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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장사 강호동, 모래판을 점령하다
명절이면 생각나는 스포츠 스타, 강호동
강호동의 등장은 가수로 비유하자면 1996년 혜성같이 등장하여 가요계에 아이돌 그룹이라는 신조어를 탄생시킨 H.O.T의 등장에 비견될 수 있다. 1989년 7월 전국 장사 씨름대회 백두급 준결승전에서 18세의 강호동은 당대 최강의 천하장사 이만기를 2-0으로 눕히는 이변을 일으키고 그 여세를 몰아 결승전에서도 임용제를 3-0으로 누르고 백두장사에 오르는 기염을 토한다.
명절이면 생각나는 그때 그 스포츠
민족 최대의 명절인 추석연휴가 LTE처럼 흘러갔다. 늘 쉬고 난 뒤면 아쉬움이 남는 법인지라 모처럼 긴 연휴 뒤에 맞이하는 월요일은 그 어느 월요일보다 피로감이 더 빨리 몰려왔다. 대한민국에 2대 명절을 꼽는다면 정초의 설날과 가을을 맞이하는 문턱에서 맞이하는 추석이다. 대표적인 2대 명절 때마다 차례상의 송편처럼 어김없이 찾아오는 메뉴가 있었다. 하지만 그 메뉴는 송편처럼 꾸준히 찾아오는 듯 싶더니 어느 순간부터인가 조용히 자취를 감추었다.
이제 그 메뉴는 마치 퓨전 레스토랑처럼 변형된 형태로 제공된다. 전문가의 손길을 거치지 않은 채 마구잡이로 비벼져서 말이다. 진정한 메뉴는 좀처럼 접하기 힘들어지고 있다. 과연 그 메뉴는 무엇일까? 바로 대한민국에 몇 안 되는 민속 스포츠, 씨름이다.
씨름은 1980년대 초반 당시 군부정권의 3S(Sports, Sex, Screen) 장려정책에 편승하여 새롭게 편성된 천하장사 대회로 새롭게 부활했다. 1970년대 김성률 장사의 독주시대가 지속되다가 1970년대 후반 새롭게 등장한 신성 이준희, 홍현욱 장사 등이 주목 받으면서 씨름은 어느 정도 인기 기반을 마련한 상황이었다.
당시에는 이준희와 홍현욱이라는 당대 최강 라이벌의 대결을 공중파 중계가 보장된 천하장사 대회라는 메인 이벤트를 통해 노출시키면 충분히 대중의 관심을 모을 수 있었다. 씨름은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데,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돌풍을 일으킨다. 돌풍의 장본인은 당시 최강자였던 이준희 장사도 홍현욱 장사도 아니었다. 약관 20세의 대학생 장사 이만기. 182cm 93kg의 씨름 선수로서는 다소 왜소한(?) 체구를 지닌 이만기는 들배지기, 뒤집기, 잡치기 등 현란한 기술을 앞세워 당대 최강의 장사들을 모조리 모래판에 뉘이고 1대 천하장사에 등극하게 된다.
연예인 못지 않은 준수한 외모의 이만기는 화려한 기술씨름으로 민속씨름의 중흥기를 이끌었다. 1980년대 모래판을 석권하며 황제로 군림한다. 물론 이만기 혼자 일방적인 독주를 했다면 민속씨름의 인기는 곧 시들고 말았을 테다. ‘모래판의 신사’ 이준희, ‘인간 기중기’ 이봉걸, ‘기술씨름의 달인’ 고경철, ‘황소같이 우직한’ 황영호, ‘오뚝이’ 손상주, ‘털보’ 이승삼 등 각기 독특한 개성을 지닌 강자들이 대거 모래판에 등장하면서 이만기와 라이벌 구도를 형성했다.
모래판의 황제 이만기를 넘어뜨린 강호동
강력한 라이벌의 도전에 직면할 때마다 이만기는 끊임없는 자기연마로 극복했다. 그래서 이만기는 진정한 모래판의 황제로서 더욱 빛을 발하였다. 그러나 ‘권불십년’이란 말이 있듯이 이만기도 1980년대가 저물어가던 1989년 여름 이전에 볼 수 없던 새로운 신성의 도전을 받는다. 바로 10대 장사 강호동.
