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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형 “사실보다 역사가에 관심을 가져라”

『랑케&카』 저자 조지형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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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들어 팩트란 단어가 많이 들린다. 아무리 그럴듯한 주장이라고 하더라도 사실에 기반하지 않다면 주장의 설득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은 얼마든지 왜곡될 수 있기 때문에 사실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건 말처럼 쉽지가 않다. 조지형은 사실을 파악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말하는 사람의 의도를 우선 파악하라고 말한다. 사실보다 중요한 건 사실을 다루는 사람이다.

최근 들어 분야를 가리지 않고 “우리 팩트만 가지고 이야기를 해보자.” 혹은 “사실관계를 먼저 따져보자.”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아무리 그럴듯한 주장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주장이 사실에 기반하지 않는다면 설득력이 떨어지게 마련이다. 하지만 사실을 말하는 건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여기저기서 사실만을 말하자고 목놓아 외치는 모습은 사실을 말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증명하고 있는 건 아닐까.

지식인 마을 완간 기념 강연의 4번째 주인공은 조지형 이화여대 교수였다. 조지형과 함께 역사학에서 사실이란 무엇인지 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역사학은 과거에 벌어진 사실을 논하는 학문이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지만 역사학은 사실 관계를 면밀히 따진다. 랑케는 사실로써의 역사를 강조했다. 랑케는 역사가란 역사가의 주관을 철저히 배제한 뒤 과거 사실이 자연스럽게 드러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역사가의 편견이 아니라 사료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춘다. 역사학에서 사실을 철저하게 따지는 전통은 랑케 이후에 시작되었는데, 그가 근대 역사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사실은 왜곡된다

2월 20일 갑순이의 아침을 살펴보자. 그녀는 일어나서 곧장 화장실로 향했다. 적당히 씻은 뒤 찌개를 데우기 위해서 가스레인지에 불을 켰다. 밥만 먹기는 심심해서 TV를 튼다. 때마침 시작한 아침 드라마에 시선이 고정된다. 찌개가 끓는 소리가 들리자 가스 불을 끄고 냉장고에서 반찬을 내놓고 전기 밥솥에서 밥을 퍼 담는다. 아침 드라마를 보면서 밥을 먹는다. 밥을 다 먹고 나갈 채비를 한다. 집을 나가기 전 갑순이는 자신의 다이어리에 이렇게 적었다. 오전 8시, 아침 밥 먹음.

‘갑순이는 2월 20일 오전 8시에 아침을 먹었다.’ 우리가 살펴본 갑순이의 경험과 갑순이의 다이어리에 남은 기록을 바탕으로 바라보면 이 진술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 진술이 정말로 사실일까? 8시 정각에 갑순이가 밥을 먹었으리란 보장은 없다. 정말로 밥을 먹었을 수도 있지만 찌개 불을 올리거나 아침 드라마를 봤을 가능성도 있다.

우리가 흔하게 말하는 사실은 크게 2가지다. 우선은 경험 그 자체다. 갑순이가 일어나서 밥을 먹었던 모든 행동. 언어로 옮길 수 없는 그 모든 경험이 사실 그 자체로 존재한다. 다른 하나는 언어화된 진술이다. ‘갑순이가 2월 20일 오전 8시에 밥을 먹었다’라는 진술은 갑순이의 수많은 행동들 중 밥을 먹었다는 한 가지 행동에만 초점을 맞춰 축약해 표현한다. 경험 속에 존재하는 수많은 경험은 한 마디로 압축된다. 이 과정에서 경험과 말은 분리되며 경험은 언어를 기반으로 질서화된다. 한 마디로 왜곡된다. 왜곡됨에도 경험을 언어화한 진술을 우리는 사실이라 여긴다.

