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말 한마디의 힘, <디태치먼트>
지금, 우리 아이들에게도 필요한 덕목
우리를 방어하고 멍청한 사고방식에 빠지지 않기 위해 우리는 읽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자기만의 자의식과 신념체계를 배양하기 위해 우리 모두 이 기술을 익혀야 해. 우리의 마음을 방어하고 보존하기 위해…….
모든 것은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이다. 영화 <디태치먼트>에서 <죽은 시인의 사회> 혹은 <굿 윌 헌팅>의 선한 멘토와 그 벅찬 감동을 기대하진 말자. 학생이 선생을 향해 침을 뱉고, 욕을 입에 달고 사는 학생들에게 선생은 똑 같은 언어로 대한다. 자신의 자녀를 돌보지 않는 부모들 역시 교사를 무시한다. 자신의 삶을 포기하고 거리의 매춘부로 살아가는 한 소녀는 방치되고, 꿈도 미래도 없는 학생들을 마주하고 선 상담교사는 흐느껴 운다. 하지만 이들이 처한 상황에 벅찬 감동이나 드라마틱한 변화는 없다. 영화 <디태치먼트>는 무너져 버린 미국 공교육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그려내면서 ‘무관심’이라는 제목처럼 무관심함 속에 방치되어 버린 아이들에게 우리가 어떤 미래를 제시해줄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과 질문을 던진다. 그런데, 이 무너져버린 교육에 대한 전망 없는 현실, 너무 익숙하다. 아이들에게 ‘바른 미래’를 제시할 수 없는 그 현실이 지금, 오늘, 여기 바로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다.
<디태치먼트> 스틸컷
그래도 따뜻한 말 한 마디
개인적인 상처를 끌어안고 살아가는 헨리 바스(에드리언 브로디)는 파견교사다. 치매 할아버지를 돌봐야 하는 현실에서 그의 삶은 늘 숨 가쁘다. 그는 뉴욕 교외에 위치한 어느 고등학교에 한 달간 임시 교사 자격으로 부임한다. 이 고등학교는 문제아들이 모여들면서, 폐교 위기에 빠져있다. 교사들은 모두 각자의 어려움을 호소하며 매일 매일 힘들게 살아간다. 상처 받은 건 교사들뿐만이 아니다. 끝도 없고, 대책도 없는 부모들의 방치 속에 아이들은 꿈도 미래도 없이 자신을 파괴하고, 타인을 공격한다. 아무도 자신에게 관심을 두지 않아 힘들어 하던 메레디스(베티 케이)는 자신에게 따뜻한 말 한 마디 건네준 헨리에게 집착한다. 그 와중에 헨리는 거리의 매춘부로 연명하는 가출소녀 에리카(사미 게일)를 만나 그녀의 보호자가 된다. 그리고 에리카를 통해, 헨리는 오랫동안 자신을 괴롭혀온 오랜 트라우마를 되짚는다.
토니 케이 감독은 <아메리칸 히스토리 X>를 통해 인종차별에 대해서, <레이크 오브 파이어>에서는 낙태문제에 대해서 다루면서, 지속적으로 사회적인 이슈를 상업영화 속으로 끌어왔다. 영화는 삐걱거리는 교육 시스템의 문제를 다루지만, 동시에 어떤 것으로 부터도 구원받지 못한 우울한 사람들이 나락에서 헤매는 모습을 보여준다. 앞서 말한 <굿 윌 헌팅>이나 <죽은 시인의 사회>가 이상적인 멘토를 통해 보편적 감동을 준 것에 비하면 <디태치먼트>는 훨씬 더 거칠고, 현실적이다. 문제아들을 교화시킨다는 존 스미스 감독의 <위험한 아이들>이나 로랑 캉테 감독의 <클래스>와 비슷한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주인공 교사의 모습은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
강한 신념과 선의로 아이들을 교화시키는 두 영화의 주인공과 달리, <디태치먼트>의 교사 헨리는 냉정하다. 아니, 냉정하려고 노력한다. 헨리는 아이들이 왜 교육을 받아야 하는지에 대해 명확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지만, 아이들에게 동화되지 않고 가능한 거리를 두려고 애쓴다. 교사들의 인터뷰 화면이 다큐멘터리처럼 이어지는 가운데, 헨리의 인터뷰와 애니메이션, 그리고 슈퍼 8mm의 거친 입자로 촬영된 플래시백을 통해 영화는 줄곳 헨리라는 한 사람의 내면과 그 상처를 되짚는다.
