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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텐츠 스트레스’라는 신조어가 생겼다. 읽을 거리, 읽을 수단이 넘쳐나는 세상 속에서 ‘무엇을 읽어야 하나?’ 고민하는 사람이 점점 늘고 있다. 그러나, 어떤 책을 읽어야 할지, 어떤 독서법이 좋을지 고민하는 사람은 드물다. <채널예스> 1월 특집 ‘서재를 탐하다’에서 다독가로 소문난 저자들과 독서 밀담을 나눴다. 어떻게 읽어야 일상에서 ‘책 읽기’가 즐거워지는지, 유익해지는지 캐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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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는 “깊은 사유의 힘을 얻을 수 있는 글은 오직 독서뿐”이라고 말한다. 오랜 시간에 걸쳐 한문학 자료를 탐사하고 있는 정민 교수는 연암 박지원의 산문미학을 깊숙이 들여다본 『비슷한 것은 가짜다』 와 『고전문장론과 연암 박지원』, 다산 정약용의 지적 패러다임을 살펴본 『다산선생 지식경영법』 『다산의 재발견』 『삶을 바꾼 만남』 등을 펴냈고, 허균에서 홍길주까지 옛사람 9인의 핵심 독서 전략을 담은 『오직 독서뿐』 으로 독자들과 긴밀히 소통했다. 지난해 12월에는 우리나라의 명편 7언절구 3백수를 가려 뽑은 『우리 한시 삼백수』 를 펴냈다. 아울러 한시의 아름다움을 탐구한 『한시 미학 산책』, 어린이들을 위한 한시 입문서 『정민 선생님이 들려주는 한시 이야기』, 사계절에 담긴 한시의 시정을 정리한 『꽃들의 웃음판』 등도 펴낸 바 있다.
책의 성격에 따라 읽는 법도 달라진다
다독가이자, 다독가의 삶을 면밀히 탐구한 정민 교수는 “잘 쓰려면 많이 읽고 제대로 읽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리저리 뜯어보고 하나하나 따져보아, 책을 덮고 나서도 생생해야, 책 한 권을 온전히 읽었다고 이야기한다. 책 읽기에 한결같이 적용되는 법칙이란 없다. 책의 수준이 다르고, 읽는 목적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독서에서 훈련이 필요하다면, 책의 성격에 따라 읽기의 다른 방법을 적용하는 안목을 기르는 것입니다. 가볍게 읽을 책을 심각하게 읽어서도 안 되고, 일생에 스승으로 삼을만한 고전을 소설 책 읽듯 해서도 소용이 없습니다. 정독할 책은 정독하고 다독할 책은 다독하면 됩니다. 정독할 책을 휙 읽어 치우거나, 가볍게 읽을 책을 밑줄을 그어가며 정독하겠다고 나서면, 효율은 떨어지고 피로도만 심해집니다.”
한 권의 책을 읽을 때마다 목표를 설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서 목표를 정하라는 말은 책의 성격을 파악하라는 말과 같다. 참고를 위해 읽는 책과 삶의 양식을 삼으려고 읽는 책은 마음가짐부터 같을 수가 없다. 뉴스나 심각한 주제의 다큐멘터리를 볼 때와 개그 프로나 연속극을 볼 때의 태도가 다른 것과 같다. 우선은 책과 가까워지는 것이 먼저다. 정민 교수가 제안하는 독서의 첫 걸음은 “손이 닿는 거리에 다양한 종류의 책을 놓아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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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를 만나면 기뻤다. 하나하나 찌를 찔러 표시해두었다. 잊어버리고 한 3, 4년을 계속했다. 연대순으로 정리해서 주욱 내려오며 읽어보니, 제법 시대마다의 목소리가 뚜렷하게 달라지는 것이 보인다. 통시적 정리를 겸한 셈이다. 시는 절제의 언어다. 할 말을 감출수록 빛난다. 시인이 말하지 않아도 헤아리지 못할 것이 없다. 소풍날 보물찾기가 이처럼 재미있을까? 몇 글자 안 되는 표현 너머 아마득한 성채가 솟아 있다. 그 높은 성채의 아기자기한 이면을 그저 담벼락 너머에서 기웃기웃 들여다본 느낌이랄까? - 『우리 한시 삼백수』 머리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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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읽는 태도는 여타의 장르와 다를 수밖에 없다. 시는 시인이 말하지 않고 ‘사물’이 말하기 때문이다. 사물의 언어를 알아들으려면 감성이 활짝 열려 있어야 한다. 그런데 시는 공감의 언어이므로 감성만으로는 안 되고, 이성의 작용도 활발해야 한다. 자칫 삐끗하면, 시는 오리무중 속으로 빠져들거나 전혀 엉뚱하게 읽기 쉽다. 여백이 많아서 그것을 채우는 과정에서 감성을 너무 앞세우거나 이성이 너무 앞질러가기 때문이다. 이성과 감성의 조화와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물의 언어를 이해하는 것이 먼저다.
