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가끔 ‘내가 나이를 먹긴 먹었다’ 혹은 ‘세상이 많이 바뀌긴 바뀌었다’라는 생각을 한다. 2000년대 생을 보고, 2000년대 생이 정말 있냐며, 그럼 주민등록번호 앞자리가 00이 되는 거냐며 놀랐던 적도 있다. 우리가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세상도 나이를 먹는다. 필자는 90년대 생인데, 2002년생인 사촌동생을 보면 흠칫 놀라곤 한다. 2002년 대한민국이 월드컵으로 들썩거릴 때, 초등학생이었던 필자도 월드컵에 열광하고 있었다. 그게 아직도 엊그제 일처럼 생생한데, 어느 새 10년이 지나있었다. 10년의 시간에도 이토록 벌벌 떨리는데, 20년의 시간은 또 어떻겠는가. 지난 해, 드라마 <응답하라 1997>로 많은 사람들의 감성을 자극했던 제작진이 이번엔 드라마 <응답하라 1994>를 가지고 나타났다. 그리고 후속작은 전작만 못하다는 선례를 깨고, 더 많은 사람들의 감성을 자극하며 승승장구하고 있다. 케이블 채널에서, 그것도 금요일ㆍ토요일이라는 애매한 편성에도 불구하고, <응답하라 1994>가 이렇게 큰 호응을 이끌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필자는 이 글의 제목을 ‘<응답하라 1994>, 세대를 아우르는 아날로그 감성’이라 정했다. 제목 그대로다. <응답하라 1994>는 1994년 신촌을 배경으로, 대학생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실은 대학생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1994년의 대한민국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렇다고 이 드라마가 1970년대, 80년대 생에게만 감성을 불러일으키는 건 아니다. 그 시절 대학생이 아니었더라도, 1994년을 기억하는 시청자들에겐 <응답하라 1994>가 하나의 감성자극제가 된다. 뿐만 아니라, 1994년을 기억하지 못하는 어린 시청자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실제로 <응답하라 1994>의 주 시청층은 10대와 20대다. 그 시절에 대해 알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응답하라 1994>에 열광할 수 있냐고 한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질문이다.
필자의 경우도 1994년을 기억하진 않는다. 하지만 부모님으로부터, 인생선배로부터, 방송 매체로부터 어렴풋이나마 1994년을 알고 있었다. 비록 <응답하라 1994>의 성나정(배우 고아라)이 열광하는 ‘이상민 오빠’가 누군지, ‘서울 쌍둥이’가 무엇인지는 몰랐다. 하지만 배우 장동건의 히트작 <마지막 승부>에 대해선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또한, 그 시절 인기를 끌었던 음악들도 많이 알고 있다. 심지어 가수 장혜진의 ‘1994년 어느 늦은 밤’은 필자의 음악목록 중에서도 자주 듣는 음악으로 추가돼있다. 또, 지난 6회, 성나정과 칠봉이(배우 유연석)의 뽀뽀신에서 흘러나왔던 「아마도 그건」 이란 곡도 리메이크 버전으로나마 잘 알고 있었다. 어렴풋이 알고 있던 것들과의 만남은 상당히 설렌다. 그리고 1994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 또 어떠한가. 그때를 몰라도 신기하게 우린 <응답하라 1994>만의 감성에 빠져들 수 있다. 처음 듣는 옛날 노래지만, 2013년의 음악보다 훨씬 좋아서 찾아보기도 하고, 농구선수 이상민과 가수 서태지에 열광하는 주인공들의 모습을 보고 자신의 경험을 떠올리기도 한다. 그것만으로도 시청자들은 충분히 즐겁다. 즉, <응답하라 1994>는 인간 보편의 감성을 건드리는 것이다.