2003년 <피아니스트>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던 애드리언 브로디는 교육에 대한 뚜렷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지만, 정신적 외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복잡한 헨리를 통해 슬픔의 거울에 비친 현대인의 모습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마샤 게이 하든, 제임스 칸, 루시 리우 등의 명품 배우들과 함께 보호해주고 싶은 친근한 얼굴 에리카 역할의 사미 게일, 그리고 상처받은 소녀의 내면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 메레디스 역할의 베티 케이 등 배우들의 연기가 훌륭하다. 이름에서 눈치 챘겠지만, 베티 케이는 감독 토니 케이의 딸로 이 영화가 데뷔작이다.
결국 토니 케이 감독이 <디태치먼트>에서 말하고 싶은 건, 흔들리는 교권이 아니라 무관심으로 상처받은 아이들과 그 아이들 때문에 상처받는 교사들의 지극히 내밀하고 개인적인 이야기다. 상처받은 아이들이 상처를 끌어안은 채로 자라나, 또 다른 무심한 부모가 되는 현실을 되짚어 보면서 짧게나마 변화를 꿈꿔보지만 모든 것은 녹록치 않은, 그저 잔인한 현실일 뿐이다. 하지만, 이 잔인한 현실 속에서도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것은 아주 작은 관심과 따뜻한 말 한 마디란 사실을 토니 케이 감독은 영화의 곳곳에 배치시켜, 상처받은 영혼들을 살포시 토닥거려 준다. 학생들 때문에 상처받은 상담 교사 파커(루시 리우)를 위해 나이 많은 교사 시볼트(제임스 칸)는 이렇게 속살거린다.
"이 직업의 나쁜 점은 고맙다는 말은 아무도 안한다는 거야. 내가 지금 고맙다고 말할게."
<디태치먼트> 스틸컷
이 작은 위안이 절망에 선 파커를 다시금 기운 내게 한다. 그리고 학생들에게도 가족들에게도 투명인간 취급당한 채, 자신의 존재 가치를 잃고 늘 철조망에 매달린 채 멍하게 서 있는 와이엇은 헨리가 아는 채를 해주는 순간, 고맙다며 그제야 철조망에서 벗어난다. 그리고 거리를 두고, 관계를 맺지 않으려고 애쓰는 헨리를 변화시키는 것 역시 소통과 위안이다. 그저 무심한 채로 살아가려는 헨리에게 다가온 두 소녀 메레디스와 에리카를 통해 헨리는 과거의 트라우마와 마주하고, 동시에 현재의 자신이 상처받은 아이들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를 깨닫게 된다. 이를 통해 교사 헨리가 아닌, 인간 헨리는 변화하고 변화된 인간 헨리는 변화된 교사 헨리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영화는 시사한다.
<디태치먼트>는 깨진 거울 속 다양한 인간 군상들을 가능하면 보이는 면 그대로 반영하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이야기들이 퍼즐 조각처럼 흩어지고, 소소한 균열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에리카와 헨리가 서로의 상처를 보듬고, 할아버지의 죽음으로 지긋지긋한 과거와 작별할 수 있게 된 헨리는 어제와 다른 조금 더 발전된 헨리가 된다. 따뜻한 말 한 마디가 주춤거리던 뒷걸음질을 멈추고, 내일을 향해 한 발 나아가게 만드는 큰 힘이 된다고, 토니 케이 감독은 힘주지 않지만 조용히 읊조린다. 또한 학생과 선생의 관계를 수직관계가 아니라, 함께 발전해 가야 하는 수평관계로 풀어내려는 그 의지가 무척 인상적이다. 헨리가 아이들에게 강변하는 충고는 지금, 우리 아이들에게도 필요한 덕목이다.
"우리를 방어하고 멍청한 사고방식에 빠지지 않기 위해 우리는 읽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자기만의 자의식과 신념체계를 배양하기 위해 우리 모두 이 기술을 익혀야 해. 우리의 마음을 방어하고 보존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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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태그: 디태치먼트, 애드리안 브로디, 루시 리우, 최재훈, 토니 케이, 베티 케이
늘 여행이 끝난 후 길이 시작되는 것 같다. 새롭게 시작된 길에서 또 다른 가능성을 보느라, 아주 멀리 돌아왔고 그 여행의 끝에선 또 다른 길을 발견한다. 그래서 영화, 음악, 공연, 문화예술계를 얼쩡거리는 자칭 culture bohemian.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후 씨네서울 기자, 국립오페라단 공연기획팀장을 거쳐 현재는 서울문화재단에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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