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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과 사람 사이』, 책을 읽는데 침이 고였다

‘빼어난 글쟁이’ 건축가 이일훈의 철학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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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추천에 의해 책장을 넘기며, 멈칫거릴 때가 많다. 당신이 누구이거늘 이토록 많은 종이와 잉크를 낭비하고 있냐고, 성토하고 싶은 충동. 건축가 이일훈의 『사물과 사람 사이』 는 이런 충동이 조금도 일지 않았다.

짧은 글, 가벼운 책, 간결한 저자 소개. 내가 좋아하는 책들의 특징이다. 우리나라 독자는 양장본을 선호한다는 말도 안 되는 편견이 있는데, 책을 정말 좋아하는 사람들은 무거운 서적을 꺼린다. 출퇴근 길, 가볍게 한두 장 읽고 가방에 쏙 넣을 수 있는 크기와 무게를 선호한다. 부디 출판사들이 가벼운 책들을 많이 만들어주길!


몇 달 전, 사무실 책상으로 한 권의 책이 전달됐다. 전화 연락, 메일 한 통 없이. “저자 인터뷰를 원하시는 건가?” 사심을 드러내지 않은 출판사에게 심심한 고마움(?)을 가지고, 책장 몇 장을 펴본 후, “이건 천천히 읽어야 좋은 책이잖아” 생각하고 책장을 덮었다. 그렇게 하루 이틀, 업무상 읽어야 할 책들의 순번에 잊혔던 『사물과 사람 사이』가 다시 눈에 들어왔다. 건축가라기보다 사진가의 포스를 지닌 저자 이일훈의 글은 오랫동안 <경향신문>에 연재됐던 에세이다. “당신은 건축가이신데 어찌 이리 글발이 좋으시냐고” 내심 질투했던 글이 많았는데, 책으로 묶여진 모양새를 보고 있으려니 더욱 시샘이 일었다.

프롤로그는 ‘들어가는 글’로 표현했다. “틈나는 대로, 보이는 대로, 사물들의 말을 듣고 찍(적)었다. 글감의 주제를 미리 정하고 찍(적)은 것이 아니라 문득 보이는 것을 찍(적)었다. 걷다가, 차를 타고 가다가, 여행길에도, 출장길에도, 회의 중에도……, 볼일보다 찍(적)기도 했다. 누구는 사진이 아쉽다 하고 어떤 이는 다시 찍으라 했지만 근사하게 보여주려 다시 찍는 것은 내키지 않았다. 오히려 찍(보)는 그 순간의 느낌을 좇(찾)으려 했다.” 이일훈의 글을 읽기 전에 『사물과 사람 사이』 속 사진을 먼저 봤다면, 누군가는 이렇게 구시렁댈지 모른다. “나도 찍겠다. 이런 사진” “이런 건 트위터, 페이스북용 사진 아닌가?” 그러나 사진에서 글로 담을 타고 넘어가면, 이내 오해였음을 깨닫게 된다. ‘문득’ 보이는 것들을 찍었다는 저자 이일훈는 “날마다 다니고 머물고 만나는 길과 장소와 사람에게서 여태까지 볼 수 없던 모습이 새롭게 보일 때가 있다. 때론 갑자기 생겨난 광경을 오랫동안 의식하지 못할 때도 있다”고 말한다. 영감은 익숙한 것들이 새롭게 보일 때, 찾아온다. 내가 하루의 일상 가운데 가장 많이 보듬는 건, 내 마음이 아니라 책상 위 키보드일지도 모른다. 키보드를 매일 깨끗이 닦아 주면, 키보드는 나에게 더욱 정다운 글을 쓰라고 재촉할 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잡다하고 분방한 생각들이 툭툭 튀어져 나오는 가운데, 자꾸만 글에 앞서 있는 에세이의 제목들이 눈앞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말하는 점선’이란다. ‘일하는 풍선’이란다. ‘눈물겨운 디자인’, ‘쓸데없는 디자인’이란다. 어울리지 않는 단어들을 조합했는데, 그 문장 속에 알싸한 맛이 풍겨져 나올 때. 독자들은 입가에 침이 고인다. 저자의 영감은 독자의 마음을 후비고, 이내 무장해제된 독자를 만난다. 미사여구는 없으면 없을수록 좋은 문장이 된다. 접속사는 친절한 안내인이 아니라, 저자와 독자 사이를 방해하는 불청객일 따름이다. 이일훈은  ‘건축 드로잉’을 하듯 글을 썼단다. “앞뒤 좌우 상하에 더하여 내려보고, 올려보고, 줄여보고, 늘여보고, 잘라보고, 헤쳐서 속을 보고, 시간을 달리 해서 보고, 되풀어보고, 입장을 바꿔보고, 고집을 부(버)리며 보고, 갖은 방법을 탐색하며” 생각(개념)을 그렸단다. ‘도시 산책자의 눈으로 바라본 나무와 공간과 동네와 세상’ 『사물과 사람 사이』. 읽고 나니, 오랫동안 아끼던 옷감의 조각들을 가지런히 엮어 놓은 새침한 손수건 같다.
사물(事物)을 사물(死物) 아닌 사물(思物)로 보려 한 5년 동안, 마치 사물(賜物)을 받는 듯 황공했다. 관심 주신 독자들에게 사물(謝物)을 올리니…, 필자의 마음이 사물사물하다.
위 글은 이일훈이 <경향신문>에 연재를 마치는 글로 올린 마지막 문장이다. 언어 유희라고 표현하기엔 깊은 속내가 여지없이 드러난다. 사물사물한 저자의 심정이 무턱대고 짐작되는 건, 왜 일까? 일상이 무료하다는 무심한 친구에게 이 책을 한 권 보내주려 한다. 일상을 ‘보는 눈’이 달라지면, 재미없을 일이 없다. 그리고 나는 이일훈의 또 다른 책들에게 눈길을 돌린다. 제목이 참, 하하하! 구미를 돋운다.


  이일훈의 또 다른 저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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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엄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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