경험을 언어화하는 과정에서 축소와 왜곡이 발생한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한 번 더 왜곡된다. 갑순이가 2월 20일에 있었던 친구와의 약속에 늦었다고 상상해보자. 그녀는 친구에게 아침 일찍 일어났지만 교통 체증 때문에 늦었다며 미안하다고 말하고는 아침에 쓴 다이어리를 보여주었다. 다이어리에는 아침 8시에 밥을 먹었다는 사실이 적혀있다. 이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원래는 9시로 적어놨는데 친구가 노발대발 뛸 것이 두려워 8시로 고쳐놓았을 수도 있다. 갑순이의 다이어리는 사료의 역할을 한다. 사료는 경험과 진술을 연결시켜주는 매개체다. 사료에는 기록하는 사람의 의도에 따라 조작 가능하다는 위험이 존재한다. 물론 갑순이의 사례처럼 의도적인 조작으로만 사료가 오염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자신의 시선에 따라서 기록한다. 이 과정에서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왜곡적인 시선이 담긴다. 같은 사실도 어떤 방향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정리하면 사실에는 크게 2가지가 있다. 경험 그 자체로써의 사실과 경험을 언어화한 진술로써의 사실. 언어화된 진술은 크게 2가지 이유로 오염이 된다. 우선 경험을 언어화하는 과정에서 축소 왜곡이 되며, 언어화된 진술을 진술자의 입장에 따라 조작할 수 있다는 점에서 다시 한 번 왜곡된다. 역사학자는 이 2가지 왜곡에 대항하는 사람이다. 그들은 사료에서 무엇이 드러나고 무엇이 감춰지는지를 살핀다. 더 나아가 사료를 기록하는 사람의 의도를 파악하려 노력한다.


역사상의 사실이란 역사가가 중요성을 부여한 진술이다

갑순이의 또 다른 에피소드다. 수능 날이었다. 갑순이의 어머니는 등 푸른 생선이 머리에 좋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수능을 보러 가는 갑순이에게 생선을 구워주었다. 아뿔싸, 갑순이는 생선을 먹다 가시가 목에 찔려 병원에 가게 되었다. 당연히 수능은 보지 못했다. 마침 병원에 있던 의사가 훈남이었다. 훈남 의사도 갑순이가 마음에 들었다. 어떻게 눈이 잘 맞아서 결혼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갑순이와 훈남 의사는 파경을 맞게 되었다.

아마도 갑순이는 살아오면서 생선을 먹다 목에 가시를 찔리는 경험을 여러번 겪었을 것이다. 대부분의 가시는 갑순이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하지만 수능 날 먹다가 목에 찔린 가시는 다르다. 어떤 역사가는 이날의 가시를 갑순이의 인생에서 터닝 포인트로 꼽을 수도 있다. 수능을 못 본 것은 물론이고 미래의 배우자를 만나는 기회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어떤 역사가는 가시 자체는 별 것 아니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다만 병원에서 만난 훈남 의사가 더 문제였다고 생각한다. 훈남 의사가 재빠른 조치 후 갑순이를 시험장으로 보냈다면 갑순이는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살 수도 있었을지 모른다.

‘갑순이는 수능 날 아침에 생선을 먹다 목에 가시를 찔렸다.’ 이는 경험을 언어화한 진술이다. 어떤 역사가는 갑순이의 인생에 가시가 큰 영향을 끼쳤다며 이 진술에 중요성을 부여한다. 이제 갑순이가 수능 날 아침에 생선을 먹다 목에 가시를 찔린 사건은 역사상의 사실(a fact of history)이 된다. 역사상의 사실은 경험을 언어화한 진술에 역사가가 중요성을 부여함으로써 생성된다. 반면에 다른 역사가는 갑순이는 수능 날 훈남 의사를 만났다라는 진술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이 또한 역사상의 사실이다.

역사가들이 어떤 진술에 중요성을 부여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경험 그 자체가 변하지 않는다. 경험은 과거 사실로써 고정된 상태로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경험을 언어화한 진술에 각기 다른 중요성을 부여함으로써 과거 사실이 다르게 보일 수는 있다. 역사가가 부여한 중요성은 과거 사실을 바라보는 필터처럼 작용한다. 과거는 고정되어도 필터가 변한다면 과거는 다른 모양으로 인식된다.

시간이 흘렀다. 많은 토론이 있었다. 이제 갑순이의 삶에서 가시가 중요했는지 아니면 훈남 의사가 중요했는지 어느 하나가 다수의 의견으로 채택될 수 있다. 그 때 다수의 의견으로 정해진 역사상의 사실은 역사적 사실(a historical fact)이 된다.