“소리 중에 정제된 것이 말이고, 말 가운데 정화를 모은 것이 글입니다. 시는 글 중에서 가장 정제되고 농축된 언어이죠. 시인은 직접 말하지 않고 이미지로 보여줍니다. 보여주기만 하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못 알아들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어찌 보면 시 읽기는 숨은 그림 찾기와 같죠. 감춰진 행간을 찾는 즐거움은 소풍날의 보물찾기보다 즐겁습니다. 최고의 지적 유희입니다.”
긴 글을 읽지 않는 시대다. 그러나 정민 교수는 “짧고 쉬운 글이라도 우선 읽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조금씩 호흡을 길게 늘여 더 길고 깊은 사유를 깃들여야 하는데, 그러자면 단계가 필요하고 연습과 훈련이 요구된다. “게임은 지금 즐겁다가 나중에 괴로운 일이지만, 독서는 지금 괴로워 나중에 즐겁게 되는 일”이라고 직언하는 정민 교수. “재미를 들이기 어려워 그렇지, 일단 재미를 들이면 독서보다 더 큰 즐거움이 없다”는 그의 말에 퍽 동의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지난 정권에서 몇 조 원을 들여서 책가방 없는 학교를 만들겠다고 했을 때, 정민 교수는 “재앙도 이런 재앙이 없다”고 생각했다. 두세 살부터 아이폰, 게임기로 세상을 만나는 아이들. 아이들에게 이것을 뺏으면 발작적인 반응을 일으킨다는 뉴스가 연이어 소개되고 있다.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이런 기계들이 아이들의 정서 활동에 얼마나 치명적인 악영향을 끼치는지는 누구나 잘 압니다. 과정이 필요한 깊은 사유나 인내심이 없으니까요. 이 가벼움을 강제적으로라도 차단해서, 진득한 심성을 길러주지 않으면 답이 없습니다. 독서 외에 이를 가능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삶의 안목을 길러주는 가장 훌륭한 스승
게임이나 오락으로 충족되지 않는 갈증이 책을 통해서 해소된다. 정민 교수는 “사람들이 알면서도 실감하지 못해 그렇지, 책이야말로 가장 위력적인 텍스트”라고 말한다. 길이 막혀 앞이 보이지 않을 때, 책을 보면 길이 있다. 삶이 지지부진해서 답답할 때 책을 보면 답이 있다. 정민 교수에게 ‘독서’란, 삶의 안목을 길러주는 가장 훌륭한 스승이다.
그에게 서재란, 삶의 지혜를 긷는 두레박이다. “차고 시원한 우물도 두레박이 없으면 길어 올릴 수가 없습니다. 급고수경(汲古修?)이란 말이 있는데, 옛 것을 길어 올리려면 두레박줄부터 점검하라는 말입니다. 고전 속에 아무리 훌륭한 가르침이 들어 있어도 내가 펼쳐 읽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정민 교수에게 서재에서 책을 읽는 행위는 ‘차고 단 우물물을 길어 올리는 두레박질’과 같다. 어떤 갈증도 다 해갈되는 곳이 곧 서재이다.
어느 한 권의 책이 사람의 인생을 변화시키지는 않는다. 다양한 책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삶의 틀을 바꿔나간다. 정민 교수의 독서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저자는 연암 박지원과 다산 정약용이다. 연암 박지원의 글은 생각의 틀을 깨는 방법을 일러주었고, 다산 정약용의 글은 헝클어진 생각을 정돈하는 요령을 일러줬다. 정민 교수는 “박지원과 정약용을 합치면 무적”이라고 말한다.
올해 정민 교수는 연암 박지원의 산문과
『맹자』 를 다시 꼼꼼히 읽어볼 계획이다. 박지원의 산문은 언제 읽어도 새롭고, 강렬한 지적 자극을 선물한다. 또한
『맹자』 는 수사학의 측면에서 그 설득력의 원천을 새롭게 음미해볼 생각이다. 예스24 독자들에게
『한국학 그림을 그리다』 를 추천했다.
“한국학의 지평이 넓어졌습니다. 이제 분야는 큰 장벽이 못 됩니다. 젊은 연구자들은 경계를 넘나들며 살아있는 생생한 질문을 던지고 있고, 지금은 바야흐로 문화의 시대입니다. 문학과 역사와 예술과 철학이 경계를 허물고, 하나로 만나는 회통의 현장과 만날 수 있습니다. ‘이제 한국학의 시선도 이만큼 넓어지고 깊어졌구나’하는 느낌이 진한 실감으로 다가옵니다.”
인문학자 정민 교수의 저서들
* 정민 교수의 서면 인터뷰를 토대로 작성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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