨던 거예요. 원래 소장자는 《훈민정음》 해례본을 기와집 한 채 값에 판매하려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간송 선생이 ‘이런 보물 중의 보물을 한 채 값만 줄 수 없다’면서 기와집 열 채 값을 주시고, 수고비로 한 채 값을 더 얹어서 열한 채 값을 주셨다는 일화가 있어요. 그리고 6.25 전쟁 때는 해례본을 넣은 가방을 가슴에 품고 다니고, 밤에는 베개 속에 넣고 주무셨다고 합니다. 마침내 1945년에 해방이 되자 조선어학회 33인을 간송 미술관으로 불러 모으셨어요. 그 자리에서 해례본을 공개하셨죠. 영인본을 만들 수 있도록 낱장으로 떼어내서 전달하셨고요. 그 결과 1946년에 조선어학회에 의해 《훈민정음》 해례본이 처음 세상에 나온 거예요. 그걸 보고 학자들은 한글 발달사를 연구할 수 있게 됐죠.”
간송 전형필의 삶과 그가 지켜낸 문화유산들의 이야기를 듣노라면, 지금의 우리가 그에게 얼마나 많은 빚을 지고 있는지 깨닫게 된다. 그로 인해 문화재의 가치와 소중함에 눈뜨게 되고, 우리에게 남겨진 역할과 책임에 대해 자문하게 된다. 보다 큰 뜻을 품고 멀리 내다보았던 한 사람의 혜안과 그것을 끝까지 지켜낸 열정, 신념 역시 발견하게 된다. 언젠가부터 멀어진 그 뜨거운 마음을 느끼고 싶은 사람들에게 『간송 전형필』과의 만남을 권한다. <간송문화전>의 관람을 계획 중이라면 이 만남이 더 큰 울림을 안겨줄 것이다.
간송 전형필 이충렬 저 | 김영사
우리 문화의 황금기 ‘진경시대’를 복원하고, 위창 오세창에서 월탄 박종화, 청전 이상범 등 당대 서화가와 문사들을 후원하며, 암흑의 식민지 조선에 탐미와 매혹의 근대예술을 꽃피운 인물 간송. 억만금 재산과 젊음을 바쳐 모은 서화 전적, 골동들을 보존하기 위해 한국 최초의 개인 박물관 간송미술관을 세운 간송 전형필의 일대기를 한 권의 책에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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