사실보다 중요한 건 역사가

아직까지도 한국의 역사 공부는 암기 위주다. 고려는 언제 건국했고 조선은 언제 건국했는지 사실을 파악하는 데 주력한다. 물론 사실 파악도 중요하다. 하지만 조지형은 역사 공부는 사실을 공부하는 것보다 역사책을 쓴 사람을 공부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이야기한다.

앞서 우리는 역사상의 진술은 역사가가 언어화한 진술에 중요성을 부여함으로써 생성된다고 알아보았다. 조지형은 우리에게 역사가가 어째서 그 진술에 중요성을 부여했는지 그리고 그 진술에 중요성을 부여하는 것이 정말로 합당한 행위인지를 따져봐야 한다고 말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역사가의 행동을 읽는 것이 역사책을 읽는 마지막이 아니라 역사책을 읽는 시발점이다. 역사 책에 실려있는 사실보다 역사가가 어떤 사실에 어떤 중요성을 부여하고 있는지가 중요하다. 하지만 한국의 역사 교육은 아직까지 주입식이다. 조지형은 이런 현실을 강하게 비판했다. 주입식 교육으로는 역사학을 공부하는 이유인 비판정신이 생겨날 수 없기 때문이다.

“팩트를 알기 위해서 역사책을 본다? 그건 바보 같은 짓입니다. 팩트보다 중요한 것은 팩터에 역사가가 어떤 중요성을 부여하고 있느냐입니다. 국정 교과서를 지정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지만 다양한 관점의 교과서가 등장하는 것은 바람직합니다.

역사학을 공부하는 이유는 비판정신을 기르기 위해서입니다. 어떤 주장이 있고 사실관계가 분명하다고 생각해봅시다. 사실을 어떤 방식으로 어떤 중요성을 부여했는지를 추측해보는 능력. 사실을 활용한 의도가 무엇인지 파악할 수 있는 능력. 역사학은 그런 능력을 길러 냅니다. 세종대왕은 위대한 임금이다. 그렇다면 위대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세종대왕은 못난 임금이다. 그렇다면 못난 이유는 무엇일까요? 세종대왕도 사람인데 파고들면 흠이 하나도 없을까요? 어떤 사실에 대해서 의의를 제기할 수 있는 문화적 풍토가 필요합니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다. 『역사란 무엇인가』 에 나오는 카의 유명한 말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끊임이 없다는 점이다.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일방적인 대화가 아니다. 고려시대가 어떤 시대라고 결론이 났다면 그걸로 마무리를 지어서는 안 된다. 그 결론이 정말로 맞는지 혹시 수정할 부분이 없는지 다시금 과거 사회를 살펴야 한다.

우리는 과거 사회를 바라볼 때 현재 사회를 투영한다. 현재 사회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요소를 중점으로 두고 과거 사회를 바라본다. 그런데 현재 사회는 끊임없이 변한다. 현재 사회가 중요하게 여기는 요소도 끊임없이 변한다. 결국 과거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도 변하고 그 관점에 따라서 과거 사회에 대한 평가도 변한다. 과거를 바라보는 시선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끊임없이 대화를 해야 한다. 조지형은 역사는 외우는 것이 아니라 머리가 깨질 정도로 싸우고 논쟁해야 발전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 사회가 그렇게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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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케 & 카 : 역사의 진실을 찾아서 조지형 저 | 김영사
근대 역사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랑케는 이념이나 신념, 철학이나 종교에 의해 왜곡되는 역사를 거부하고 정확한 사료를 토대로 과거의 사실, 그 자체가 진실로 어떠했는지를 밝히는 것이 역사가의 임무라고 했다. 이런 랑케의 실증사관은 역사란 결국 역사가의 주관적 시각에 의해 좌우될 수밖에 없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된다. 과거의 사실을 강조하는 입장과 역사가의 입장을 강조하는 두 주장을 대화의 장으로 불러오자는 것이 바로 카의 생각이었다.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카의 역사의식은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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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정준민

어쩌다 보니 글을 쓰고 있는

랑케 & 카

<조지형> 저8,550원(10% + 5%)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우선 떠오르는 것은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카의 답변이다. 하지만 카 보다 훨씬 이전부터 역사의 진실은 과연 무엇인지 그리고 현재를 사는 우리가 역사를 있었던 사실 그대로 안다는 것이 가능한지에 대한 학자들의 논란은 계속되어 왔다. 근대 역사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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