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고한 결심을 세웠으나, 사느라 부대끼며 흐지부지 되어버리는 우리의 삶에 ‘구정’이 있다는 건 어떤 점에서 일종의 축복같이 느껴질 때가 있다. 놓쳐버린 결심을 다시 한 번 다잡는 또 한 번의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새롭게 세운 계획이 안온한 나의 일상에 꼭 필요한 자극, 정신적으로 한 뼘은 훌쩍 자라나 있는 나의 마음이라면 더욱 좋겠다. 그럼 점에서 구정을 기점으로 다시 한 번 2014년의 계획을 세워보는 사람들에게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를 추천하고 싶어졌다. 그러고 보면 그리 큰 결심이 아니어도 좋겠다. 내 삶을 조금 더 풍부하고 윤택하게 만들 수 있는 작은 여행이라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이미 내 삶에 변화가능성이 있을까, 고민하기 시작한 3040 세대에게 당신들이 그토록 간절히 찾기 원한 ‘파랑새’가 사실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이야기는 언제나처럼 따뜻한 위안이 될 것이다.
한 뼘쯤 훌쩍 자라난 삶의 변화를 위해…….
라이프 매거진의 필름 현상 팀에서 16년째 일하고 있는 월터 미티(벤 스틸러)는 42세 생일을 맞이한 날, 출간 잡지가 폐간되며 온라인으로 전향하면서 대규모 구조조정 소식을 듣는다. 같은 시기에 전설적인 사진작가 숀 오코넬(숀 펜)은 필름 한 통을 보내오며 25번째 사진에 ‘삶의 정수’를 담았으니 이를 표지사진으로 써 달라는 전보를 보낸다. 하지만 25번째 필름은 아무리 찾아도 보이질 않고 회사에서는 얼른 사진을 가져오라고 월터를 채근한다. 사라져 버린 필름을 찾기 위한 단서들을 하나씩 얻으면서 필름을 찾기 위해 월터는 그린란드로 떠난다.
월터 미티는 자신에게 무례하게 구는 구조조정 담당자 테드 핸드릭스(아담 스콧)와 몸싸움을 벌이고, 자신이 짝사랑하는 타 부서의 여직원 셰릴(크리스틴 위그)의 집에 가스 폭발이 일어날 때 뛰어들어 마치 슈퍼히어로처럼 그녀의 개를 구출해낸다. 하지만 이것은 모두 월터의 상상 속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이다. 현실의 월터는 소심하고 평범한 남자다. 인터넷 데이트 사이트의 프로필 란에 ‘가본 곳’과 ‘해본 일’을 비워둔, 특별하게 방문한 곳도, 해 본 일도 없는 따분한 삶을 살아왔다. 하지만 변화의 단서는 복선처럼 깔려 있다. 벤 스틸러 감독은 자연스럽게 월터의 어린 시절을 되짚어 현실에 반영한다. 그는 모히칸 머리를 한 스케이트보드 챔피언이었다. 유럽여행을 떠나기 위해 준비도 했었다. 하지만 어린 시절 갑자기 아버지가 죽고, 소중했던 꿈을 접고 가족의 생계를 위해 ‘파파존스 피자’집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그리고 따분한 일상을 오직 몽상으로 극복해 온 그의 현실은 관객들에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현실의 벽 앞에서 꿈을 접고 살아가는 우리의 삶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런 그에게 주어진 모험, 몽상과 현실이 뒤섞이지만 결국 현실로 벌어지는 그 여행길-그린란드, 아이슬란드, 아프가니스탄, 히말라야 산맥으로 이어지는-속 월터가 벌이는 모험은 여전히 떠날 수 없는 현실의 관객에게 짜릿한 대리만족의 경험을 제공한다. 상상이 아닌 진짜 모험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는 세상 모든 몽상가들을 위한 대리만족의 힐링 무비가 된다. 늘 한결같기만 한 일상이 따분해서 떠나고 싶지만, 훌쩍 떠날 용기를 내기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벤 스틸러는 ‘월터 미티’라는 평범한 남자의 모험기이자 성장기인 이 영화를 통해서 내 삶을 변화시키는 원동력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만든다. 그 고민의 지점에서 여전히 소시민일 수밖에 없는 우리의 삶을 따뜻하게 어루만진다. 기본적으로 영화는 소시민의 성장담이지만, 영화는 블록버스터에서 볼 수 있는 화려한 모습을 가득 담아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푸르른 아이슬란드의 풍광과 히말라야 산맥의 웅장함이 마음을 흔들고, 뉴욕 도심의 결투는 물론 화산 폭발의 장엄한 스펙터클은 이 영화를 보는 또 다른 즐거움이다.
월터의 상상력은 사실 현실이 아니었다. 그저 답답한 현실을 잊기 위해 몽상에 빠지는 순간, 멍때리는 그 모습을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괴짜처럼 보인다. 월터가 멍때리는 순간 흘러나오는 노래는 데이비드 보위의 ‘Space Oddity 우주의 괴짜’라는 노래다. 그런 월터를 보며 테드는 ‘우주비행사 톰’이라 부르며 조롱한다. 하지만 두 번째 ‘Space Oddity’가 흘러나오는 순간에 월터는 지루한 일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사람이 되어 있다. 노래를 활용한 감동적이고 섬세한 은유의 순간이다. 월터를 모험으로 이끈 25번째 필름의 행방은 흡사 ‘파랑새’ 동화의 은유를 담고 있다. 가장 먼 곳에 있으리라 떠났지만, 사실은 쉽게 버려진 나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다는 반전은 충분히 예상 가능한 것이었지만 마음을 울리는 감동으로 남는다.
벤 스틸러는 화장실 유머로 유명한
<메리에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미트 페어런츠>,
<박물관이 살아있다> 시리즈 등 코미디 배우로 기억될 수 있으나 여전히 성장 영화의 수작으로 꼽히는 1994년 연출작
<청춘 스케치>를 비롯하여,
<케이블 가이>,
<쥬랜더>,
<트로픽 썬더> 등을 연출한 중견 감독이기도 하다.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는 20년 만에 다시 쓰는 중년 남성의 새로운 성장담으로, 가벼운 웃음기 대신 삶에 대한 소소한 성찰을 가득 담아낸다. 또한 주인공의 직업이 《라이프》 잡지의 필름 현상을 담당자라는 점은 조금 더 특별한 의미로 읽힌다. 매체의 특성이 ‘온라인’으로 바뀌면서 가장 먼저 퇴출되기 쉬운 직업이지만, 필름을 현상하는 일은 모든 작업의 ‘기초’가 되는 일이다. 그리고 이 영화는 그 가장 기초되는 일을 해 온 월터의 삶을 결국 칭송하고 격려한다. 여기에 자연스럽게 녹아든 《라이프》 잡지의 모토는 영화를 관통하는 하나의 힘이다.
주인공 월터가 몸담고 있는 잡지 《라이프》의 모토는 다음과 같다.
To see the world, things dangerous to come to,
to see behind walls, to draw close,
to find each other and to feel.
That this the purpose of ‘Life’
세상을 보고 무수한 장애물을 넘어
벽을 허물고 더 가까이 다가가
서로를 알아가고 느끼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의 목적이다.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는 《라이프》지의 모토를 쉽고 재미있는 방식으로 축약해 보여준다. 그리고 묻는다. 어딘가로 사라져버린 우리의 ‘필름’은 어디에서 찾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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