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재구 시인과 와온 바다, 여자도를 걷다
『길귀신의 노래』 무대인 와온 바다, 여자도 기행
석양은 못 봤지만, 그래서 우리에게 와온에 다시 올 이유가 생겼다. 세상에는 시간을 쓰는 방법이 많다. 그중 가장 좋은 것은 함께 놀러 가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함께 손잡고 놀러 갔다. 이런 시간이 쌓여 인생이 이루어진다. 기적은 신기한 일이 아니다.
12월의 태양은 늦게 와서 일찍 간다. 12월의 어느 날, 오전 6시 50분. 어스름이 남아 있는 시각에 여행 복장을 한 사람들이 도로변에 서 있는 고속버스에 몸을 싣기 시작했다. 이들은 열림원이 기획한 <곽재구 시인과 함께하는 와온 바다 여자도 기행>을 신청한 독자들. 와온 바다와 여자도는 최근에 나온 『길귀신의 노래』의 무대가 된 곳이기도 하다. 『길귀신의 노래』는 『곽재구의 포구기행』, 『곽재구의 예술기행』에 이은 또 하나의 따뜻한 산문집이다. 시인 곽재구가 살아온 삶, 만난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시인 특유의 따뜻한 문장으로 풀어냈다. 문장과 함께 실린 사진은 글의 힘을 더한다.
곽재구 시인은 순천대 교수이기도 하다. 학기 마무리에 한창인 그는 순천에서 서울에서 온 독자와 합류했다. 버스 안에서 독자에게 인사말을 시작한 시인은 “독자와 만나는 자리가 저자에 품었던 상상을 깨기 때문에 이런 자리를 좋아하지는 않는다.”라는 진담 섞인 농담을 건넸다. 이와 관련해 일화를 소개했다.
곽재구 시인을 사모하던 팬이 첫 만남에서 그에게 품었던 상상이 모두 깨지고 말았다. 『사평역에서』의 1983년도 초판을 소장할 정도로 극성이었던 독자는 시인을 키 크고 마르고 과묵한 남자로 생각했다. 실제로 본 곽재구 시인은 많이 달랐다. 시인은 본의 아니게 한 사람의 기대를 저버린 게 마음에 걸렸다. 한 번 더 기회를 만들었다. 그리고 또 만났다. 그렇게 곽재구 시인은 독자의 깨진 환상을 복원했다.
『사평역에서』로 대한민국 대표 시인으로 우뚝 선 곽재구라면 시인을 동경하는 독자가 많을 테다. 그럼에도 독자 한 명의 마음마저 세세하게 신경 쓰는 그의 일화를 들으며 과연 시인은 세심한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날 와온 바다와 여자도 기행에서도 그러한 면모가 그대로 드러났다. 해설사를 자청한 곽재구 시인은 지나가는 풍경 하나하나를 독자에게 친절하게 설명해줬다.
곽재구 시인이 직접 추천한 거문도식당에서 점심을 먹은 일행은 섬달천 선착장으로 향했다. 여자도로 가는 배를 타기 위해서였다. 안전행정부 주관 ‘찾아가고 싶은 섬’에 선정되기도 했던 여자도는 이름부터 독특하다. 섬 이름의 유래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가 있다. 섬의 높이가 낮아 파도가 섬을 넘는 섬이라 하여 원래는 넘자섬이었는데, 넘이 ‘남’이란 뜻을 가진 汝(너 여)로 자는 소리 나는 대로 표기하여 여자도가 되었다는 설. 위에서 보면 섬의 배열이 汝 모양을 하고, 육지와 거리가 멀어 생계수단을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하여 自, 이렇게 여자도가 되었다는 설이 있다.
여자도는 두 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여자도, 소여자도가 그것이다. 대동마을을 비롯하여 마을 3곳이 있다. 섬에 도착해 배에서 내리면 볼 수 있는 건물이 여자분교다. 소라초교 여자분교인 이곳은 담장 너머가 바로 바다다. 여자분교를 나와 대동마을, 마파지를 지나면 대여자도와 소여자도를 잇는 다리가 나타난다. 여자인도교라 불리는 이곳은 고기가 잘 잡혀 낚시꾼이 즐겨 찾는 곳이다.
여자인도교를 건너면 소여자도가 나타난다. 소여자도는 송(松)여자도라고도 불리는데, 소여자도에 큰 소나무가 있어서다. 소여자도에서는 특이하게 소나무를 당산나무로 사용했다. 불과 3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이 소나무에 독수리가 살았다고 한다. 2시간 정도 이어진 산책에서 곽재구 시인은 『길귀신의 노래』에 등장하는 여러 장소를 친히 설명해 줬다.
여자도 기행을 마치고 뭍으로 나와 이동한 곳은 카페 모리아. 이곳에서 곽재구 시인과 독자는 티타임을 갖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책을 들고 온 독자 중 일부가 사인을 받기도 했다. 며칠 전 곽재구 시인의 낭송회에서 공연한 게 인연이 되어 기행에 함께했다는 가수 양양. 그녀는 이 자리를 위해 감성적인 언플러그드 뮤직을 곽재구 시인과 독자에게 선물했다. 곽재구 시인 역시 독자를 위해 준비한 게 있었으니 바로 시였다. 평소에도 지인에게 시로 선물한다는 그는 다음과 같은 시를 독자들에게 낭송했다.
보라빛 여자도 - 곽재구
바람이 불어오면 나는 알지
우리가 함께 손잡고 걸어가던 시간이 그곳에 있었음을
달천에서 작은 여객선을 타고
우리가 서러운 눈망울 속에
서러운 눈에 든 갈매기 울음소리를 듣는 동안
연안의 섬들이 뜨거운 긴 손을 내미네
내 어릴 적 보라색 크레용을 좋아해서
보라색 엄마를 그리고
보라색 기차를 타고
보라색 배를 타고
보라색 꽃이 핀 세상의 길들을
외톨이 고등어처럼 떠돌고 싶었네
오늘 당신과 나
보라색 파도와 함께
여자도로 가네
보라색의 섬들이
보라색의 별처럼
보라색 꽃다발 되어
우리들 가슴에 담기네
원래 일정은 한국에서 아름답기로 소문난 와온 바다의 석양을 보는 것이었는데 구름 낀 하늘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석양을 보지 못해 아쉬워할 사람을 위해 곽재구 시인은 다음과 같이 말하며 헤어지는 인사를 건넸다.
“석양은 못 봤지만, 그래서 우리에게 와온에 다시 올 이유가 생겼다. 세상에는 시간을 쓰는 방법이 많다. 그중 가장 좋은 것은 함께 놀러 가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함께 손잡고 놀러 갔다. 이런 시간이 쌓여 인생이 이루어진다. 기적은 신기한 일이 아니다. 처음 만난 사람과 함께 걷고 이야기하는 이것보다 더 큰 기적은 없다. 평범한 날이라도 하루 86,400초를 온전히 기억하려 한다면 모든 게 기적일 수 있다.”
아쉬움, 그 아쉬움을 만회하고도 남을 설렘과 감동으로 함께한 곽재구 시인과 함께한 여자도 기행은 이렇게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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