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정은 원래 멋지다. 멋지지 않을 수가 없다. 불가사의한 일들이 실시간으로 쏟아져 내리는 이 불가해한 세상에서 ‘범인’을 지목해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범인은 바로 당신! 탐정의 그 한마디는 어떤 극심한 혼돈 상황도 한 순간에 정리하고, 카오스에 알맞은 질서를 부여하는 해결사이자 만병통치약이다. (그런 맥락에서 내가 요즘 주목하는 이 시대의 ‘탐정’은 <먹거리 X파일>의 이영돈 PD다. ‘참 맛있어 보이는데요. 제가 한번 먹어보겠습니다.’의 카리스마에 대해서는 언젠가 다뤄볼 날이 있으리라 믿으며, 아무튼.)
인류 역사상 가장 유명한 탐정은 뭐니 뭐니 해도 셜록 홈스가 아닐까 싶다. 2014년 그 이름을 들은 한국의 독자들 다수는 자연스럽게 영국 BBC의 드라마 <셜록>을 떠올릴 것이다. 이렇게 홈스는 시대에 따라 그에 맞는 모습으로 새로이 변주되곤 한다. 그만큼 인기가 많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러나 취향은 제각각인 법. 나에게 가장 ‘내 타입’인 탐정을 한 명 고르라고 한다면 망설임 없이 다른 남자의 이름을 대겠다. 그는 바로 ‘필립 말로’이다.
내 취향이니 강요할 마음은 없지만, 탐정 능력과는 별개로 순전히 성격과 행동 양태 등을 종합해 볼 때 셜록 홈스와 필립 말로 중에 여자들에게 ‘이성’으로서 더 인기가 많은 쪽은 필립 말로일 것 같다. 이유를 설명하기 어렵지만 홈스보다 말로가 미묘하게 더 여자의 마음을 끌기 때문이다.
레이먼드 챈들러가 만들어낸 이 특이한 탐정, 후대 주요한 탐정 계보의 시조가 된 필립 말로는 소설
『빅 슬립』 에 처음 등장한다. 33세에 미혼, 183센티미터의 당당한 체격을 가졌던 이 사내의 여정은
『안녕 내 사랑』, 『귀여운 여인』,
『기나긴 이별』 로 이어진다.
그는 도통 즐거워 보이지 않는 사내다. 하긴 밥벌이를 즐겁게 하는 인간이 뭐 그리 많겠냐마는 말로에게는 직업에 대한 별다른 자부심도 없어 보인다. 보통의 직장인이 아니라 직업이 ‘탐정’인 까닭에 직업에 대한 이런 심드렁한 태도는 더욱 독특하게 느껴진다.
세상의 악을 소탕하고 범죄를 응징하는 업무, 그런 위대하고 중차대한 직분을 맡은 이에게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일반적으로 다른 가치를 기대한다. 자신만이 법이며 정의라는 일성이 아니다. 적어도 “나는 말쑥하게 차려입은 사립 탐정이 갖춰야할 모든 것을 갖추고 있었다. 나는 400만 달러짜리를 방문하러 가는 길이었다.”는 식의, 대놓고 위악적인 발언을 기대하지는 않는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직설적인 냉소야말로 필립 말로를 매력적인 인물로 만드는 필수 요인이 된다. 말로의 시니컬한 시선은 자신을 넘어, 이 비정한 도시 세계를 향해서도 닿아있기 때문이다.
탐정 말로가 맞부딪치는 세상은 악의와 절망, 비도덕적 욕망으로 가득한 곳이다. 그 한가운데에서 그는 맨 주먹만 갖고 내던져진 존재다. 그는 때론 거칠고 때론 심드렁하게 맞서 싸운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링 위에 서게 하는지는 알 수 없다. 아마 필립 말로 본인도 알지 못할 것이다. 그는 다만 본능적으로 주먹을 꽉 쥔다. 그리고 앞으로 나아간다. 입술이 터지고 얼굴이 피투성이가 될 때까지 악의 실체를 물고 늘어진다. 물론 본인이야 특유의 궤변으로 “나도 마음에는 안 듭니다. 그렇지만 내가 할 일이 뭐겠습니까? 나는 사건을 맡고 있어요. 난 먹고 살기 위해서 팔아야 하는 건 팝니다.”라고 대답하겠지만 말이다. 혹자는 이것을 하드보일드 정신이라고 부른다.
감정을 극도로 절제하고 차갑고 건조한 문체로 사실만을 기술해가는 하드보일드적 태도는 이 세계가 얼마나 비정한 곳인지를 똑똑히 보여주는 효과적인 방식이다. 그러므로 한 화자 혹은 주인공이 하드보일드하다는 것은 그가 이상적인 순수 세계에 대한 갈망을 깊이 간직하고 있다는 역설인지도 모른다. 그의 특별한 매력을 발산하는 작품
『안녕, 내 사랑』 에서 자신을 배신한 여자를 죽는 순간까지 사랑하는 한 남자를 끝까지 지켜보고 그 사랑과 욕망의 부조리함을 낱낱이 기억하는 이는 탐정 말로뿐이다. 초기작에서 상대적으로 강하고 터프한 느낌을 발산하던 그도 다음 작품들을 따라 점점 나이 들어간다. 팬 입장에서야 세월에 따라 조금씩 변해가는 모습을 보는 재미가 꽤 쏠쏠하긴 하지만,
『기나긴 이별』 에 다다라 중년이 된 말로를 보며 묘한 감상에 젖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필립 말로만은 영원히, 어떤 상처도 공치사도 변명도 없이 그 자리에서 가장 냉소적인 표정으로 멋지게 버텨주기를 바라는 것은 평범하게 늙어가는 독자의 헛된 바람이리라. 인생이라는 험난한 링 위에서 상처와 공치사와 변명으로 점철된 채 닳아가고 있기 때문이리라.
말로는 세상 모든 남자들을 대신해 말한다. ‘한 남자가 이 일을 그만두지 않고 버티는 이유를 아무도 알 수 없다. 부자가 될 수도 없고, 대부분 별 재미도 별로 없다. (…) 두 달마다 한 번씩 이 일을 그만두고 아직 머리가 흔들리지 않고 걸어 다닐 수 있을 때 번듯한 다른 직업을 찾아보기로 결심한다.’ 그런데 왜 지속하느냐고? ‘그러면 문에서 버저가 울리고 대기실로 향하는 안쪽 문을 열면 새로운 얼굴이 등장하여 새로운 문제와 새로운 슬픔, 약간의 돈을 안고 들어’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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