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효서 작가 “두려워서 읽었어요. 몰래 숨어서”
깊이 생각하고 붓을 적신다
“글이 아니면 글을 쓸 수도 글을 읽을 수도 없습니다. 말이 없으면 말을 할 수도 들을 수도 없는 것과 같지요. 작가와 독자는 글로 만날 수밖에 없습니다만 너무 곧이곧대로 글에 의지해 이해하고 감동받고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글로써 이해와 소통이 완벽하게 이루어지는 것만큼 끔찍한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완벽하게 글의 시스템에 갇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 밖의 세상이 훨씬(무한히) 넓다는 사실을 우리 서로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독서를 특별히 좋아한 건 아니었어요. 어릴 적에 집에 책이 없었어요. 누님과 형님에게서 물려받은 교과서(물려받았죠. 졸업식 노래에도 나오잖아요. 물려받은 책으로 공부를 하며)밖에 없었어요. 책, 하면 교과서였을 뿐이지요. 전기도 들어오지 않던 그때 인근 마을이 다 그랬어요. 아, 교과서 아닌 책이 딱 한 권 있었네요. ‘토정비결’ 책이었어요. 아마 동네를 통틀어 교양서적이라고는 그것 한 권뿐이었을 겁니다. 그게 우리 집에 있었던 까닭은 무학의 어머니가 토정비결 보는 법을 알았고(육십갑자에 맞춰 괘를 뽑는 여러 번의 계산법은 쉽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무엇보다 리드미컬하게 낭독하는 재주를 지녔기 때문이었지요. 칠언절구의 한문을 띄어쓰기 없이 세로쓰기로 번역한 것이라서 읽는 사람이 호흡을 잘 넣어야 하고, 중간 중간 추임새와 뜻풀이까지 곁들여야 했는데 어머니의 솜씨가 근동을 합쳐 최고였습니다.”
“제가 책 읽기의 매력을 처음 느꼈다면 정초에 부녀자들을 대상으로 벌이던 어머니의 토정비결 낭송 잔치 때였겠네요. 이 책은 지금도 제가 갖고 있습니다. 하여간 그 토정비결 말고는 책이 없었어요. 초등학교에도 도서관이라는 공간이 없었습니다. 복도 신발장 위에 50여 권 정도의 책이 6년 동안 바뀌지 않고 비스듬히 누워 있었죠. 책보다는 산딸기와 머루를 따 먹는 게 백배는 재밌었죠. 그때 책 안 읽고 산과 들을 헤맸던 걸 지금도 후회하지 않아요.”
“중학교 때는 《주부생활》 부록으로 나왔던 잠언모음집을 웬일인지 되풀이해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작가가 되겠다는 꿈은 없었어요. 화가가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죠. 고등학교 때 읽은 책이라면 단연 쇼펜하우어의 『인생론』 이죠. 원고지가 아닌 스케치북과 4B연필을 끼고 살 때였지만 그 책만큼은 읽고 읽고 또 읽었습니다. 책을 읽는다는 확실한 느낌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이 책도 고이 간직하고 있습니다. 대학 때는 이문열과 이청준, 김원일, 문순태를 많이 읽었던 것 같고요, 이때부터는 과제 때문에라도 책을 읽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책을 제대로 읽기 시작한 건 아무래도 등단 이후인 것 같습니다. 즐겁거나 빠져 읽었던 건 아니고요, 두려워서 읽었습니다. 소설가가 되었는데 그동안 제가 읽은 책이 너무 없는 거예요. 독서를, 몰래 숨어서 했습니다. 진작 읽었어야 했을 책들을 뒤늦게 읽는 걸 들키지 않기 위해(웃음).”
최근 여덟 번째 소설집 『별명의 달인』 을 펴낸 구효서 작가. ‘버릇처럼 숨처럼, 오로지 소설로 존재하는 사람’이라 불리는 그는 요즘 ‘감각할 수 없는 세계를 감각해야만 한다는 것’에 관심이 있다. 그리고 그것을 글로 써야겠다는 마음이다. 작가는 말한다. “사람의 오감은 정해져 있어서 그 이상을 감각할 수 없다. 어쩔 수 없는 건데, 최소한 감각의 세계는 그래서 세계의 전부가 아니며 아주 많은 부분은 감각의 왜곡된 질서로 구조화 돼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글이라는 것도 극히 제한된(약속된) 표현법에 스스로 갇혀 작동하는 시스템이잖아요. 감각의 한계를 넘어야 하고 언어의 한계를 넘어야 한다는 얘긴데 쉬울 리가 없네요. 과연 넘을 수 있을까? 이게 제 관심사는 아니에요. 넘지 못해도 넘으려는 노력만큼은 쉬지 말자는 게 저 자신과의 약속입니다. 그래야, 감각과 언어에 속더라도, 속고 있다는 자각을 잃지 않을 수 있으니까요.”
인문학적인 관심사 같지만 이런 유의 관심을 지속시켜나가다 보니 당연하게도 자연과학에 가 닿게 된다. 감각의 세계를 알려고 하니 파장에 대해 알아야 하고, 중력에 관해서도 알아야 할 것 같다. 작가는 묻는다. “과연 아이작 뉴턴을 읽어낼 수 있을까?” 아마 쉽게 풀이한 책들을 읽지 않을까, 싶다. 자연과학자로서의 괴테도 찾아 읽어야 할 것이고, 심지어는 양자역학도 공부를 해야 할 것 같다. 상대성이론도 빼놓을 수 없다. 작가는 자문한다. “이럴 때 정말 책이 없다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겠군. 문과를 가면 이런 유의 책들은 죽을 때까지 안 읽게 될 줄 알았다.”며.
“글이 아니면 글을 쓸 수도 글을 읽을 수도 없습니다. 말이 없으면 말을 할 수도 들을 수도 없는 것과 같지요. 작가와 독자는 글로 만날 수밖에 없습니다만 너무 곧이곧대로 글에 의지해 이해하고 감동받고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글로써 이해와 소통이 완벽하게 이루어지는 것만큼 끔찍한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완벽하게 글의 시스템에 갇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 밖의 세상이 훨씬(무한히) 넓다는 사실을 우리 서로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깊이 생각하고 붓을 적신다
구효서 작가의 서재는 심사한삼이다. 20여 년 전, 작가가 붓글씨를 열심히 쓰던 때, 가로 75cm 액자에 넣은 예서체 넉 자가 바로 서재의 이름이다. 언제나 책상 앞에 걸려 있다. ‘깊이 생각하고 붓을 적신다’ 정도의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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