강호동의 등장은 가수로 비유하자면 1996년 혜성같이 등장하여 가요계에 아이돌 그룹이라는 신조어를 탄생시킨 H.O.T의 등장에 비견될 수 있다. 1989년 7월 전국 장사 씨름대회 백두급 준결승전에서 18세의 강호동은 당대 최강의 천하장사 이만기를 2-0으로 눕히는 이변을 일으키고 그 여세를 몰아 결승전에서도 임용제를 3-0으로 누르고 백두장사에 오르는 기염을 토한다.
사상 처음 10대 백두장사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모래판에 오르기만 하면 무대 위의 록커처럼 광란의 세리머니를 펼치고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대선배 선수들 앞에서 전혀 주눅들지 않는 플레이를 선보이는 강호동은 상대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를 중시하는 씨름이라는 스포츠의 암묵적인 규칙을 대놓고 위반하는 반항아의 이미지를 풍겼다.
강호동은 특유의 유연함과 순간적으로 힘을 모으는 집중력이 탁월했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자마자 백두장사를 거머쥔 1989년은 예고편에 불과했다. 프로 데뷔 2년차를 맞이한 1990년 강호동은 그 해 펼쳐진 천하장사 3개 대회를 모두 휩쓸며 모래판의 본격적인 세대교체를 주도하였다.
‘모래판의 황제’ 이만기에게 유독 강한 모습을 보인 강호동은 이만기와 6번 맞붙어 4승 2패의 우위를 기록했는데, 이만기가 현역 생활 동안 상대전적에서 유일하게 밀린 선수가 강호동이었다. 물론 이만기의 체력이 쇠퇴기에 접어든 부분도 간과할 수 없다. 하지만 모래판에 데뷔한지 2년도 채 되지 않아 당대 최강의 황제로 군림하고 있던 이만기를 상대로 전혀 주눅들지 않는 플레이를 펼친 강호동의 뱃심은 모래판에 신선한 돌풍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강호동은 데뷔와 동시에 18~20대 천하장사 3연패, 54~56대 백두장사 3연패라는 위업을 달성했는데, 이만기도 천하장사 3연패는 달성했지만 백두장사는 2연패까지 달성하는데 그쳤다.
모래판에 10대 돌풍을 일으킨 강호동의 등장은 박광덕, 지현무, 박태일 등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모래판에 데뷔하는 ‘고졸장사’ 열풍을 불러 일으켰다. 이전만 해도 대학을 졸업하고 프로에 데뷔하는 것이 일종의 코스로 여겨졌지만 강호동의 등장은 모래판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탄생시킨 것이다.
1990년 모래판을 석권한 강호동은 이듬해 1991년 연봉협상에 불만을 품고 소속팀 일양약품 숙소를 이탈하는 등 시작부터 순탄치 않은 행보를 보였다. 연봉협상 지연에 따른 훈련부족 등이 겹쳐 강호동은 1991년 상반기에는 눈에 띄는 활약을 펼치지 못한다. 강호동의 빈 자리는 그의 강력한 라이벌 중의 한 명이었던 황대웅이 대신했다. 그는 천하장사를 연거푸 거머쥐며 이만기 은퇴 이후 강호동과 더불어 양대 산맥을 구축하게 된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몸을 조련하여 모래판에 돌아온 1991년 5월부터 강호동은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했고, 백두장사 4연패에 그 해 9월에 열린 23회 천하장사도 다시 석권하며 모래판 최강자의 위용을 다시 드러냈다.
강호동에게는 늘 ‘악동’이라는 꼬리표가 따라 다녔다. 과격한 세리머니 뿐만 아니라 워낙 강한 승부욕을 지니고 있던 탓에 심판 판정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경우도 있었다. 1991년 11월 심판 판정에 대한 과격한 대응으로 인해 강호동은 벌금 500만원의 중징계를 받기도 했다.
