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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잃어가는 여자, 눈을 잃어가는 남자
희랍어 시간… 그들이 사랑하는 시간
『희랍어 시간』을 들여다보는 일은, 어떤 기미를 발견하고 흔적을 더듬는 일이다. 그리고 희미하게 떠오르는 그 기미와 흔적들은 어두운 암실, 정착액 속의 사진이 점점 선명하게 상을 만들어내듯 어느 순간 고대문자처럼 오래고 단단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것은 과거의 시간과, 그리고 현재까지 이어진 현재진행형의 시간까지를 포함한다. 우리는 이미 오래전에 존재하던 것들, 그 기미와 흔적들, 영원과도 같은 어떤 찰나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한 자리에서 만나는 어떤 한 장면을 소설을 통해 목격하게 될 것이다.
소리 나는 책
한강 작가의 장편소설 『희랍어 시간』. 이 소설은 이혼하고 아이의 양육권까지 빼앗긴 여자가 아카데미에서 희랍어를 배우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다룬 소설입니다. 주인공은 말을 서서히 잃어가는 여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남자 주인공은 정반대로 시력 때문에 서서히 빛을 잃어가는 남자로 나옵니다. 이들이 각각 이 아카데미에서 희랍어를 배우거나 가르치면서 겪는 이야기들이 펼쳐지는데요, 한강 작가 특유의 고요하면서도 깊고 예민한 문체가 인상적인 소설입니다.
‘우리 사이에 칼이 있었네.’ 라고 자신의 묘비명을 써달라고 보르헤스는 요구했다. 일본계 혼혈인 비서였던 아름답고 젊은 마리아 고타마 에게. 그녀는 87세의 보르헤스와 결혼해서 마지막 석 달을 함께 지냈다. 그가 소년 시절을 보냈으며, 이제 묻히고 싶어 했던 도시 제네바에서 그의 임종을 지켰다. 한 연구자는 자신의 책에서 그 짧은 묘비명이 서슬 퍼런 상징이라고 썼다. 보르헤스의 문학으로 들어가는 의미심장한 열쇠라고. 기존의 문학적 리얼리티와 보르헤스 식 글쓰기 사이에 가로놓인 칼. 믿었던 그와는 달리 나는 그것을 지극히 조용하고 사적인 고백으로 받아들였다. 그 한 줄의 문장은 고대 북구의 서사시에서 인용한 것이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침상에서 보낸 첫 밤이자 마지막 밤. 새벽이 올 때 까지 두 사람 사이에 장검이 놓여 있었다. 그 서슬 퍼런 칼날이 만년의 보르헤스와 세계 사이에 길게 가로놓였던 실명이 아니었으면 무엇이었을까. 스위스를 여행한 적은 있지만 제네바에는 들리지 않았다. 그의 무덤을 굳이 직접 보고 싶지 않았다. 대신 그가 보았다면 무한히 황홀해했을 성 갈레네 도서관을 둘러보았고, 루체른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저물녁 까지 얼음 덮인 알프스의 협곡 사이를 돌아다녔다. -『희랍어 사전』 (한강/문학동네)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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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어찌 하다보니 ‘신문사 기자’ 생활을 십 수년간 했고, 또 어찌어찌 하다보니 ‘영화평론가’로 불리게 됐다. 영화를 너무나 좋아했지만 한 번도 꿈꾸진 않았던 ‘영화 전문가’가 됐고, 글쓰기에 대한 절망의 끝에서 ‘글쟁이’가 됐다. 꿈이 없었다기보다는 꿈을 지탱할 만한 의지가 없었다. 그리고 이제, 삶에서 꿈이 그렇게 중요한가라고 되물으며 변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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