뿐만 아니다. 당시 대한민국은 그랬구나, 하는 마음으로 드라마를 보는 건 여간 재미있는 게 아니다. 시골, 아니 지방에서 올라온 삼천포(배우 김성균)가 신촌역에 가기 위해 신촌행을 기다리고 있는 바보 같은 모습도, 서울 지리를 몰라 택시비를 몇 배로 내는 안타까운 모습도 보는 입장에서는 상당히 유쾌하다. 삐삐로 마음을 전하고, 공중전화에 줄서서 연락하는 모습은 또 어떤가. 마냥 신기하고 재미있을 것이다. 그리고 백화점 붕괴로 익히 알려진 삼풍백화점에서 칠봉이가 멜론을 사오는 일은 또 어떤가. 그를 보며 우리는 대한민국의 과거사에도 움찔하고 만다. 이렇듯 <응답하라 1994>는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놀러가는 듯한 기분을 선사한다. 우리는 덕분에 힘을 들이지 않고 타임머신을 탈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응답하라 1994>를 보면서 이런 아날로그감성만 되새길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들의 사랑이야기, 연애이야기도 우리의 잃어버린 감성을 자극하는 데에 큰 역할을 한다. 먼저, 러브라인의 큰 축을 담당하고 있는 성나정과 쓰레기(배우 정우), 칠봉이를 예로 들 수 있다. 나정과 쓰레기는 어릴 적부터 친남매처럼 자란 사이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나정은 오빠 쓰레기가 남자 쓰레기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반면 쓰레기는 나정을 아직은 동생으로 생각하고 있는 듯 보인다. 말 그대로 ‘아직은’, 그리고 ‘보인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난주 방영분이었던 6회에서는, 나정이를 좋아하기 시작한 칠봉이가 나정이에게 벌칙을 핑계로 뽀뽀를 했다. 그리고 이를 본 사람은 오직 쓰레기뿐이었다. 분명 그의 눈빛은 그저 오빠라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어보였다. 아마 쓰레기도 알게 모르게 나정이를 조금씩 여자로 느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직은 나정이를 여동생으로만 대하지만 앞으로 쓰레기가 어떤 모습을 보일지 사뭇 궁금해진다. 어쩌면 우리의 생각보다 더 오래전부터 그가 나정이를 마음에 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과연 성나정의 첫사랑이 이루어질 것인가. 아니면 반대로 칠봉이의 첫사랑이 이루어질 것인가. 이는 보는 이들에게 진한 흥미를 안겨준다. 동시에 시청자들에게는 첫사랑의 아련함, 설렘과 같은 감성을 불러일으킨다. 이 세 사람의 관계는 마치 <응답하라 1994>가 시청자들에게 던진 질문과도 같다. 하지만 애써 그 질문의 답을 찾으려 안달할 필요는 없다. 이는 드라마를 보며 자연스럽게, 또 흥미롭게 풀릴 테니 말이다. 이렇게 <응답하라 1994>는 시청자들에게 아찔한 첫사랑의 기억, 그리고 설렘을 선사하고 있다.
<응답하라 1994>는 <응답하라 1997>에 이어, 기존의 드라마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응답하라 1994>는 우리의 아날로그감성을 불러일으키고 설렘과 즐거움을 선사한다. 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감정도 불러일으킨다. 한 단어로 형언하긴 어렵지만, 뭐랄까 괜한 서글픔을 함께 안겨준다. 이는 과거에 대한 향수, 그리움과는 또 다른 감정이다. 사람의 감정에는 반갑고 그리워서 괜히 코끝이 찡해지는 서글픔이 있다. 이는 꼭 1994년이 아니더라도, 그저 즐겁고 아름다웠던 과거의 한때가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게 되는 감정일 것이다. <응답하라 1994>가 지닌 최대의 장점이 바로 이것이다. 앞으로 <응답하라 1994>가 어디까지 우리의 감정을 끌어올릴 수 있는지 지켜보자. 그리고 기억해보자. 우리 모두에게도 나정이, 쓰레기, 칠봉이, 해태, 삼천포, 윤진이처럼 순수하고 설레는 시절이 있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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