‘악동’ 강호동의 거침없는 상승세는 1992년에도 지속되었다. 1992년 3월 24회 천하장사 대회에서 복병 박광덕을 접전 끝에 3-2로 제압하고 5번째 천하장사 자리에 등극한다. ‘모래판의 황제’ 이만기 이후 모래판을 평정하고 있던 강호동은 그 해 5월 갑작스런 은퇴를 발표하여 모래판을 충격에 빠뜨린다. 갑작스런 장기 숙소 이탈에 이어 강호동은 체력적인 한계와 학업 지속을 이유로 은퇴 사유를 밝힌다. 강호동의 은퇴 당시 나이는 불과 22세였다. 이만기가 은퇴를 발표하던 당시에도 27세의 나이에 너무 이른 은퇴를 선언한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을 남겼는데, 강호동은 이만기의 은퇴 당시 나이보다도 무려 5세나 이른 시기에 모래판을 훌쩍 떠난 것이다.
은퇴 후, 예능인으로 변신
모래판에서 활약하던 5년 동안 천하장사 5회, 백두장사 7회 제패라는 굵직한 기록을 남기고 그는 홀연히 모래판을 떠났다. 당시 김정필이라는 또 다른 강력한 신예가 모래판에 갓 데뷔했고, 이듬해 ‘소년장사’ 백승일이 모래판에 가세했던 점을 감안할 때, 만약 강호동이 계속 활동했다면 김정필, 백승일과 더불어 더욱 흥미진진한 라이벌 구도를 형성했을 거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특히 강호동과 비슷한 유형의 기술 씨름을 구사했던 백승일과 강호동이 맞대결을 펼쳤다면 이만기-강호동 이후 최고의 흥행카드가 탄생했을 것이다.
은퇴 후 1년 뒤 강호동은 다시 한 번 세상을 놀라게 한다. 씨름 선수가 아닌 개그맨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강호동은 특유의 끼를 바탕으로 방송에 놀라운 속도로 적응한다. 방송에 데뷔한 지 20년이 지난 지금 강호동은 대한민국 최고의 엔터테이너 중의 한 명으로 자리하고 있다. 모래판과 브라운관을 동시에 석권한 강호동의 포효는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모래판에 데뷔했을 당시 덥수룩한 머리의 새파란 신인이 기라성 같은 선배들 앞에서 주눅들지 않고 광란에 가까운 괴성을 질러대고 당돌한 플레이를 펼치던 그의 모습은 속된 말로 ‘싸가지 없는’ 인상을 안겨주기도 했다. 특히 대선배 이만기와의 대결에서 신경전마저 불사하는 그의 모습은 얄밉기까지도 했었다. 하지만 그는 모래판의 승부를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던졌고, 그의 모든 행동은 강력한 승부근성의 또 다른 표현이었다.
모래판에서의 강한 승부근성은 이후 브라운관에서도 그대로 발휘되어 모래판 못지 않게 험난한 방송계에서 그는 정상에 올랐다. 2010년 예능 프로그램 ‘1박 2일’에서 영원한 ‘모래판의 황제’ 이만기와 20년 만에 샅바를 잡고 씨름을 펼치는 모습은 감회와 동시에 짠한 감동을 불러 일으켰다. 물렁물렁한 외모를 풍기다가도 샅바만 잡으면 마치 영화 ‘판타스틱4’에 등장하는 돌덩이 슈퍼 히어로 ‘더 씽’처럼 단단하게 변하는 강호동의 모습은 여전하였다.
브라운관에서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다가 잠시 방송계를 떠날 수 밖에 없었던 강호동은 1년여 만에 복귀한 지금 다소 침체기를 겪고 있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강한 승부근성을 지닌 강호동이기에 모래판에서 그래왔던 것처럼 브라운관에서 다시 한 번 호쾌한 들배지기를 선보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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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풍요롭게만 느껴졌던 1990년대의 진한 향수가 느껴지는 흔적을 탐사하는 X세대 블로거. 스포츠와 영화를 보고 듣고 쓰는 것을 즐긴다. 늘 끄집어내도 변치 않는(不老) 추억들에 대한 글들을 함께 나누고 싶은 소박한 바램을 지니고 있다.